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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i Apr 05. 2020

코로나19가 준 뜻밖의 것

방구석에서 쓰는 코로나 시리즈. 마지막

칩거한 지 두 달이 넘어간다. 위험군에 속하는 연령대도 아니고 평소 기저질환이 있지도 않다. 그냥 집에서 머물라기에 그러고 있다. 그런데 주변에 올라오는 근황들을 보면 나만 빼고 다들 잘 먹고 잘 놀러 다니는 것 같다. 약간의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은 들지만, 경쟁심리로 꽃놀이를 가거나 맛집 탐방을 하거나 그러고 싶진 않다. 대신에 다른 것을 택했다. 그림 그리기.


평소에도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는 만화가가 꿈이기도 했다. 부모님의 반대로 접어야 했지만 나름대로 독학하여 데생, 유화, 아크릴, 태블릿 일러스트 등등 취미로서 간간히 그려왔다. 그러나 요 몇 년간은 바쁘다는 이유로 서너 시간씩 그림을 그리는 것은 사치가 되었다. 핸드폰에 뜨는 스크린 타임은(핸드폰 하루 사용시간) 6시간에 달하는데 말이다.


코로나 사태는 그런 나에게 거의 무한한 시간을 주었다. 하루가 이렇게 길었던가? 하루 종일 자고 일어나도 12시 전이다. 종일 핸드폰을 하고, 맛있는 녀석들 연속방송을 봐도 해가 지지 않는다. 슬슬 우울해지기 시작한다. 내 몸이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었다.


오일파스텔을 주문했다. 나에게만 뜨는 유투버인 줄 알았더니, 대부분의 사이트에서 '오일파스텔 품절'인 것을 보아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림은 그려왔지만 파스텔은 처음이라 유튜브 영상을 보고 차근차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영상은 10분 남짓인데 실제로는 3시간이 걸렸다. 몇 번 그렇게 그리고 나니 감이 잡힌다. 슬슬 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왼쪽은 유투버 이사랑님의 영상을 보고 모작한 것, 오른쪽은 사진을 보고 그린 것.
왼쪽은 이탈리안친구의 초상화를 (미완) 오른쪽은 눈사진을 보고 그린 것. (속눈썹 망..)

그리고 싶은 풍경을 정하고, 그릴 때 들을 플레이리스트를 고르고, 쓸 색의 파스텔을 골라 순서대로 나열한다. 종이를 고정한 뒤 밑그림을 그리고 색을 올린다. 처음에는 단순한 색을 올리고 천천히 색을 더해 내가 원하는 색감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다 보면 적게는 두세시간, 많게는 네다섯 시간이 훌쩍 간다. 완성 후 고정한 종이테이프를 떼어내는 순간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며칠 그리다 보니 어느새 10개의 작품이 나왔다. 뿌듯한 마음에 몇 개의 그림을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맞아, 나 그림 그리는 좋아했었지?


대학 때 동아리를 하며 오래 알고 지낸 동료들에게 그림을 선물한 적이 있다. 각자 얼굴을 당시 유행하던 팝아트 스타일로 재해석한 것이었다. 6~7명의 그림을 완성하는 데에는 3주 정도가 걸렸다. 손에 얼룩이 지워질 날이 없었고, 그림을 말리기 위해 방의 반은 캔버스에게 내줘야 했으며, 물감 값도 쏠쏠하게 들었다. 그러나 고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주기 전 미리 사진을 찍어놓지 않는 것이 약간 후회가 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늘 행복이다. 그것을 받을 이들의 표정과 반응을 생각하면 그 자체가 즐거움이다.


오래간만에 미술용품을 모아둔 서랍을 열어보았다. 붓에는 물감이 아닌 먼지가 앉아있었고, 다 쓰지 못한 콩테가 네 자루였으며, 젯소와 유화물감은 딱딱히 굳어버렸는지 뚜껑이 열리지도 않았다. 알바비를 모아 미술용품 하나하나 장만하며 즐거워 하던 때가 있었는데. 다음 달은 무슨 색을 살까 행복한 고민을 하던 때가 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제 이 서랍에 오일파스텔이 하나가 추가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시간이 아니라, 여유였을지 모른다.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해! 열심히 공부해서 목표를 이뤄야 해! 남들보다 뒤처지면 안 돼! 부모님이 어디 가서 기죽지 않게, 자식 자랑하게 해 드려야지! 그러한 생각들이 자꾸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사치로 만든다. 하루에 그림 하나 그린다고, 좋아하는 영화 보고 리뷰하나 쓴다고 인생이 뒤처지지 않는다. 요즘에는 오히려 그러한 활동들을 수익화하여 부가 수입을 창출하기도 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그런 일 할 시간에 공부나 해! 그게 돈을 주니 밥을 주니?'라고 말한다면 대꾸할 핑계라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 압박감으로 인해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것들과 멀어졌다면, 코로나를 핑계 삼아 다시 해보라 추천하고 싶다. 취미 하나 가지는 것 즈음 어렵지 않다. 인스타 트윗터 유튜브 보는 시간 한 시간 줄이면 되고, 치킨 한번 사 먹는 가격이면 제2외국어 학습지도 할 수 있다. 진입장벽을 만드는 것은 돈도 시간도 아닌, 나 자신이다. 그것을 깨부수는 것도 나 자신이다. 대신 깨부순 장벽 뒤에 맞이하는 행복도 오롯이 나만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그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우린 그런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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