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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신 Sep 11. 2020

지워지다

에세이-데이트랜드


기억이 지워졌음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과거의 주박에서 자유로워진다.

태어났을 때 사람은 대부분 깨끗하다.
한 점 세균의 침입 없이 모태에서 나와 온전한 형체로 세상과 마주한다.
심지어 장애를 타고 태어난 이들도 그 한 순간만은 완전하다.

하지만 살아가며 세상의 때를 묻히고 더 이상 세포조차 자라지 않는 순간이 찾아온다.
항상 건강할 것 같았던 몸은 삐걱거리기 시작하고, 눈은 흐려져 앞이 잘 보이지 않고, 생각도 낡아 흐름에 뒤처지게 된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이 사람을 얽매이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만나는 모든 것이 새롭던 시절은 꿈처럼 사라지고, 똑같거나 때로 참혹하기까지 한 지루한 일상만이 생을 가득 메운다.
삶의 길을 거니는 발걸음은 힘겹고 언제 끝날지 갈망하게 된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의 발목을 잡고 놔주지 않는 시간도 찾아온다.

이전의 상황에서 벗어나도 과거의 기억만은 남아 사람을 끝없이 괴롭히기 마련이다.
벗어나고 싶어도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고, 어느 날 갑자기 다시 찾아와 하루를 절망으로 빠뜨려 버린다.
어느 날, 문득 돌이켜봐도 더 이상 아무런 감흥도 생겨나지 않을 때 비로소 기억은 지워지고 과거의 주박은 사라진다.

그 날이 올 때까지 까마득하지만, 막상 오고 나면 기이할 정도로 심상할 뿐이다.
사람이 마지막을 마침내 맞이하는 것처럼 필연적인 일이다.

문득 과거의 주박에서 풀려난 어느 날,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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