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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색 Sep 26. 2022

음미

  모든 일에는 정말 시간이 필요한 걸까? 아니면 다만 시간 속에 살아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쉽게 내리는 결론일 뿐일까?

  어째서 연관성 없는 상황이 하나의 생각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을까? 생각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다. 그 순간에 떠오를 리 없는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한 것 같다. 생활은 연극 무대 위에서 보이기 위한 행동과 말들을 하지만, 내면은 독백에서만 흐른다. 매일 책상 위에 쌓이는 원고 속 낯설고 기이한 글자들을 요리조리 살피며 핀셋으로 조심스레 옮겨주는 게 하루 중 과반수의 시간 속 내 모습이겠지만, 실제 내 영혼은 먼 곳을 배회하고 있다. 다른 생각에 골몰해 제2의 인생을 함께 꾸려간다. 어려서부터 내 영혼과 육체는 하나였어도 인생은 하나가 아니었다. 내게는 나만이 아는 내면의 내가 있다. 그렇기에 흘러가는 상황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을 법한 생각이 불현듯 불어들어온다. 그게 마치 현실을 도피하고자 외면하고 망상에 갇힌 망상증 환자가 되어가는 과정 같기도 하다. 자제하지 않으면 정신병자가 될지도 모르니까, 정신병자가 되면 상황은 더욱 나빠지기만 할 테니까 정도껏 해야 한다고 몇 번 다짐도 해보았다.

   이런 가설을 세웠던 것이다. 현실주의자는 감상적이거나 망상에 가까운 사고에서 먼, 실제 일어나는 일들을 중심으로 그때 주어진 것만을 가지고 생각하니까 현실에 가깝고 현실적인 판단이 빠를 것이다. 그에 반해 난 너무 이상주의자니까 현실을 부정하고, 현실 감각이 둔하디 둔할 것이다. 현실을 잘 살기 위해서는 이상에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이러한 가설이 부분적으로는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가설을 세울 때는 하나의 정의만 가지고 유의미한 결과를 얻었다고 확신할 수 없다. 세상에는 변수가 많다. 변수를 설정하면 정의할 것이 훨씬 세부적이고 구체적이고 예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이상주의자였으나 단지 이상만 가진 인간이 아니라 수많은 변수가 설정된, 아주 세부적이고 구체적이고 예민한 인간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인생의 맛과 향과 분위기와 온도 등, 다양한 면면을 깊게 탐구하고 관찰하고 연구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만의 방식으로 인생을 음미하며 살게 되었다.

  숱한 날들이 어떤 '시간'이라는 개념에 예속되고 그것을 경험 혹은 추억이라고 부른다. 이미 지나간 과거이고, 과거는 그대로 변하지 않아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과거는 변한다. 현재와 미래가 가진 상황에 따라 과거에 대한 해석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시간이 필요하다' 할 때는 주로 시간의 누적이나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것 둘 중 하나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이런 의미도 하나 숨어 있었다. 지금의 해석은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의미 말이다. 슬픔이 영원한 슬픔이 아닐 수도 있다. 마냥 슬퍼만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다른 상황을 맞닥뜨리는 순간 그 일은 슬픈 일이 아니라 기쁜 일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때가 온다. 물론 그 반대의 상황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그저 시간의 정처 없는 흐름이 모든 걸 주도해서 변화시키는 일은 없다. 새로운 해석과 마음가짐은 분명 준비된 자에게 허락된다. 나의 이상은 계속되는 긍정적 변화에 목표를 두었다는 큰 변수가 있고, 때문에 당장 마음에 선 판단을 유보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현실의 거대한 몸뚱아리 전부를 본다. 현실은 이상을 가지고 넓게 멀리 바라보아야 한다. 선택은 아주 나중 일이다. 차분히 사색하고 음미한 뒤에 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길이 열리면 단 한 길만이 열릴 것이다. 난해하고 복잡한 다섯 갈래, 열 갈래의 길이 열리는 일은 없다. 길이 하나 열린 그 순간, 주저없이 발을 뻗고 당차게 나아가야 한다.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과정이 필요하고, 결전의 날을 앞둔 자처럼 늘 준비되어야 한다. 지금껏 있어온 과거를 훑는다. 또 음미한다. 선택의 날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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