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14
성서는 한 글자 한 글자 모두 다 중요한가? 그렇지 않다.
성서에서 성소수자혐오적 근거를 찾는 이들에게 “그럼 돼지도 먹으면 안되지!”라고 반응하는 건 결코 단순한 비아냥이 아니다. 이 반응에 대해 “예수께서 모든 율법을 폐하셨다”고 대답하는 건 성서영감설, 성서무오류설에서 어긋난다. 성서가 한 글자 한 글자 모두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면 정말 그렇게 해야하지만, 모든 문자에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성서가 그렇게 기록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문자를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 그 모진 세월 속에 죽임 당하지 않고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물론 입으로 전해준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죽은 사람들, 또는 그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성서의 문자는 애초에 당사자가 아닌 당사자의 지인이 전해준 ‘소문’ 또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성서를 기록한 이들의 기록 의도를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다시 말해서 성서 안에서 성서의 증언의 원천이 되는 ‘죽임당한 이들’의 이야기를 흔적이나마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발견이 성서읽기를 더 풍성하게 한다. 성서의 글자, 그리고 그것을 기록한 이들의 의도와 정서, 그 행간에 숨겨진 ‘죽임 당한 이들’의 목소리. 그리고 신의 흔적, 신의 침묵.
성서는 묵직한 책이다. 아니, 실은 인간의 가청주파수를 넘어서는 목소리의 향연이다. 0khz에 수렴하는 신의 침묵으로부터 5khz를 순식간에 돌파하며 치솟아오르는, 죽음 앞에서 터져나오는 비명까지. 그러므로 우리가 구할 것은 성서를 성서 영감설이나 성서무오류설을 바탕으로 읽는 괴이한 행위를 버리고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없는 영역을 새로이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이다. 그 귀를 갖게 되면 성서를 혐오나 배제,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어리석은 태도를 회개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성소수자 혐오의 강한 근거로 제시되는 바울. 그는 성서 - 당시로는 히브리 성서 - 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건으로부터 해석했다. 사건은 고백(의미, 해석)을 낳는다. 그리고 그 고백은 다시 사건을 낳는다. 바울이 언급하는 모든 구약의 구절들은 그가 만난 예수라는 필터로 한 번 걸러진 것들이다. “술에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성령의 새 사람을 입으라”는 구절에 “취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반응하는 건 어설픈 신앙인의 어쭙잖은 핑계가 아니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위장이 안 좋으면 포도주를 조금 쓰라”고 권면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바울은 ‘죽임당한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증언하는 (다메섹 거리 체험) 사람이다. 신약연구의 개론적인 설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바울 서신 이후에 기록된 복음서가 바울의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예수의 목소리를 최초로 문자화한 것은 바울이다. 그러므로 분명 당사자 (예수)의 목소리와 당사자의 대리인 (바울)의 증언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그 간극을 복음서가 메울 수 있는지 없는지는 둘째치고라도 말이다. 그 간극이 존재함을 잊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울에게는 동성애도, 술도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라보는 게 중요할 뿐. “예수께서 모든 율법을 폐했다”고 할 때, 바울은 후에 일어난 사건인 예수 사건을 통해 전에 일어난 사건인 유대인의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슬러 올라가면 구약시대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라는 고백(반응)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의 사건이 되었을 때 바울 서신과 복음서라는 고백(반응)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전후관계를 잘라낸 채 제 편할대로 “돼지고기 먹는 율법(자연법)은 폐했지만 동성애 혐오(도덕법)는 여전하다”고 말하는 건 기만이다.
바울은 예수로 인해 “너의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했다!”는 비아냥을 듣고, “이 많은 지식이 모두 배설물 같구나!”라고 고백한 사람이다. 그가 ‘그리스도의 몸’이라 칭했던 그 소중한 공동체에게 보낸 편지에도, 감옥에 갇혀 공동체의 생존을 염려할 때도, 그 흔한 윤리 도덕 규범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서로 사랑하는지, 약한 사람을 잘 돌보는지, 고난 중에도 기뻐하는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지, 그게 중요했다.
바울이 만난 예수는 유대인이라든지 철학자라든지 하는 ‘정체성’과 ‘경계’를 넘은 예수였다. 다마스커스(다메섹) 길가에 바울이 무릎을 꿇은 이유, 예수의 ‘만지심’이 강력할 수 있었던 이유도 예수가 그런 분이었기 때문이다. 불의 혀와 같이 임하신 성령을 받고 유대-이방의 ‘경계를 넘어’ 세계 각처의 방언으로 말한 제자들, 유대인이자 지식인이라는 ‘경계를 넘어’ 찾아온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방 전도’를 시작한 바울, 그들이 만난 예수는 ‘경계를 넘은’ 예수였다.
오늘날 교회 특히 한국 개신교회가 열렬히 찬양하고 높여드리는 그 예수는 바울이 만난 그 예수와 같은 존재일까? 경계를 넘는 건 고사하고 스스로 경계를 치고 비겁하게 숨어버리는 교회가 믿는 예수가? 그 당시 바울이 만나 기록한 귀한 이름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다르다. 2000년간 이런 전통과 저런 신학자, 이런 종파와 저런 편견에 의해 채색되고 버무려진 예수보다는 훨씬 더 생생한 예수다. 오늘날에도 그런 예수를 만나는 게 가능할까?
가능하다. 2000년이라는 시간은 상관없다. 신비주의자 바울이 만난 예수는 이 땅에 계시는 예수가 아니었다. 부활의 영광을 몸소 담으시고 성령으로 임하시는 예수였다. 이 땅에 계셨던 예수, 부활하시고 영광을 입으신 예수, 모두 똑같이 ‘경계를 넘으시는’ 예수였다. 오늘날에도 바로 그 예수가 이 땅에서, 나를, 당신을, 만나기를 고대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오늘 이 땅에 오신다면, 어떤 경계를 넘으려고 하실까? 아마도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난민, 어린이, 타종교인, 노동자라는 경계가 가져다주는 편견과 폭력과 혐오를 넘으려고 하지 않으실까? 이미 그런 예수를 체험한 이들이 곳곳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 작은 소리일 수밖에 없다. 교회가 선도하기는 커녕 세대의 변화에 발도 맞추지 못하는 한심한 오늘날에는 더더욱. 하지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여전히 살아 숨쉰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눅 12:32)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성서는 한 글자 한 글자 모두 다 중요한가? 그렇다.
성서의 글자를 그 시대에 멈춰버린 문자로 보지 않는다면, 지금도 살아 숨쉬며 그 성서의 앞과 뒤와 옆과 위와 아래에서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시는 예수를 보기 원한다면, 세상이든 교회든 전통이든 신학이든 그 어떤 것으로 인해 생겨진 편견을 내려놓고 예수의 목소리를 듣기 원하는 마음으로 성서를 보는 사람이라면, 한 글자 한 글자에 담긴 그 능력을 만날 수 있을것이다.
그렇게 성서는 시대를 뚫고 살아남아 왔다. 유대인 혐오를, 인종 차별을, 여성 혐오를, 의로운 전쟁이라는 기만을, 자본주의를, 이런 것들을 지지하며 성서를 앞세웠던 이들과 맞서 성서의 참 의미를, 주의 이름을 지켜냈던 이들과 함께, 성서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주님의 친구들’과 함께 살아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