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기대하지 않아요."라 말하는 HR팀장님.
-가식이라도 좋아
한 회사에 14년을 다녔다.
누군가는 성실하고 끈기 있다 생각하겠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걸 힘들어하는 성격 탓에 '이직'은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정년퇴직'의 값어치가 예전만 하지 않는 시대지만, 나는 그곳에서 '정년퇴직'을 꿈꿨었다. 아니, 꿈이라기보다는 당연했다.
'번아웃'으로 어쩔 수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2년 간 글 쓰며 와플가게 아르바이트 생으로 살다 보니 '나'에 대해 조금 알 것 같았다.
'직장인'으로만 살아왔기에 '직장인'으로 살아야 심신이 안정되는 인간이라는 것을, 그것도 '제조업 회사'.
그렇게 1년 간 가슴 졸이는 구직활동이 시작되었다.
자신감도 자부심도 모든 것이 바닥 치던 시점에 지금 회사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았다. 너무나 값진 결과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밀려왔다. 올 한 해 행운을 다 끌어다 쓴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에~ 그 정도예요? 그 마음 언제까지 가나 볼게요~"
팀장의 퇴사로 고된 날을 보내고 있던 박대리는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네가 알겠냐! 2년이나 쉬었는데, 이전보다 나은 연봉과 처우로 취직하게 되어 기쁜 내 마음을.
노조 전담 및 노사 간의 분쟁 해결이 나의 주요 업무였다. 주요 업무는 이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조가 없는 사업장이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왜 저를 채용하신 건가요?"
나를 뽑은 이유를 나조차 모르겠어서 팀장님께 물었다.
예방차원이라고 하셨다. 복수노조 사업장에서 10년 간 다사다난한 경험이 있는 나를 채용했다고 했다.
이 말인즉슨 아직까진 내가 성과를 보일만한 뚜렷한 업무가 없다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 부서 인원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본인의 몫은 본인이 만들어야 해요."
"그렇게 앉아만 있지 말고 뭘 해야 되나 생각해 봐요. 내 일은 내가 만들어야 된다니까."
"이번 주 뭐 할 거예요? 놀고만 있을 거예요? 그럼 다음 주는 어떤 일을 할 계획이에요? 계획 안 세웠어요?"
"본부장이 우리 부서를 안 좋아한다고요. 그러니 뭐든 해서 성과를 만들어야죠. 본인 책상 빠지지 않으려면."
"뭐해요? 사무실에만 박혀있지 말고 나가서 애들하고 좀 친해지고 해요. 커피도 한잔 하고."
나도 알고 있는 감자 같은 내 처지를 콕콕 집어 쑤셔대는 차장님이 처음엔 '관심'이다 싶어 감사했지만 미워져 버렸다.
첫날부터 시작된 차장님의 '성과 압박'은 나를 쭈구리 감자로 만들었다.
'첫날인데... 그래도 첫날인데...'라는 서운함과 동시에 '돈값'하는 경력직 사원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밀려왔다.
경력직 이직이 처음이라 원래 경력직으로 이직하면 입사 첫날부터 이렇게 독촉받는 건가 싶었다.
뭘 해야 할지, 어떤 시스템으로 운영되는지, 직원들의 성향은 어떠한지 파악하기도 전에 '내 책상의 존재'를 내가 만들어내야 하는 현실이 매우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눈칫밥 먹으며 2주를 보냈다.
그러던 수요일 어느 날, 본사 HR팀장님이 대구공장에 업무차 내려오셨다.
원래는 최종면접에 면접관으로 참석할 예정이셨으나, 일이 생겨 기획본부장님이 대신 면접을 봤었다고 했다.
(참고로 본사 HR팀과 대구공장 우리 팀은 같은 '기획본부' 소속이다.)
"선임님, 오후에 시간 괜찮으시면 친해질 겸 티타임 어떠세요?"
"네 알겠습니다."
윗 지방 분이라 그런지 참 말이 상냥했다.
"속에 있는 말 다 하면 안 돼요. 기획팀 출신이라 뭐든 허투루 듣지 않아요."
HR팀장님과 티타임을 하기로 했다는 말에 차장님이 겁을 줬다.
어색한 침묵이 싫어 있는 말 없는 말 다 하는 성격인데, 이번에는 입 닫고 듣고만 오자 다짐했다.
오후 1시 30분 HR팀장님은 본인의 소개로 티타임을 시작했다.
제출한 이력서를 통해 나의 신상 정보는 공유되었지만, 정작 새로 입사한 나는 같이 일할 동료들의 정보에 대해 모르고 있는 상황이 불합리하다며 차근차근 같은 본부 소속 동료들의 이력을 소개해 주셨다.
이런저런 농담도 해가며 회사의 분위기, 인재상, 추진되고 있는 과제들에 대해 전해 들었다.
말을 아끼며 그저 팀장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있던 어느 순간 침묵의 몇 초가 회의실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고, 견디지 못하고 그만 속마음을 말해버리고 말았다.
"잘하고 싶은데, 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속상하고 부담돼요."
'아차'싶었다. 첫 티타임인데, 속마음을 얘기하는 건 프로답지 않은 행동이라며 자책했다.
"경력직 분들은 신입사원과 달리, 입사 첫날부터 그런 부담감을 가지시더라고요. 저도 이직을 몇 번 해봐서 그 마음 잘 알아요. 많이 부담되세요?"
"아...... 아니요. 많이는 아니고요."
"선임님."
무섭다. 갑자기 뒷 말없이 진지하게 나를 왜 부르는 거지?
"네?"
"아무도 선임님한테 기대하지 않아요."
"네?"
무슨 말이지? 기대를 안 한다니? 수습기간 평가를 통해 나를 자를 수도 있다는 건가? 그러니 혼자 알아서 잘해 된다는 건가?
"이제 입사한 지 2주 되셨잖아요. 부담 갖지 마세요. 우리도 선임님께 기대할 만한 그런 큰~일은 안 드려요. 적응하시는데 시간이 필요하실 테니 짐은 내려놓으세요."
울컥했다. 2주 간의 마음고생을 들킨 것 같았다. 정말 눈물이 나려 해서 어금니를 있는 힘껏 꽉 깨물었다.
"아셨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아요. 부담 내려놓으세요."
기획팀 출신이라 허투루 넘기는 게 없다느니, 한 마디 한 마디 다 기억하고 있다가 본인에게 이득이 될 때 그걸 이용할 수도 있다느니 그런 건 개나 줘버리자.
8시 출근과 동시에 쭈글이가 되는 나에게 가장 필요한 응원과 용기, 위로를 준 건 지금 이 순간, HR팀장님 뿐이라는 사실에만 집중하자.
HR팀장님이 처방한 약 덕분인지 차장님이 "뭐해요? 이번 주 뭐 할 거예요? 찾아봤어요?"라며 다그쳐도 어제만큼 상처가 되진 않았다.
"이번 주도 김 사원 따라 현장 패트롤 같이 돌면서 현장 부서별 업무 숙지할게요. 그리고 차장님 업무 서포트할게요. 시키실 일 있으시면 시켜주세요."
"...... 현장 패트롤은 그만 가도 돼요. 그만큼 현장 들어갔으면 됐어요."
당황하지 않은 내 반응에 재미없어진 것인지 차장님의 목소리톤이 한껏 낮아졌다.
나에게 아직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안다.
그들에게 아직 내가 이방인 같아 낯선다는 것도 안다.
이 모든 상황이 머리로는 알겠는데, 회사만 오면 외롭고 쓸쓸했다.
어떤 목적으로 티타임을 요청하신 건지, 어떤 의도로 가벼움을 가장한 질문들을 건넨 건지 알지는 못하지만, 신규 입사자의 흔들리는 멘털을 잡아준 HR팀장님의 적절한 타이밍이 빛나는 순간임은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