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 엘비스
엘비스
대왕 야자나무가 늘어뜨려 만든 그늘 속 프라도 거리에서는 미니스커트를 팔았고, 호텔 잉글라테라의 카페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로큰롤과 비틀스 음악이 흘러나왔다. 오래된 고급 호텔들이 줄지어 들어선 프라도 거리에는 반미 반제국주의를 외치는 데모대가 미니스커트를 입은 마네킹 앞을 지나 행진했고 엘비스 음악은 구호에 파묻혔다. 혁명은 2년이나 지났어도 쿠바의 밤 풍경은 바티스타 정권 때와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따금 라디오에서 미국의 침공에 대비하는 군사 훈련이 시행된다는 방송이 나오는 것 정도였다. 노래하고 춤추기를 좋아하는 쿠바인들은 여전히 호텔, 나이트클럽, 카바레, 소셜클럽 같은 곳에서 댄스파티를 즐겼다.
나이트클럽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흉내 내 화려하게 치장한 옷을 입고 춤을 춘 미국인 가수들이 무대에서 내려가면 혁명의 성공을 축하한다는 멘트가 나왔고 사람들은 환호하며 손뼉을 쳤다. 혁명이 일어난 뒤에 미국의 재즈도 오히려 아바나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클럽이든 레스토랑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연주가 아바나의 골목길을 메웠다. 쿠바와 미국 사이에 적대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지만, 쿠바에서 재즈는 부유한 나라 미국을 상징하는 문화였다. 혁명 정부가 처음부터 미국문화를 적대시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사회로 개혁하려 했던 혁명이었고, 쿠바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을 반대한 것이지 미국과 대결하는 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미국인과 미국문화를 배타할 이유가 아직은 없었다. 1960년대 초반 쿠바에서 많은 재즈 뮤지션이 두각을 나타냈다. 혁명이 일어났지만, 아직 쿠바 사회는 경직되지 않았다.
늘 유쾌하기만 했던 쿠바의 밤 문화를 바꾼 것은 혁명보다는 미국 때문이었다. 미국이 피그만에 침략했고 다음 해 10월 미국과 소련은 쿠바를 미사일 위기 사건까지 치달았다. 쿠바인들은 미국과 소련의 핵전쟁 한복판에서 핵 종말을 맞을 뻔한 운명을 겨우 지나왔다. CIA는 끊임없이 혁명 정부 요인을 암살하려 했고 쿠바 출신 망명자들을 쿠바에 잠입시켜 파업과 파괴를 선동했고 반카스트로 인사를 포섭해 반체제 운동을 후원했다. 군사 훈련을 받은 필리부스테로들이 담배와 설탕 플랜테이션을 방화하고, 설탕공장, 광산, 정유시설, 목재 야적장, 저수시설, 대형창고, 화학공장 같은 기간 시설들을 수시로 폭파했다. 방송국이나 전화 전기 같은 통신 시설과 철도와 교령 같은 것도 부서졌고 열차도 숱하게 탈선했다. 미국 정부는 유럽 은행의 팔을 비틀어 쿠바가 유럽 국가와 교역하는 것을 방해했고, 설탕 수출도 좌절시켰다. 쿠바 정부는 CIA가 개입한 폭력선동과 파괴 공작으로 적어도 35,000여 명의 쿠바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미국이 그럴수록 쿠바인들은 피델을 중심으로 더욱 단결했고, 쿠바는 크렘린을 향해 서둘러 달려갔다. 미국은 재즈와 엘비스, 비틀스의 음악을 즐기던 쿠바의 지식인과 대학생들을 정치에 몰입하게 하고 군과 민간수비대에 자원입대해 미국과 싸우는 투사로 헌신하게 했다. 아바나의 사교 클럽이 텅 비기 시작했다. 스페인이 쿠바를 침략한 뒤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혁명 정부는 미국이 문화적으로 쿠바의 전통문화를 침탈하는 것은 무기를 동원해 침공하고 위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인식했다. 특히 1950년대에 미국의 향락 문화가 쿠바를 미국의 화장실로 만들고 쿠바의 전통문화를 훼손하고 불구로 만들었다고 보았다. 미국을 포함한 어떤 나라로부터 통제받거나 지배받지 않는 자유로운 쿠바를 만드는 것이 혁명의 근본 목표였으므로 혁명 정부는 쿠바 고유의 민족음악과 문화는 제국주의 침탈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무기라고 선언했다. ‘돈벌이가 되는가’만을 제작의 기준으로 삼는 미국 음악과 문학, 예술은 자본주의 문화를 상징했고 사회주의를 선언한 혁명 쿠바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의 음악을 미국적 향락을 상징하는 코드로 간주하고 금지했다. 혁명은 음악 말고도 많은 것을 바꾸었다. 체 게바라가 산에서 구상했던 대로 쿠바 국민은 모든 병원에서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고 무상으로 교육받게 되었다. 전국 구석구석 학교가 들어섰고 쿠바 역사에서 처음으로 가난한 이들도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혁명은 가난한 민중들도 특별한 재능을 발굴할 기회를 선물해 주었고 그 결과 흑인 사회에서도 상급학교 진학자들이 많아져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정부는 인종 차별을 해소하고 일자리에서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집중했다. 양성평등이 강화되면서 여성들의 전문직 진출 기회가 크게 늘었다. 범죄 발생 건수는 혁명 10년 만에 0건에 가까웠다.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의 첫 번째 사회적 목표로 무상의료와 함께 국가의 문맹률을 대폭 줄이는 데 힘썼다. 그 결과 23.6%였던 문맹률이 혁명 1년 만에 3.9%까지 낮아졌다. 문맹 퇴치 운동을 벌인 혁명 정부는 책을 보급해 대중에게 혁명을 가르쳤다. 카스트로, 레닌, 마르크스 같은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연설을 모은 정치 서적과 톨스토이, 볼테르, 세르반테스 등 문학과 사상 관련한 책을 출간해 전국에 보급했고 책의 70%는 무상으로 제공했다. 클럽을 떠난 도시지식인들은 문맹퇴치운동을 위해 산간벽지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