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독자가 언팔을 하겠다고 연락을 했다
얼마 전 한 독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부계로 디엠을 보내는 거라고 했다. 그는 예전부터 내가 올리는 피드의 결이, 그리고 작품이 좋아 팔로우를 했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 내가 올리는 콘텐츠와 영상들이 너무 대중적 코드가 돼서 피로하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언팔을 했는데 이 말을 꼭 전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마음이 씁쓸했다. 나도 하루에도 정신없이 쏟아지는 영상 때문에 피로감을 느끼는 요즘이다. 하루라도 인스타를 하지 않으면 급변하는 트렌드를 놓칠 때도 있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래도 지금까지 정제된 이야기를 전하던 작가가 쏟아지는 이 시대의 소란에 편승했으니 실망을 했을 수도 있다.
나도 애석한 일이다. 우리 세대는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며 실존하는 이른바 “look at me” 제너레이션이다. 존재감을 알리지 않으면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시대가 됐다.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나를 알려야만 한다. 조회수를 위해 뭐든 하는 세상이 됐다. 다들 방법론까지 만들고 종교처럼 받아들이며 노출에 혈안이다.
소설가로서의 나 역시 look at me 제너레이션이다. SNS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숏폼 콘텐츠를 일상 언어로 채택했다. 내게도 빅데이터가 쌓였다. 노출이 점점 떨어지는 진중한 글은 점점 덮어두기 시작했고, 오히려 시답잖은 농담이나 유행하는 밈에 편승했다. 그게 더 효과적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메타 홍보 담당자랑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이제 콘텐츠가 너무 많아서 자극적인 콘텐츠가 아니면 노출이 되기 힘들다고 했다. (자극이) 인게이지먼트가 없는 콘텐츠는 단숨에 사장된다고 했다. 나는 자조적으로 말했다. 이제 나는 내가 문학가인지 노출에 혈안이 된 크리에이터인지 모르겠다고.
담당자는 이제 SNS 상에서 ‘그동안의’ 예술적 울림이나 개인의 진중함은 앞으로 점점 더 주목을 끌기 힘들 거라고 했다. 문득 내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독자가 다시금 생각났다. 결국 나도 보여지기 위해 이 시대의 소음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건 아닐까. 방법론에 귀 기울이고 밈에 소모되는 것이다.
나는 문학가일까 콘텐츠 크리에이터일까. 그 독자가 좋아했던 그때의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래도 분명한 건 그 진중함은 작품 안에는 있다는 것이다. 작품은 세상의 조류와 타협할 수 없는 마지막 경계이다. 내가 아무리 영상으로 소란을 떨어도 문학에서 만큼은 진중하게 임할 것이다.
이제 여덟 번째 책을 출간했다. 타협할 수 없는 문학적 진중함이 담긴 책을 들고, look at me 제너레이션인 나는 또 어떤 소란을 떨어댈 것인가. 그래도 위안이라면 나는 최소한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가로 세상에게 읽혀지기 위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