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은,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음을 인지했을 때였다. 나는 주로 여행을 갈 때나, 조용한 밤에 홀로 있을 때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던 것 같다. 현실적으로 어려울지 몰라도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다. 그런 믿음을 갖다 보면,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운명의 길이 자동문처럼 열릴 것이란 기대를 숨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살다 보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세상은 내게 왕좌의 자리를 냉큼 주지 않는다. 대가가 필요하다. 저절로 주인공이 되는 법은 있을 수 없다. 하다 못해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도 주인공은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용과 맞서 싸운다. 거시적으론 용과 맞서 싸우거나, 운명의 연인을 구출해 내기 위한 것이지만, 미시적으론 결국 본인이 단점을 극복하고, 운명을 개척하고, 스스로 주인공으로 되는 이야기다. 그래서 대개 이런 이야기는 시작부의 주인공과 결론부 주인공의 모습은 사뭇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 되고 만다.
나 또한, 아직 주인공이 아님을 안다. 그 생각은 아침부터 시작된다. 우선 알람 소리를 듣고도, 머리에선 지금 당장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바로 일어나지 못한다. 여기서부터 나는 스스로 서는 방법을 알면서도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단순히 아침잠이 많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만약 누군가를 구출하기로 한 날이라면 나는 아마 아무도 구해내지 못하고, 죽거나 다치거나 겨우 탈출하거나 그 누군가와 같이 붙잡히게 될 게다.
그렇지만 우린 오늘 아침잠에 졌더라도, 설사 오늘 그 누군가를 구해내지 못한 비루한 주인공일지라도 매일매일이 도전임을 안다. 남루한 나그네처럼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도착한 나는 오늘도 어제처럼 직장 상사나 동료에게 쓴소리를 듣고 왔을 테다. 세상과 나만이 존재했던 것이 아님을 나이를 먹거나 사회경험이 늘수록 알게 된다. 그러니까 세상과 나 사이엔 무수히 많은 인간관계, 환경, 구조들이 난잡하게 깔려있다. 지친 마음으로 카페에 앉아 시간을 축내고 있다 보면, 옆 테이블 사람들의 수다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차를 샀다는 둥, 아파트를 새로 계약했다는 둥하는 소릴 내 나이 또래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주고받는다. 카페에 온 것을 후회한다. 월세 내기도 빠듯한 인생인데 말이다. 커피 값이 아까운 것인지, 옆 테이블 사람들이 부럽기 때문인지 모를 후회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나를 괴롭힌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억측하기 마련이라고 한다. 본인 스스로가 힘든 지경이라면, 억측의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자신의 집을 장만하는데, 나는 아직 월세방에 살고 있으니, 나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묻는다면, 각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1) 당신은 월세로 살고 있습니까?
2)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또, 이렇게 물어봤다면?
1)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2) 당신은 월세로 살고 있습니까? 여전히 행복하십니까?
사람에 따라 대답은 다르겠지만, 나는 결국 불행하다는 생각밖에 못할 테다. 질문의 순서가 '개인의 인지'라고 한다면, 우린 스스로 하는 생각들이 나를 억측하고 단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듭 상기해야 한다. 월세방에 사는 것은 불행의 조건부가 아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도 불행의 조건부가 아니며, 행복하지 않다고 하여 불행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쓰는 단어에도 얼마나 모호한 것들이 많은지를 스스로 생각해내야 할 때다. 그러나 세상이 이렇다. 세상은 교묘하게 질문을 바꿔서 내게 슬쩍 내민다. 내가 믿어왔던, 나만큼 나를 잘 알아줄 것 같던, 운명처럼 내게 성공의 왕좌를 내어줄 것만 같은 세상이 어느새 나를 아웃사이더로 내몬다. 그런 생각이 들 때즘, 사람은 여행을 떠나고 조용한 밤에 홀로 가만히 앉아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 믿어왔던 그날들처럼. 그런데 대개 그런 모진 세상은 오로지 내가 사는 나의 세상이다. 나를 처량하게 만드는 세상의 조물주는 나이고, 처량해지는 피조물도 나겠다.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조금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