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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색 Aug 19. 2023

신 바벨탑 시대

  만약 다시 흩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제 멈추지 못하는 폭주기관차에서 초를 세고 있을 것이다. 멸망이라는 종점에 도달할 10부터 0까지의 찰나를.

  사람들이 모여서 높은 성을 쌓아올려 흩어짐을 면하고 온 사방에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고 했다. 여호와는 이들의 언어가 하나이므로 시작한 일을 금지할 수 없다고 여겨 모든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고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자 성 쌓기를 그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렇게 쌓다 만 성을 바벨이라 불렀다.

  이 사건을 두고 바벨탑 사건이라 부르며 신에게 도전한 사람의 최후라고 해석을 한다. 그러나 현 시대를 살아보니 그 해석이 아주 엉망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바벨이라 불렸던 그곳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을 했을지 명확하게 보인다. 사람들은 태평성대를 바란다. 풍요롭게 안정되기를, 생활에 불편이 없고 가진 것이 부족하지 않기를 바라고 그것이 복이라고 생각한다. 오로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평생을 다 바친다. 삶을 통해 바라는 것은 잘 먹고, 잘 살고, 부족함 없이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잘 먹는 것은 어디까지가 잘 먹는 것이고, 잘 사는 것은 어디까지가 잘 사는 것일까? 얼마만큼을 누려야 다 누렸다고, 완전하다고, 행복하다고 느낄까? 그 끝이 있을까? 이 시대는 소비의 시대이고, 소비를 위해 물적 자원이 한계에 다다르도록 생산해낸다. 멸종위기의 동물이나 식물이라도 자본 축적을 위해 아낌없이 취한다.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취해 있다. 가질 수 있으면 얼마든지 가져도 되는 세상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법이라는 제도로 자본주의가 통제되고 균형이나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도 벗어날 만큼 벗어난 시대이다. 이제는 누가 더 똑똑하게 편법을 이용해서 부를 축적하는지가 관건이 되었다. 쉽게 벌어들이고 벌어들인 것으로 욕심껏 물질을 소비한다. 유튜버들은 욕심껏 음식을 먹어댄다. 그 많은 음식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많은 자원이 소비되었다. 생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소비는 단숨에 이루어진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돈을 벌기는 어려워도 쓰기는 쉽다. 다 아는 진리인데도 그 부분을 간과하고 산다. 농담처럼 소비하는 말일 뿐이다. 그 말의 본질을 통찰력 있게 보지는 못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휴대폰을 사고 길게는 3, 4년을 사용하거나 짧으면 몇 달만에 새 휴대폰으로 바꾼다. 휴대폰을 만들어내기 위해 들이는 자원은 막대하다. 그 자원이 어디에서 온 걸까? 무한히 쓸 수 있는 자원인 걸까?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자동차 공장에서 매일 수도 없이 많은 차량을 생산해낸다. 여기에도 엄청난 자원이 사용된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은 커피를 마시고 생선을 먹고 고기를 먹고 풀을 먹는다. 80억의 인구가 살고, 온 인류는 음식을 필요로 하고 물을 필요로 하고 집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한도 끝도 없는 줄 알고 매일같이 소비를 일삼는다. 어떤 이들은 가난하고 궁핍하여 단 한 끼의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누군가는 10인분의 양을 한 끼에 먹어치운다.

  바다는 가물었다. 빙하는 녹아내리는데 빙하 아래 채굴할 수 있는 자원을 발견하고 세계 재벌가들은 돈 벌 궁리만 하고 있다. 그 어느 시대보다 앞다퉈 소비하고 아낌없이 자원을 바닥내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당근마켓이 성행을 했다. 그 전에는 중고나라가 있었는데 사기 수법이 교묘해져서 동네 직거래가 가능한 당근마켓 이용이 늘었다. 썼던 물건을 다시 쓰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롭지만 이런 중고 거래가 성행한다는 현실의 이면에는 결국 그만큼의 소비가 남발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오늘 뉴스에서는 중고 의류를 리폼해서 만든 가방을 한 브랜드에서 시중에 판매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수많은 옷가게와 백화점에서 팔고 있는 엄청난 양의 의류를 보면 이걸 누가 다 소비하고 또 이만큼 생산해내기까지 얼만큼의 자원이 또 쓰여졌을까 걱정스럽다.

  그리고 이러한 풍요 속에서 사람들은 땀 흘려 일해서 소득 얻기를 싫어하게 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 있는 청년이 6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집에 있지 않고 생업에 뛰어든다 해도 고되게 성실히 일하기를 원치 않는다. 편하고 쉽고 빠른 것을 맛 본 이상 어려운 길은 피하려고 드는데, 원래 인간이 태생적으로 그러하다.

  여호와가 한 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모여 더 빠르게 멸망으로 달려갈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그럴듯한 표어를 가지고 모였다. '하늘에 닿을 높은 성과 대를 지어서 우리 이름을 온 세상에 알리고 똘똘 뭉쳐서 흩어지지 말자! 우리의 제국을 만들자! 우리의 강대함을 보여주자!' 높아져가는 견고한 성은 장엄했고 자신들의 위업이 대단한 성취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이들의 자만심은 극에 달했다. 그 성을 쌓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고 막대한 자원을 들이부었다. 주변 자연은 모조리 훼손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엄청난 양의 식물이 필요했다. 그리고 성적으로 문란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매독이 창궐하고 있다고 한다. 성병은 성적 접촉으로 발생하는데 일반적으로 성관계가 부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로 생각하면 성병이 두 사람 이상에게 전염된다면 이상한 노릇이다. 요즘은 성관계가 부부가 아닌 사이의 성인이나 청소년끼리도, 심지어는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남에게 해만 안 끼치면' 다 하는 일로 여긴다. 이혼도 흉이 아니라 하고 나이를 많이 먹도록 결혼하지 못한 사람이 성관계를 해보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걸로 여기고 있다. 성에 대한 본질이 사라져 관념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영아 살해, 유기, 아동학대 사건이 왜 늘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성 관념이 무너졌기 때문에 그런 일이 더 자주 벌어지는 것이다! 책임은 회피하고 쾌락만을 좇는 시대이기 때문이고, 소비와 향락에만 취해있기 때문이다. 왜 마약범죄가 늘어나는지, 칼부림 사건이 난무하는지 사람들은 이유를 모른다. 이 시대가 오로지 소비와 쾌락에만 주안점을 두고 자기중심적인 행복에만 도취되어 이제까지 지켜져 온 질서와 순리를 무시하고 미덕과 도의와 책임을 중요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그러한 사람의 태생을 잘 아셔서 사람의 언어를 혼잡케 하고 흩어져 살게 하셨는데, 사람들은 다시금 언어를 공용화하고 세계를 하나로 통일하려고 한다. 우리 문화가 세계에서도 통한다며 열광한다. 바보가 아닌가! 세계에서 우리 문화가 통하는 게 아니라 원래 사람은 쾌락과 유흥을 좋아한다. 맛있는 걸 좋아하고 아름답고 멋진 것에 반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한다. 세계가 하나와 같이, 한 덩어리의 유기체가 되어서 결국 이루어지고 있는 현 실상이 무엇인가? 약한 계층은 소외되고 배척의 대상이 되고, 아무리 소비하고 갈구해도 물질에서 얻어지 않는 헛헛함에 마약에 손을 대고, 수많은 사람들이 풍요로움 속에서도 우울증을 호소하고 불안과 불면증을 갖고 살며, 무한히 소비해대고 미친듯이 먹어대며, 그러고도 남는 것은 버리고, 버리고, 수도 없이 버려댄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바벨탑의 주변은 쓰레기와 악취와 질병에 걸린 사람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우리는 물론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고 씻고 자야 한다. 거기에 필요한 만큼만 소비해도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먹고 마시는 일은 육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음식과 물질의 기능은 딱 거기까지만이다. 음식이 우리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술도, 커피도 아니다. 취미생활도 아니다. 취미는 지친 일상에 활력을 가져다 준다. 그것 또한 육신의 기능을 좀 더 활성화 시켜주는 정도만큼의 효력이 있다. 우리는 본질을 잊었고, 완전히 잃었다.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운동 그 자체에만 매달리거나 음식 그 자체에 매달리면 영혼은 메마르게 된다. 우리의 영혼이 채워지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해야 한다. 사랑을 베풀고 남을 배려하고 타인과 유대감을 나누어야 한다. 또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맹목적으로 싫어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무식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그럼 무언가 더 대단한 인생의 목적이 있기에 그런 걸까? 자기의 행복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나 80억의 모든 인류가 자기 행복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제각각의 잣대와 판단으로 이기에 갇히게 된다. 모든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타락하였다. 타락의 의미는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창조의 원리에서 벗어나 신의 순리를 어기고 자기 자신이 신이 되었다는 뜻이다. 각자 개인이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이다. 자신이 신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나 신이 아닌 존재가 신이 되어서 벌어진 이 세상의 형국을 보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유지하지 않으시면 사실 단숨에 멸망하고 말 세상이다. 화딱지가 나면 당장 옆 사람을 찔러 죽이고 강자가 모두를 먹어치우고 모든 것을 가져버릴 것이다. 신을 안 믿는 사람은 모순되게도 모든 탓을 신에게 돌리기도 한다. 이 세상이 살기 힘든 이유가 신 때문이라고 탓한다. 그러나 이 세상이 살기 힘든 이유는 사람 때문이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게 실상 신인가 사람인가? 우리가 우울하고 죽고 싶고 슬픈 이유가 하나님 때문인가 아님 나를 괴롭게 하는 특정한 사람 때문인가? 그러나 또 다시금 좀 더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자신을 괴롭게 하는 이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깨달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괴롭고, 자신이 가고 싶은 위치에 닿지 못해 괴로운 것이다. 그러한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슬프고 우울하고 불안한 것이다.

  영어가 공용어가 되고 유튜브로 온 세상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쉽게 보고 즐길 수 있는데, 그 무엇도 내 마음을 진정으로 즐겁게 하고 평안하게 하는 것이 없다. 오히려 무섭기만 하다. 어떻게 하면 이 멈추지 않는 쾌락과 소비의 폭주기관차를 멈추게 할 수 있을까? 다시금 아이를 정상한 사회의 한 일원으로 키워내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 엄하게 가르치는 시대가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가 아이일 때, 아직 순수하고 때묻지 않았을 때(그렇다고 해서 선한 것은 아니다) 더욱 엄하게 가르쳐야 선한 것을 배울 수 있다는 포인트를 완전히 놓친 것 같다. 또 성인이라고 해도 여전히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회에서라도 배워야 하는데, 이미 각자가, 개개인이 신이기 때문에 '존중'이라는 말로 자기를 방어하고 보호하며 잘못된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을 고수하려고 든다. 요즘 사람은 정말 자신이 '틀렸다'는 말을 절대로 못 듣는다. '틀린 게 아니고 다른 거'라는 좋은 말을 자기방어용으로 사용하면서 말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은 좋은 말이다. 허나 좋은 말을 적재적소에 쓰지 않고 그마저도 자기중심적으로 사용해서 문제다. 정말 좋은 말, 일리 있는 말들도 세상에 많지만 그게 거의 아전인수식으로 쓰이고 있어서 차라리 그런 말이 없었을 때가 나을 정도다. 유식하고 좋은 말도 정보가 난무하다 보니 여기저기 아무 데고 갖다 붙이는 꼴은 참 볼성사납다.

  아무튼 세상은 망해가고 있다. 진짜 신을 버리고 가짜 신, 자기 자신을 섬길 때부터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시한폭탄을 작동시킨 셈이다. 다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한 사람이라도 이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현재 보이는 걸 믿지 말고 나아가는 방향을 보고 빨리 사태를 파악하고 정신을 차리고 세상이 가려는 길에 합류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흩으셨을 때, 사람은 안도했어야 했다. 긍휼이 많으시고 인내로 기다리시는 그 마음을 헤아렸어야 했다. 뭉쳐서 자멸하지 않도록 배려하신 그 뜻을 알아봤다면 후대의 사람들이 바벨탑 사건을 두고 '신에게 도전한 인간의 최후' 같은 소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가지 사건을 폭넓게 보고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인생을 바벨탑 짓자고 벽돌 나르며 뻘짓하는 데 시간을 쏟지 말고 하루하루 적당히 소비하고 땀 흘려 일하고 동료를 배려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가기까지 오롯이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별의 먼지에서 나온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이 완전하여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헤아릴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신이기에 사실 당연히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것이 맞고, 인간의 수준에서 논단하는 자체가 인간의 어리석음을 반증한다- 하나님에게서 온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이 전무후무한 스케일로 소돔과 고모라를 능가하는 시대 속 사람 중에 의인이 10명이라도 있을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 수천 명, 혹은 수만 명이 사는 소돔과 고모라 땅에 의인이 50명, 아니 45명, 아니 40명, 아니 20명, 아니 10명이라도 있으면 그 땅을 멸망하지 마시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단 10명의 의인이 없었다. 의인은 흔히 말하는 도덕군자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하고 사는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기댄 자만이 진정한 선을 발휘할 수 있다. 자기의 의나 선을 내세우는 이는 진정한 선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선과 악의 기준을 인간 개개인이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선, 악은 그것을 초월한 존재만이 구분할 수 있다. 이 모든 사실을 간과한 채 일희일비하며 모든 것을 빠르게 소진해가는 이 시대, 모두가 똘똘 뭉쳐서 각자가 신이 되어 자기 이름을 세상에 내려 하는 존재들로 가득한 이 시대, 이 시대가 바로 신 바벨탑 시대이다. 인간은 이제 그 경영하는 바를 그치지 않을 것이고, 세상의 끝은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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