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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sophia Jul 11. 2019

1. 어쩌다 카트만두에서 일 년 넘게 살았습니다

육 개월만 버텨보려는 생각이었는데 -


어쩌다 보니 네팔에서 일 년 반이나 되는 시간을 보냈다. 육 개월만 버티자는 마음으로 네팔 포지션에 지원하고,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에 처음 올라탔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많이 굴러야 많이 배운다는 마음가짐에 적응이 어렵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다행히 이제는 전기도 24시간 쓸 수 있다고 하고, 그러면 원하는 시간에 뜨거운 물도 쓸 수 있겠지, 식의 자포자기식 마음가짐이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네팔에서 십 년 넘게을 살고 있다는 외국인들, 두 번씩, 세 번씩 네팔로 돌아오는 선생님들은(결국엔 나도 한번 다시 카트만두로 돌아갔지만) 혼란스럽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질서를 가지고 있는 카트만두의 교통질서만큼이나 단박에 이해할 수 없었다.


네팔이 첫 Duty Station이 아니었다면, 난 이 분야에 계속 남아야겠다고 절대 마음먹지 못했을 것이다. 많이 보고, 경험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시간을 나누지 못했다면 6개월 유엔을 경험했음에 만족하고 그만두었지 싶다. 한국과 비교해 조금이라도 낙후된 곳에서는 지내는 것에 대해 마음속의 불만이 커져서는 업무에까지 지장을 주는. 그래서 나도 불행하고 제대로 된 성과도 내지 못했을 거다. 마냥 언제나 불쾌하고, 불행하고, 무의미했을 테지 (물론 유엔도 결국엔 사람들이 만든 조직이라 여느 조직과 같이 비슷비슷했다). 네팔이라는 이름만 듣고 왜 굳이 네팔에서 그렇게 오래 지내냐는 질문 아닌 질문도 많이 들었지만 – 그런 편견 가득한 질문에는 사실 굳이 애써서 변명하는 모양새로 답변해주고 싶지도 않고 - 난 다시 한번 모든 경험 추억 네팔에서 만난 모든 분께 감사하다. 그렇지 못했다면 진작에 도망갔을 테지. 한번 제대로 들여다볼 용기조차 내지 못한 채 말이야. 나도 계속 기회가 생겨서 새로 들어오는 선생님들을 만나게 된다면 많이 도와 드려야지 -



파탄 더르바르 스퀘어


멍멍멍!! 멍멍!


적막한 네팔의 밤은 개 짖는 소리로 이따금 깨어난다. 네팔에서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광견병이라고 할 정도로 길을 나서면 어렵지 않게 길 개들과 마주할 수 있다. 두세 달 지내다 보면 나는 어느새 익숙해지는데, 전화를 거는 분들은 계속 깜짝깜짝 놀라시나 보다. 분명 방 안에서 전화를 받는데도 왜 밤에 겁 없이 바깥을 돌아다니냐고 타박을 받기 일쑤였다.



정부 물은 들어오나요? 물탱크는 있죠? 전기 백업은 되나요? 태양열 판넬은요?


집을 구하는 과정은 정말이지 고통 그 자체였다. 채광이나 교통편, 위치뿐 아니라 상상하지도 못한 세세한 것들에 고려할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집씩 리스트에서 제하다 보면 렌트비는 어느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올라가 있었고, 결국 나는 뻔뻔스럽게 가격을 후려치는 협상 기술을 배워야만 했다. 지진 이후 주거비가 크게 상승한 탓이다. 특히 외국인 밀집 지역에서 모던한 플랫을 구하려면 객관적으로 봐도 비싼 렌트비를 감당해야 한다.



아니, 저도 네팔에 벌써 일 년 넘게 살고 있어요. 무슨 800루피나 받아요. 300루피로 갑시다.


택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하루는 어느 택시기사가 나를 보더니, 돈도 많은 외국인이 (물론 사실이 아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택시비를 깎는지 물어봤다. 이미 현지인보다 몇 배는 더 내고 다니는 걸 알면서도 속는 셈 외국인 가격보다 약간 낮은 가격에 안주하던 차였다. 네팔에서의 하루하루는 이렇듯 실랑이의 연속이었고 스스로 챙기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또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나면서도, 별것 아닌 것에 내가 이렇게까지 하나 싶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속기만 싶지는 않은, 마음 복잡한 날들이 이어졌다.


유엔 하우스 앞에 누워있는 소1


네팔에서는 우리의 상식에 벗어난 광경에 참 자주 마주친다. 길 가던 소가 갑자기 길에서 실례하는 장면을 출근길에 목격하기도 하고, 어제까지 괜찮았던 식당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갑자기 배탈이 나서 일주일을 고생하기도 하고, 우체국에선 한국으로 보내는 택배에 한 땀 한 땀 정성스러운 바느질을 하는 장면을 정신없이 구경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한국과 하나하나 비교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괴롭고 견디기 힘들다. 그렇지만 조금만 마음을 열고 네팔만이 줄 수 있는 특이한 경험을 찾다 보면 매력에 빠지게 된다.


밤새 비가 오고 먼지 씻겨 내려간 다음 날 아침이면 웅장한 설산이 저 멀리 빼꼼 드러나고, 혼잡함 속에서 기어이 나만의 질서를 찾으려 들여다본다. 아무래도 세계 곳곳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무언가를 찾으러 굳이 굳이 찾아오는 나라다 보니 고민할 것들 생각할 것들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올라서는 머리에 가득 지고 사는 것이 일상이 되지만 또 어떻게든 해결책은 나오더라고


카트만두 보우더너트


생각할 것이 많은 날이면 나는 티베트 불교에 심취에 네팔로 날아온 외국인 행세를 할 요량으로 혼자서 택시로 카트만두를 가로질러 보우더너트까지 가서는 쌀국수를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모든 것이 당장이라도 깨질 것처럼 불확실하고 어지러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나는 종교도 없는 주제에 거기까지 찾아서는 굳은 믿음에 기도하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어쩌면 나도 비슷한 것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한참 시간을 보냈다. 신기하게 그렇게 카트만두 교통체증을 뚫고 보우더너트 까지 다녀온 날이면 정신없는 네팔의 전깃줄마냥 엉켜있던 마음이 조금은 정리되는 것 같았다.


어찌 되었건 네팔이 아니었음 이렇게 나름대로 계속 다음 길을 찾아가는 것도 불가능했을 테다. 나중에, 지금 계획하는 것처럼 보건 분야 전문가가 언젠가 된다면, 꼭 다시 네팔로 돌아와 그때는 좀 더 높은 역량으로 네팔의 보건실태에 기여하는 방법으로 이 은혜를 갚고 싶다. 그런 날이 꼭 왔으면!



네팔에서 EMS 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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