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미라클 모닝”이 대유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미라클이라는 팬덤명을 가진 아이돌을 덕질하는 입장에서 미라클 모닝은 늘 미라클과 함께하는 오마이걸만이 누릴 수 있는 세상 없는 특권인데 감히 상표권 등록도 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모닝을 미라클하게 만들어버려 기분이 매우 불쾌했습니다.(?)
제 기억에 가장 오래된 자기계발적 주문은 한 카드사 광고의 ”부자되세요“였는데, 당시 가장 인기 많았던 배우 김정은씨가 추운 겨울 빨간색 니트를 입고 ”여러분~ 부자되세요~ 꼭이요~“라고 해맑게 소리쳤습니다. 외환위기로 죽음에 내몰리던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그 광고를 어떤 심정으로 바라봤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오랫동안 유행어로 회자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에는 긍정의 힘, 일만시간의 법칙, 시크릿 등의 서적과 그 속에 담긴 아주 간단하고 분명한 핵심이 사람들의 이목을 빼앗았었습니다. 자기계발을 위한 주문과 이를 뒷받침하는 데이터는 하나의 공통된 규준을 가집니다. “인생은 특정한 습관을 만들어야 바뀐다.“ 이 습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찍 일어나면 되고, 나를 믿으면 되고, 하나의 일에 일만시간동안 매진하면 되고, 스스로를 긍정하면 됩니다. 그 어느 쪽이든 자본주의를 거치면 일상과 삶 전체의 “자본친화적 개조”를 지향하게 됩니다.
부자가 되려는 욕망을 당연한 목표로 만들고,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습관을 만들려 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비문명적이라고 여겨지는 주술로 돌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모순적이라기보다는 주술까지도 동원해서 인간에게 부자됨을 향한 추동을 일어넣는 자본의 압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회사에서, 집에서, 친구에게 인정받고 주목받기 위해 자신을 통치하는 기술들이 실은 자본의 축적을 위한 핵심적인 도구라는 사실은 생각보다 가까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일상의 면면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를 향한 이러한 자기계발적 통치를 매 순간 벗어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월요일이 싫고, 5일 내내 월급루팡을 하고 싶고, 다이어트는 늘 내일부터고, 영어공부보다는 영국 드라마가 재밌고, 하루의 진짜 시작은 밤 10시의 야식부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신을 두고 늘 질책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의 이러한 “탈주”는 자본이, 사회가 가하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빠져나가려는 본능적인 몸부림입니다.
인간을 개인과 개인으로, 개인 안에서도 여러 가지 정체성으로 잘개 쪼개어 다스리는 최첨단의 기술로 생산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이처럼 자기계발적 명령에 적응하지 못하고 늘 어긋나는 잉여적 자아에 시달립니다. 이 주체와 자아 사이에서의 작은 싸움은 곧 자본주의와 인간의 투쟁에 다름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거대한 투쟁의 한가운데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기에 늘 피곤한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적인 주체보다 이를 벗어나고 극복하려는 잉여적 자아에 더 관심을 갖고, 많은 힘을 쏟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일상에서 간단하게 되새기고 있는 “투쟁적 습관”을 나열해보자면 커피 테이크아웃할 때 텀블러를 쓰거나 (이 때 텀블러 가방을 사용하거나), 비닐봉지 대신 최대한 에코백에 물건을 담거나, 배달음식을 최소화하고 어쩔 수 없는 경우 가급적 가까운 곳에서 포장주문을 하거나, 오프라인 매장이 조금 비싸더라도 택배배송 대신 조금 비싼 직접 구매를 선호하는 등의 행위입니다.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제 자신이 윤리적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저런 행위들로 윤리적 우월감을 느낄 수 있다고 여기는 정서가 그 자체로 자본주의 사회의 병리를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이런 행위들은 다른 사건을 파생시킵니다. 얼마나 많은 자원이 낭비되는지, 자원 소비를 막고 무언가를 재사용하기를 어렵게 하는 구조가 얼마나 보편적이고 완연하게 퍼져있는지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비슷한 습관을 가진 사람들을 찾게 되고, 어떤 사안을 바라볼 때의 관점도 바뀝니다. 습관이 선 자리를 바꾸기도 하는 거죠.
비/반자본적인 습관은 직관적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쉽게 길들여지기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자기계발적인 습관을 들이는 데서 겪는 어려움과 비슷한지도 모르고, 그래서 습관을 정착시키는 방법도 비슷합니다. 습관화를 위한 연상장치가 필요한 것이죠. 아침에 나가면서 쓰레기를 버려야할 때 전날 미리 현관 앞에 쓰레기봉투를 꺼내놓으면 나갈 때 그걸 보고 기억해내는 것이 한 예입니다. 책 읽는 습관을 들이고 싶을 때 집 곳곳에 책을 널어(?)놓는 것도 비슷한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면 개인의 행동이 일련의 흐름을 갖게 되고, 흐름이 강해지면 구조화가 됩니다.
자기계발적 습관화와 이와는 대척점에 있는 비/반자본적인 습관화는 여기서 차이점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구조화가 자본의 궁극적인 목적인 자본 축적을 위해 아주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가능하게 하는 사회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내가 편하게 할 수 있는 선택일수록 그것이 습관이 될 때 내가 아닌 자본을 위한 습관일 경우가 대부분이죠. 클릭 한 번이면 얻을 수 있는 상품(서비스)에는 그 과정에서 은폐되는 노동권의 이슈와 생태적 문제가 아주 많습니다. 이를테면 쿠팡이나 테무가 제공하는 터무니없이 저렴한 상품에는 각 지역 노동자가 처한 열악한 노동환경과 착취의 문제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에 반해 비/반자본주의적인 습관화는 그 내용도 분명치 않고 절대적인 지식의 양도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어떤 습관이든 상황과 구조와 맥락에 따라 투쟁적이 될 수 있으며 거대한 지식없이도 실천할 수 있다는 유연성과 일상성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희망을 봅니다. 누군가가 ‘갓생’이라고 부르는 삶과 ‘혐생’이라고 부르는 삶은 “자기계발적인 정언명령을 준수하며 치열하게 산다”는 똑같은 내용의 삶입니다. 하나의 삶이 만드는 그 모순을 뒤집어보면, 그 삶의 정 반대편에 우리가 진정 살고 싶어하는 삶의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노동이 일상을 지배하지 않는 삶, 나의 여유시간이 내일의 노동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 되는 삶 같은 것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도 자본이 만들어‘주는’ 습관과 내가 만드는 습관 사이에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망설이며 고민하고 투쟁하고 널브러지는 중입니다. 잊지 마세요. 당신의 정치성향이 어떻든, 어떤 삶을 살아왔든, 우리는 오늘도 똑같은 상대와 다른 빛깔의 투쟁을 하는 동지라는 사실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