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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알라 Nov 08. 2023

무정)대낮에 집 앞에서 모르는 남자가 사귀자 했다.

-양파링이 불러온 공포.

 매주 월요일 수요일 오전 10시 필라테스 수업을 간다. 수업 요일과 시간은 몇 번 변경되었지만 1년 동안 꾸준히 해 온 덕에 요즘 건강해진 것 같아 뿌듯하다. 

필라테스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늘 나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김밥을 사갈까, 햄버거를 사갈까, 새우깡을 사갈까, 소금빵을 사갈까?'

 머릿속엔 온통 먹을거리 생각뿐이지만 J와 겨루듯 시작한 다이어트로 꾹꾹 참는다.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어! 양파링이 너무 먹고 싶어!


 아무리 밀어내도 과자에 대한 욕망이 사그라들지 않는 월요일이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고 이렇게까지 참아야 되냐며 울분을 쏟아냈다. 누구도 강요한 적 없는 자발적 다이어트면서 누구한테 화풀이인지 나조차 어이없다. 


 -그래 먹고 싶으면 먹어. 낮에는 괜찮아.


 답이 정해져 있음을 눈치챈 J는 말려봤자 좋은 소리 못 듣겠다 싶었는지 나의 군것질에 동의했다. 

대로변에 위치한 마트와 편의점은 이미 지나쳐서 집 근처 작은 골목에 위치한 세븐일레븐으로 향했다.

짭조름한 양파링을 집어 들고 신이 나 사진을 찍어 J에게 보냈다.


 -다 먹진 않고 반만 먹을 거야. 신난다.

 -그래 가서 맛있게 먹어.


 오전 11시 30분 '이석훈의 브런치카페' 라디오를 들으며 양파링을 꼬옥 안고 골목 따라 집으로 향하던 중 내 왼쪽 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 돌려보니 오토바이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입을 뻐끔 거리며 나에게 뭐라 말하고 있었다.

 라디오를 듣고 있어서 부르는 소리나 오토바이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길을 물으려는 건가 싶어 왼쪽 이어폰을 빼며 "네? 뭐라고요?"라고 물었다.


 "오빠랑 사귀어 볼래?"




 잘못 들었나 싶어 멍하게 그를 쳐다봤다.


 "오빠랑 사귀어 보는 거 어때?"

이제 보니 오토바이가 꽤 내 가까이에 있었다. 그놈이 힘을 가하기 위해 손을 뻗으면 잡히고도 남을 거리였다. 밭일을 하는지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초점 흐린 눈빛으로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그놈이 단 몇 초만에 무섭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좁은 골목에 그놈과 나 둘 뿐이라는 사실에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겠다.'라는 나쁜 생각이 스쳐 지나가며 공포심이 온몸을 휘감아왔다.


 더군다나 지금은 오전 11시 30분인데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미친......"

 너무 놀라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게 맞다. 

꽤액 소리치면 1층 할머니 댁까지 내 비명이 닿을 텐데, 그러면 할머니 집에서 옹기종기 화투치고 있을 동네 할머니들까지 우르르 다 나올 텐데, 코너만 돌면 우리 집인데 그럼에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그저 그놈에게만 들릴 정도의 짧은 욕만 뱉어졌다.


 "미안합니다."

 경멸에 가득 찬 눈빛과 마무리 짓지 못한 나의 욕설에 미안하다며 뭐라 뭐라 씨부리는 그놈을 뒤로하고 왔던 길로 몸을 돌려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큰 골목으로 나가기 위해 안간힘 썼다.

 혹시나 그놈이 우리 집을 외워버릴까 싶어 집으로 바로 갈 순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J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의 중이니 문자 주세요.'라는 문자가 날아왔다. 하필 이때 회의라니......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상황을 전했다. 있는 욕 없는 욕 온갖 욕을 대신해 주며 일단 큰길에 위치한 동사무소로 들어가 있으라 했다. 


10분쯤 지나고 동사무소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양파링은 꼬옥 안은 채.




 긴급한 상황에 전화받지 못한 것이 미안했는지 J가 호신용 호루라기를 사줬다.

덜렁덜렁 달고 다니는 게 번거롭다고 가방에 달겠다 했지만 기어코 휴대폰에 달아 주었다.


 "앞으로는 큰 길로만 다녀, 좁은 골목으로 다니니까 이런 일이 생기잖아."


 "늘 큰길로 다녔는데 편의점서 양파링 사려고 오늘만 좁은 골목으로 온 거야."


 "으휴, 양파링 하나 먹으려다 이게 뭐냐!"

 괜히 양파링을 탓해보지만 J의 얼굴엔 걱정과 미안함이 한가득이었다.


한 동안은 낮이든 밤이든 한적해서 좋았던 동네가 한적해서 무섭게 느껴졌다.

공포스러운 일은 대부분 밤에만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이번 일을 겪고 나니 대낮에도 조심해야겠다 싶다.

하지만 문득 대낮에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조심하고 경계하고 살아야 하는지 짜증이 났다.


 잘못은 그놈이 했는데 뒷감당은 당한 나의 몫인 게 맞는 건가?

 아니 그리고 내가 뭐 얼마나 경거망동했다고 조심해야 하는 것인가?

 울화가 치밀지만 여전히 내가 조심하는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J가 사준 호신용 호루라기를 휴대폰에 단 이후 "차 샀어?"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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