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알라 Oct 25. 2024

14년 장기근속이 좋은 건 아니라네요.

-공감했던 내가 더 싫다

"보고서 발표요???"

"한 번도 안 해봤어요?"

"보고한 건에 대한 간략한 부연 설명은 해봤어요... PPT파일을 만들어서 사장님, 본부장님 앞에서 발표해 본 적은 없어요."

"여기는 매사 보든 게 다 발표예요. 그래서 우리 부서 핵심 역량이 발표와 PPT파일 만드는 스킬이죠."


8월쯤이었던가?

극 I인 내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전해 들었다.

매월 정책/노무/노동조합/지역 이슈로 이루어진 보고서 자료를 만들어 발표를 하게 될 것이라는 어마무시한 소식말이다.

대학생 때도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게 무서워 일부러 안경을 끼지 않고 학교에 간 적도 있다.

'눈앞에 뵈는 게 없냐!'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정말 뵈는 게 없으니 떨림이 줄어들어서, 내 인생 최고의 발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발표얘기를 들은 순간부터 매주 수요일 사장님이 오시는 날이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본사 공장이 다른 지역에 있어서, 대구공장엔 매주 수요일마다 오신다.)

"내일은 사장님 오시니까, 발표 준비 미리 해놓으세요."

팀장님의 한마디에, 그날 퇴근길에 안정액을 사러 약국에 들렀다.

안정액을 마실 정도냐 싶겠지만... 그렇다. 나란 쫄보는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온갖 미신과 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바보 같으니라고!!

출근길에 깜박하고 안정액을 놓고 왔다.

부지런하면 뭐 하나.. 머리가 이리도 나쁜 것을...

나 자신을 한심스럽게 여기며 빈 속에 출근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오전에 얼른 발표를 해치우고 싶은데 사장님 일정이 바빠 오후 4시로 발표 시간이 잡혀버렸다.

벌렁대는 심장은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농담에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밥도 목구녕으로 넘어가는 건지, 씹기는 한 건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 차리고 보니 오후 4시 50분이었다.

이미 보고서 발표는 끝이 난 모양이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40분 정도 내내 내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가끔 발음이 꼬이는 바람에 덩달아 얼굴이 홍당무 되기도 했던 것 같다.

내 옆에 앉아 PPT파일을 넘겨주던 차장님과 맞은편에서 '그렇지, 그렇지'라며 연신 고개 끄덕여주던 팀장님이 계셨던 것도 기억난다.

그리고... 그리고... 아! 입사 후 야심 차게 준비했던 '여직원 간담회'에 대한 보고 현황을 들으신 사장님의 한마디도 생각났다!

"이거... 도대체 왜 하는 거예요?"


"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부정적이신 듯한 사장님의 말투에 얼어버렸다.

"소수에 해당하는 여직원과의 유대관계 형성과 아무래도 고객사에서 여직원 관련된 조직활동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꼭 필요한 간담회라, 여기 정 대리가 단독으로 준비해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입도 뻥긋하지 못한 나 대신 차장님이 열심히 해명하고 있었다. 



-선임님, 시간 되시면 마당 한 바퀴 도시죠.

회의가 끝나고 자리에 앉아있는데, 차장님이 메신저를 보내왔다.

-예...

-고생하셨습니다.

차장님이라도 나에게 고생했다 해주니, 얼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다음 여직원 간담회 보고서에는 여성만을 위한 질의응답 내용도 추가해서 적어 넣는 게 좋겠어요. 가령, 직장어린이집 수요조사 라던지... 건의사항 대부분이 조반장 승진 규정이네, 고충처리 접수 불편사항이네.. 남녀공통 주제의 안건이라 사장님이 크게 와닿지 않은 듯하네요."


"아, 그럼 다음 주에 있는 여직원 간담회에서는 여성 특화 질문들 몇 개 뽑아서 질의응답 시간 가져 볼게요!"


"아니 아니, 안 물어봐도 돼요. 보고서에만 관련 내용 넣어도 돼요. 뭐 하러 또 물어봐. 일 만든다고 팀장님이 싫어하실 거야."


"아, 가라로 보고서에만 쓰라는 말씀... 이 시죠? 제가 창의력이 부족해서 가라로 뭐 하는 걸 잘 못해서요...."

(참고 : 가라는 '가짜'를 속되게 이르는 말)


"직장은 한 군데만 다녀서 그래요. 이곳저곳 다녀봐야 그런 창의력도 좀 늘고 하는데... 선임님은 한 군데서 14년만 다녀서 거기에 매여 있...."

순간 책임님 스스로 심했다고 생각하신 건지 하던 말을 마저 끝내지 못하고 멈췄다.


"맞아요. 한 군데 고이면 매너리즘에 빠질 가능성이 크죠."

나름 위로해주려고 불러냈는데, 말이 꼬여 당황하는 차장님 대신 나는 나를 깎아내려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한 직장에서 14년 간 성실히, 꾸준히 근무했다는 자부심이,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장기근속에도 '이면(面)'이 있구나.


발표가 끝났다는 개운함이 씁쓸함으로 바뀌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무도 기대하지 않아요."라 말하는 HR팀장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