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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Dec 22. 2022

이원론의 극복을 극복하기

2017. 8.


한창 신학을 공부할 때, 흔히들 하는 '영육 /성속 이원론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에 크게 공감했었다. 그래서 통합적 전인적 접근을 하는 신학이 필요하다는 데 당연히 동의했었다. 그러나 서서히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말 자체 참 좋을지 모르나 그건 허공에 퍼져 사라지는 메아리가 되기 쉽다. 그 사이에 들어가야 하는 무언가가 있다.


민중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 소수자에 대한 신학 등등이 준 영향도 있었지만 이 지점에서 무엇보다 신비주의/신비신학이 나에게 알게 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대극성'이다. 인간이 종교성을 가지고 바라보는 세계에는 언제나 이 대극성이 존재한다. 양과 음, 남과 북, 성과 속, 영과 육 등등.


과학적으로야 이런 걸 나눈다는 게 더 이상 의미없는 일로 되어가고 있지만 인간이 진화하며 발달해 온 것이 종교성이라고 할 때 앞으로 당분간은 아마 그 효용가치때문에라도 이러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저 '이원적으로 나누는' 종교성의 한 표출방식이 아니라 그것이 나뉘어 맺게 되는 관계형이다. 기독교 신비주의에서는 이러한 대극성이 주는 모순과 긴장을 애써 해소하려 하거나 과학적으로 없는 것으로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동안 신앙인들은 '신과 나'의 관계를 두고도 대극성을 경험해왔다. 그리고 그것이 어설프게 해소되거나 통합되지 않고 '작용'했을 때 벌어지는 체험들을 황홀경이니 합일이니 신화니 하는 방식으로 이름붙여왔다.


그러므로 요는, 이원론을 극복하고 해소하기 전에 그것이 어떤 관계형을 맺고 있는지 알고 그것을 신비신학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뒤에 통합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변증법처럼 다시 극복되고 해소되어야 하는 모순과 긴장을 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 끝에서 신앙인은 '다 알 수 없는 어둠 가운데의 신'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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