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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Jul 02. 2019

부유의 미학

::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사람들이 자꾸 졸업 축하한다고,
대학은 어디 가냐고 묻는데
꼭 외계인이 된 기분인 거 있지.
대학생도 아니고 고등학생도 아닌데
이제 내가 뭔가 싶더라고.
응, 꼭 외계인이 된 기분이야.”



고교 입학을 앞둔 새내기일 적, 반대로 학교를 떠나는 고3 언니와 나눈 대화였다. 대학교 추가 합격을 기다리던 언니는 졸업식 당일까지 발표가 나지 않았고, 그래서 졸업하는 기분이 그리 기쁘지만은 않다고 했다. 당장 내일부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사람들의 질문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즐거운 표정을 짓지 못하는 언니를 두고 나는 짐짓 의젓한 시늉을 내며 언니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언니의 기분을 진짜로 알게 된 건 한참 뒤였다. 어딘가 속하지 못했을 때 찾아오는 불안감, 내가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했을 때 오는 박탈감, 경계를 맴도는 외부인으로서 느껴야 했던 소외감. 나는 곧잘 외계인이 되었고, 그때마다 서식지를 찾느라 애를 썼다. 하지만 영원히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지도를 펼쳐 이동하거나, 혹은 남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문 뒤에 꽁꽁 숨었다. 떠나거나, 숨어들거나. 그건 외계인이었던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에는 찌질하고 멋없는 루저 아저씨들이 대거 등장한다. 만성 우울증을, 극심한 스트레스를, 또는 분노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다. 인정을 받기는커녕 언제라도 대체될 수 있는 불안한 노동직에 머물러 있거나, 대출을 받을 수 없는 신용 불량자이거나, 사장이라 하더라도 네 번의 부도를 겪은 무능한 존재다. 누구에게도 박수를 받지 못하는 이들은 갈 곳을 찾아 헤매고 헤매다 결국 수영장으로 모인다.


감각적인 연출, 노련한 중년들의 연기, 짧고 간결한 호흡, 재치 있는 플롯. 코미디 영화답게 연신 호탕한 웃음을 자아냈고, 덕분에 어두컴컴한 영화관에서 다른 관객들과 함께 깔깔대며 웃어댔지만 사실 한편으로 꽤 많은 장면에서 울컥하기도 했다. 연출이 의도한 바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 한 구석을 쿡 찌르는 ‘푼크툼’처럼 나는 거듭 찔리고 또 고꾸라졌다. 루저였던 나날들과 그럼에도 용기 내려했던 가냘픈 시간이 떠올랐달까,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다시 일어나는 그들의 모습이 자못 대견스러웠달까. 혹시 나만 기승을 부리는 건 아닐까 싶어 괜히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사회는 노동하는 인간과 노동하지 않는 인간으로 나뉜 채 유지돼 왔다. 노동하는 인간을 중심으로 세상의 재화와 서비스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법과 정치, 사회와 문화도 그들을 중심으로 바뀌어갔다. 그래서 인간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은 주로 노동 혹은 소속으로 귀결된다.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에는 내가 속한 집단과 사회를 설명해야 하고, 개인으로서의 내가 아닌 ‘소속’으로서의 나를 설명해야 한다. 한 개인의 존재 방식이 소속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회의 프레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소속감’이 인간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프레임이라면, 소속하지 않은 자는 자신의 존재의 이유마저 박탈당하는 상태에 이른다. 은퇴한 중년층 사이에 우울증이 급증하고, 가사를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들이나 더 이상 자식을 키워도 되지 않아도 되는 엄마들의 상실감이 커지고,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취업 준비생들의 고민이 많아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경제적이거나 현실적인 이유 외에도, 사람들의 정서와 정신은 필요 이상으로 괴로워하고 우울에 빠진다. 무능하다고 해석될 이유가 없는 이들이 ‘소속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무능한 자, 실패한 자, 추락한 자, 곧 잉여 인간이 되어 버린다.


우울증을 앓으며 2년 차 백수에 접어든 베르트랑은, 아내와 함께 창문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운다. 아내도, 자신도 그의 삶을 크게 걱정하지 않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아빠의 역할과 노동의 임무를 들먹이며 그들을 질책하고 힐난한다. 이 껄끄러움은 베르트랑의 창문 너머 그의 친척, 사회, 국가로 확장된다.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의 고민 역시 이러한 존재 이유에 대한 회의감으로 연결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느냐던 톨스토이의 질문처럼, 소속이 없는 이들은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

 

존재 이유에 대한 결핍으로 방황하던 이들은 '남성 수중 발레'라는 이름으로 만나 훈련하는 법을 배우고, 치유하는 방법을 배우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비록 온몸에 군살이 가득 달라붙어 그리 멋진 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이들이지만, 이들은 함께 뭉쳐 수영을 하고, 잠수를 하고, 동작을 만들고, 춤을 춘다. 세계 선수권 대회에 나가 그간 준비한 몸짓을 멋지게 선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은 그렇게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들의 존재 이유를 만들어 간다.




영화는 물론 연대와 응원의 방식으로 수중 발레단을 응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핍이 결핍을 메꿀 때 아름다워진다는 얘기나 연대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동그라미든 세모든 네모든, 인간은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존재 방식을 존중해줄 것을 외친다. 땅에 발을 딛지도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부유하는 이들의 존재 역시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부유하는 이들을 질책하거나 힐난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고.


아름다운 부유의 현장이 물살을 가르고 진동을 만든다. 그들이, 그리고 내가 떠나거나 숨어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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