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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유정 Dec 12. 2022

언제부터 마음을 아끼는 사람이 됐지

아끼다 상해버린 케이크처럼 하나도 안 멋져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진 게 지난 3월이니까 9개월 만이다. 그동안 정말인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맨 정신으로 집에 들어가지 못해 매일 술을 마시기도 했고, 무릎에 염증이 생길 때까지 운동에 미쳐 살기도 했고, 생각 없이 카드를 긁어대며 헛헛한 마음을 채우기도 했다. 괜찮아졌다가도 무너졌다. 처음 이별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 애를 사랑하는 데에 마음을 다 소진해버려서 정작 나를 지킬 마음이 부족했다.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매일 쓰던 일기도 중단, 브런치에 쓰려고 계획했던 에세이 프로젝트도 보류. 심지어는 스케줄러에 쓰던 간단한 메모조차도 어렵게 느껴졌다. 이왕이면 따뜻한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고 싶은데, 내 삶이 전혀 희망적이지 않았기에 거짓을 쓸 수는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불행을 써보려고도 했지만 자꾸 눈물이 나서 한 문단을 채우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올해는 내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글 쓰기를 멈췄다.


그랬던 내가 이렇게 다시 글을 쓴다. 다시 글을 쓰고 싶어 졌을 만큼 숨통이 트였다는 뜻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인 듯하다.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도 사랑이 되질 않아서 정말 마음이 고장 나 버린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이제야 비로소 전 남자 친구와의 이별을 받아들였고, 짙은 흔적들을 많이 지워냈고,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추억을 쌓을 준비를 시작했다.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나 했는데,


역시 쉬운 게 하나 없는 인생. 어쩐지 이번 연애는 자주 낯설다. 아직 함께 보낸 시간이 길지 않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게 두렵다. 마음을 아끼는 사람은 하나도 안 멋지다는 걸 알면서, 마음이 불쑥 오버하려고 할 때마다 멈칫한다. 집에 가는 길에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번호를 눌렀다가 전화가 루틴이 되는 게 무서워서 관뒀고,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막막해서 속상했지만 결국 털어놓지 못했다. 의지하고 싶다가도 의지하기 싫어서 많은 것들을 주저하고 있다.


차라리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후회하는 게 더 나을 텐데, 자꾸 바보 같은 방어기제가 발동해 마음을 억누른다. '어떡하지. 이거 괜찮은 건가.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만 좋아해야 되는 건 아닐까. 나 이제야 좀 괜찮아졌는데 괜히 기댔다가 또 무너지면 어떡하지.' 하루가 다르게 커져 가는 마음과는 달리, 머릿속은 잔뜩 복잡해서 한 걸음 내딛기가 어렵다.


그에게는 그냥 예기치 않게 남자 친구가 생겨서 좀 낯설고 어색한 것뿐이라고,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내외하는 거라고 불안한 감정을 돌려 말했다. 그런 내게 그 사람은 세심하게 물어줬다. 어떻게 하면 네가 편해질 수 있냐고. 얼른 우리가 편해졌음 좋겠다고.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런 거라면 자주 봐야겠다고. 연애 초반이라서가 아니라 앞으로도 변함없이 자주 볼 거라고 말이다. 따뜻한 말들이 고마운 한편 초조한 마음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 사람은 사랑에 빠지는 게 무섭지도 않나? 나는 너무너무 무서운데. 그가 사라진 이후의 빈자리에 내가 또 무너질까 봐, 마음을 금세 다 줘버리는 내 약점이 들통날까 봐 겁이 나서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사랑에 빠지는 게 뭐가 무서워.


나도 안다. 사랑에 빠지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실은 헤어지고 아플까 봐 무서운 거란 걸. 하지만 그게 무섭다고 사랑을 멈추는 것만큼 미련한 짓이 또 있을까. 맛있는 초코 케이크를 사다 놓고 아껴 먹겠다고 버티다가 상해버릴 때까지 방치하는 거나 다름없다. 케이크는 사자마자 바로 먹을 때 가장 맛있다는 것을, 사랑도 마찬가지라는 걸 안다. 지금만 할 수 있는 사랑이 있고, 지금이니까 주고받을 수 있는 마음이 있다.


잘하고 싶다. 더군다나 어물쩍거리다가 소중한 타이밍을 놓치기는 더더욱 싫다. 잘하고 싶어 욕심이 나는 것들은 항상 어렵던데, 그래서 나는 이번 사랑이 어려운가 보다. 정신없이 수다 떨다 보면 누가 시간을 댕강 잘라 훔쳐가기라도 한 것처럼 몇 시간씩 흘러 있고, 바보 같은 장난으로 웃음이 끊이지 않게 해주고, 독특한 다정함으로 날 아껴주며 확신을 주려고 노력하는 그에게, 마음을 두 배로 얹어주지는 못할 망정 아끼지는 말아야지. 이렇게 고마운 사람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보답은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에 풍덩 빠지는 것' 아닐까. 그는 내 겁쟁이 같은 모습마저도 꽉 안아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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