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무개 Feb 09. 2023

변명 같아 보이지만 外

변명 같아 보이지만


 사람마다 때와 시기가 있다고 본다. 그 타이밍을 잘만 맞춘다면 별다른 굴곡 없이 최상단을 찍을 수 있다 생각한다. 물론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트렌드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손해를 보겠지만. 르네상스 시대에서 신을 욕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는 한, 대부분은 전성기가 올 테고 시야가 조금만 더 넓다면 그 전성기가 오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지금 시기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기다. 서울대학교를 재학하던 친구 왈 — 당시에는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삼던 친구였지만, 나에게 가장 부족한 건 ‘선택과 집중’이었다. 욕심나는 것들을 모두 손에 쥐려고 하니 흘러넘치고 개중에 멀쩡한 건 하나 없었다. 그러니 선택하고 집중하라는 게 친구의 조언이었다. 그때는 그러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 말뜻을 얼추 이해한 것 같아 나에게 진정 필요한 것과 집중해야 할 것을 분류했는데 이는 마치 ‘N포 세대’의 거울처럼 느껴졌다.


 이십 대 초반의 나는 — 그래봤자 지금 만 나이 24세지만 — ‘N포 세대’에 대한 반골기질을 드러내곤 했다. 공부도 하고, 알바도 하고, 업무 경력도 쌓으면서 연애도 해내겠다는 것을 주변인들에게 공표할 정도로 나의 야망은 엄청났다. 그러나 이는 체력이 받쳐주던 이십 대 초반만 가능했고 군 전역 이후로는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이 하나둘씩 드러났다.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니”라는 노래 구절과는 조금 달리, 사랑은 노력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노력하는 시간과 에너지 소비가 지나치게 높다고 느껴졌고 새삼 내가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것을 되새겼다. 여자친구가 가장 편하고 좋아도, 만나는 시간 외에 신경 쓰기 시작하면 그것도 또 다른 에너지 소모로 이어졌다. 비슷하게 다른 일을 하면서 학업도 해내는, 소위 ‘주경야독’의 삶은 공부가 되지 않는 날의 핑곗거리가 될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의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결국은 파츠를 제거하듯이 손에 쥔 것들을 놓치기 시작했다 — 사실 놓쳤다기 보단 모래처럼 흘러내렸다.


 사실 다른 분야들은 내가 아쉬워하고 내가 슬퍼하면 그만이었는데 연애라는 감정과 친목이라는 부분은 그렇지 못한 부분이다. 나를 배려해 준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내가 그 가슴에 못을 박을 거라 생각하니, 그거 나름대로 지독하게 죽고 싶어 진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관계를 재단하자니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무한한 걱정’이라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같은 딜레마에 빠진다. 경제학적으로 접근하자면 어떤 경우를 택해도 결코 득이 되기 어렵다. 그러나 기회비용이라는 측면, 즉 포기해야 하는 부분의 가치로 접근했을 때 후자가 더 낫다고 여겨졌다.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연애할 준비도 되지 않았고, 연애를 이어갈 상태도 아니며, 그럴 만큼 대단하게 다른 부분이 충족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인정하기로 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더 많이 즐겨보자’가 모토였는데 이는 1년이 채 되지 않아 와르르 무너졌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정이 갈수록 내가 그 사람들을 더 챙기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을 유도한 듯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다시 한번 ‘방구석 찐따’를 자처했다. 그게 맞는 것처럼 보여서.


 혹자는 ‘사람을 만남에 있어 지나치게 합리적인 거 아냐’라고 비난한다. 맞다, 나는 합리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속물적인 인간이 되었다. 필요하면 삼키고 아니면 뱉어낼 준비를 마쳤다. 지금의 나는, 그 어떤 순간보다 더 나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필요한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효율적인 듯 비이성적인 행동을 한다.


22. 4. 28.

지금을 변명하자면


 위 글은 작년 초, 헤어진 당일에 쓴 글이었다. 기억을 더듬자면 술에 취한 채 썼고, 내 솔직한 감정은 술을 먹었을 때 더 많이 쏟아지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당시의 헤어짐에 대해 — 나의 선택이었고, 내가 준 상처에 대한 설명이었다 — 길게도 변명했는데, 틀린 말은 아니면서도 지금 보면 모순된 점이 많다.


 당시에는 ‘지금은 행복하나 나중에 내가 더 큰 상처를 줄 거 같아’가 헤어짐의 주된 요인이었다. 그때의 그 사람은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것에 도망치지 마라’는 말로 나를 회유했고, 지금 되돌아보면 그게 사실이긴 하다. 나는 겁쟁이었고, ‘좋은 이별’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으니. 그 사람은 내가 왜 이별을 결심했는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고, 어쩌면 바람을 피우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적은 없었으나, 그런 오해를 살 만큼 나 스스로가 모순적이긴 했다.


 지금은 또 다른 사람을 함부로 마음에 담은 죗값을 치르고 있다. 헤어질 때는 사랑해 줄 자격이 없어서였는데, 지금은 사랑해주지 못하는 자격에 괴로워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헤어질 때는 다시는 함부로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지금은 도둑맞은 것처럼 내 마음을 모두 주고, 자책하고 있다. 그 사람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데도 말이지.


 때로 나는 정서적인 장애가 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 좋아하면 끝없이 좋아하는 장애가 있어, 그 마음을 끊어내기까지 정말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를 유혹하거나, 의도적으로 나를 꾄 게 아니다. 오히려 말렸지만, 내가 말을 듣지 않고 덫에 걸렸으니 인과응보나 다름없다. 병신 같은 게.


 이 와중에 그 사람이 생각난다. 그 사람은 항상 내가 쓰지 않은 단어를 썼고, 나는 언제나 감탄했다. 사실 짝사랑 경험이 상당히 많은 편인데, 이렇게까지 잊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내 공과 사에 모두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적인 일’인지라 쉽사리 ‘공’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편인데, 이번엔 예외였다. 그는 내가 잘 쓰지 못하는 단어를 썼고, 나는 영감을 얻었고, 그런 대화를 사랑했다 — 한낱 짝사랑 주제이기에 ‘좋아했다’는 표현이 적절하겠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 사람과 나눈 대화를 모두 사랑했다 — 물론 이 역시 그 사람이 의도하지 않았고, 스스로가 내 목을 조이는 데 동참했다.


 ‘선택과 집중’은 여전히 잘 못하고 있지만, 나는 그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너무 좋은 나머지 지금의 후회를 선택했다. 꽤 친하다고 착각했고, 지금과 같은 고통이 올 줄 모른 채 이상적인 방법이라 생각했다. 사랑의 경우, 보통은 내 생각과 방법이 틀린 편인데, 이번만은 다르길 바랐고, 예외 없이 죽고 싶어졌다. 이 관계를 망친 건 나다. 내 잘못이니 내가 관대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데, 그래도 나는 왜 그 사람이 여전히 보고 싶은 걸까.


23. 2. 9.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의미부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