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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Feb 25. 2024

15. 그란마

#347 마르크스

새 예술

  마르크스 이전까지 예술과 아름다움은 순수하고 초월적인, 형이상학적인 정신성과 관련된 것이었고 소수 전문가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에서 예술은 경제적 현실이라는 하부 구조 위에 있는 표현이므로 플라톤적인 아름다움이란 없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예술은 이데아보다는 경제적 현실에 따라 예술이 변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혁명가들에게 예술은 묘사의 진실성과 함께 노동자를 사회주의 정신에 맞게 사상적으로 개조하고 교육하는 과제와 결부되어야 했다. 사회주의 혁명에서 예술가는 재능을 통해 혁명이 발전할 수 있게 묘사하고 표현해야 했다. 예술가가 대중에게 주는 즐거움은 그런 역사적 구체성을 갖고 있어야 했다. 혁명이 예술에 거는 기대는 컸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투쟁에서 예술은 정치성이라는 유용한 목적을 지닌 무기였다. 1960년대 쿠바는 이런 마르크스주의 예술관에 기초한 문화 운동인 아마추어 운동Movimiento de Aficionados을 전개했다. 거의 모든 예술 종사자가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가까운 마을로 뛰어 들어가 소규모 예술공연을 하는 프로젝트, 연극단원과 댄스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는 프로젝트, 합창단이나 아마추어 음악단을 만들어 활동했다. 체 게바라는 인간은 돈보다는 도덕적 동기와 의식에 의해 행동해야 하고, 도덕적 의식은 사회도 예술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 자본주의의 돈은 예술을 병들게 해 전문예술가와 노동자 대중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었고, 그래서 인간의 새로운 의식을 일깨우는 일은 혁명의 중요한 과정이었다. 정부는 10대 청소년과 20대 청년 아마추어 예술가 3천여 명을 아바나 리브레 호텔에 모아 ‘새로운 예술Nuevo Arte'을 가르칠 지도자로 양성했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유색인 아마추어 예술가들이 혁명 사령부가 있는 호텔에서 피델이 좋아한 랍스터 요리를 먹으며 연수를 받은 뒤 착취당하고 고통에 시름겨워했던 쿠바 민중들에게 예술적 표현을 자극할 사명을 가슴에 품고 쿠바섬 구석구석으로 떠났다. 정부는 전국 주요 도시에서 이들 아마추어 예술가를 위해 지역 음악 이벤트를 추진했고 그들 중에 혁명 대표단원을 선발해 앙골라, 에티오피아 같은 아프리카와 니카라과, 볼리비아 등 라틴아메리카 국가 그리고 북한 같은 사회주의 우방국가에 파견 공연을 보냈다. 이 무렵 쿠바는 세계 사회주의 혁명 전파를 위해 제3세계 여러 나라에 지원군을 파병했다. 쿠바 혁명예술단은 대개 집단 예술 형식을 추구했고, 수많은 대중들을 참여시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예술에는 스타가 없었다. 그 점이 자본주의 예술과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아마추어 음악인들은 지역에서 공장, 병원, 레크레이션 센터 같은 곳에서 수시로 공연했다. 노동 현장에서는 점심시간이나 퇴근 시간에 공연하여 노동자들을 즐겁게 해주기도 했고 대개 혁명 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이었다. 아마추어 음악인 가운데 실비오 로드리게스, 파블로 밀라네스, 노엘 니콜라, 오마라 포르투온도 등이 그룹 <몬카다Moncada>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뒷날 ’새 노래 누에바 트로바Nueva Trova‘운동의 기초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누구든 몬카다를 가슴에 품고 있다Todo el Mundo Tiene Su Moncada>와 같은 곡이 이들이 아마추어 운동을 하며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불렀던 노래다. 이 운동 초기에는 여러 측면에서 좋은 효과를 많이 만들어 냈다. 바티스타 정권 때는 철저히 무시되고 억압되었던 아프로쿠바인들의 문화적 유산인 산테리아, 룸바 음악이 다시 살아났다. 아마추어 운동은 쿠바 고유의 음악적 유산을 중요하게 여기고 재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바나 리브레 호텔

  아마추어 운동이 활기차게 추진되고 있을 때는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냉전 대결이 뜨거웠을 때였다. 피그미 침공 사건이 있고 쿠바 미사일 위기 뒤로 미국은 피델을 암살하려는 작전을 쉼 없이 시도했고 발각되었다. 혁명 정부는 미국재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필린fillin에는 타락의 요소가 들어있고 심지어는 반혁명적인 정서가 들어있다고까지 평가했고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엘비스 프레슬리로 대표되는 록과 재즈 같은 당시 미국과 영국에서 유행하던 음악을 방송 금지했다. 이제 쿠바에서는 재즈와 록을 연주하는 것도, 춤을 추는 것도,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도 간섭받았다. 배급사회로 바뀐 쿠바에서 정부는 이런 음악을 하는 밴드에는 악기도, 공연 기회도 월급마저도 제공하지 않았다. 1967년에는 1개 팀만이 방송에 출연해 재즈 스타일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도 록을 막을 수는 없었다. 록 음악가들은 집에서 손으로 직접 악기를 만들어서 미국식 악기를 연주했다. 특히 지배층 정치인들의 어린 자녀들이 록에 빠져있었는데, 지배층들이 낮에 TV와 라디오에 나와서는 록을 금지하는 이유에 대해 강조하고, 밤에는 많은 돈을 주고 자녀들의 생일 파티에 쓸 록 음악 전용 스피커 같은 장비를 샀다. 해외 출장에서 돌아올 때 롤링 스톤스, 비틀스, 비지스의 최신 록 음반이 짐 가방에 들어있었고, 아이들은 LP를 카세트에 복사해 친구들에게 뿌렸다. 록과 재즈는 그 시대 쿠바에서는 언더그라운드 음악이었다. 노엘 니콜라Noel Nicola는 60년대 중반에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의 노래들을 부며 록 그룹을 흉내 내며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누에바 트로바 곡을 쓰기 시작했다. 아들은 영국과 미국의 록 음악을 여기저기서 따다가 섞어서 그들의 음악을 만들었으므로 1960년대 누에바 트로바 음악에서는 미국과 영국 록의 흔적이 많았다. 누에바 트로바를 대표하는 실비오 로드리게스의 초창기 곡 <모자 쓴 여자 그림óleo de mujer con sombrero>(1968)는 밥 딜런의 <Boots of Spanish Leather>(1963)의 기타 연주 스타일과 아주 흡사했다. 봉쇄된 쿠바에서 외국 음악 트렌드를 알 수 없었던 쿠바 사람들에게 이 젊은 뮤지션들이 전기로 소리를 만드는 일렉트릭 음악은 새로운 사운드였고, 세계 트렌드에 부합하는 코즈모폴리턴 음악이었다. 이들의 음악은 새로운 스타일의 음유 시였으므로 ‘누에바 트로바’였다. 그래서 누에바 트로바를 혹평하는 사람들은 팝과 같은 미국 영국 음악을 판박이 하듯 비슷하게 베끼고 짜깁기해 자국의 대중들에게 맞도록 살짝 변형해서 소개해 주는 음악 브로커일 뿐이었다고 깎아내리기도 했다.      

아바나 리브레 호텔은 쿠바 혁명군의 사령부로 쓰였으므로 혁명의 성지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젊은 청년 혁명가들이 양성되었다.

  누에바 트로바는 사회적 메시지를 중시하는 노래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가사는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축이었다. 이들은 호세 마르티, 파블로 네루다 같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존경받은 스페인어권 시인들의 시를 모방하거나 강하게 영향을 받아 가사를 지었으므로 정치성이 분명했고,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처럼 굴종하지 않는 쿠바의 저항과 투쟁 정신을 다루는 등 지나온 10여 년간 혁명의 과정을 찬양했다. 이전의 쿠바 음악과는 단절된 새로운 장르의 음악과 언어로 지금 쿠바가 경험하고 있는 혁명을 해석하고 표현함으로써 이전의 음악과 시에 도전했다. 누에바 트로바가 쿠바의 저항 노래로 유명하지만, 이것이 쿠바 음악사에서 최초의 현상은 아니었다. 약 100년쯤 전 스페인에 독립 혁명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당시 시대 상황과 정치적 현실을 맹렬히 비판하는 노래 운동이 있었다. 축음기도, LP도,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없던 그때는 극장에서 공연하는 방법으로 스페인에 저항했다. 쿠바의 저항 노래 운동의 전통은 20세기 초에 독립 전쟁을 지휘했던 영웅 안토니오 마세오나 막시모 고메스의 업적을 찬양한 신도 가레이 같은 트로바도르 음악인들로 이어졌다. 이들은 거의 손에 닿은 독립에 끼어들어 쿠바를 식민지로 삼켜버린 미국을 노래로 규탄했고, 미국인들이 스페인 지주 대신 플랜테이션 토지를 차지하고 새로운 지배자로 군림하는 현실에 분노하는 노래를 불러 쿠바 민중들의 마을을 달랬다. 바티스타 폭정의 세월에도 트로바도르들은 노래로 독재정권에 저항했다. 이상과 저항은 쿠바 음유시인들의 오랜 전통이었고 사명이자 의식이었다. 기타 같은 현악기를 연주하며 스페인 문학의 원형인 10 행시 데시마décima의 형식으로 불렀던 중세의 시적인 노래를 트로바가 1960년대 혁명 쿠바 시대에도 등장했다. 쿠바의 누에바 트로바와 그 모태인 라틴아메리카 누에바 칸시온은 미 제국주의와 군부독재로 신음하는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정치적 의식들을 반영한 전형적인 참여 음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노래들의 가사는 마초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성을 대상화해서 표현하지도 않았다. 그런 내용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또 판에 박은 로맨틱한 이미지에서도 벗어나려고 했다. 물론 그렇더라도 두 음악에서 사랑은 영원한 주제였다. 다만 그 사랑이 ‘그녀’에 대한 사랑만은 아니었다. 사회에 참여하고자 한 음유시인들은 조국과 민중, 평등, 자유, 투쟁, 혁명 같은 것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누에바 칸시온과 누에바 트로바 노래 운동에는 분명하고도 큰 차이가 있다. 누에바 칸시온은 백인들에게 착취당하던 비참한 현실의 라틴아메리카 인디오와 인디오 민속 음악에 대한 가치를 다시 보자는 운동이었던 반면 누에바 트로바는 쿠바에서 퇴폐적이고 문란했던 바티스타 시대를 상징한 손son, 맘보, 탱고, 차차차 같은 전통적인 흑인 음악적 요소들을 배타하고, 볼레로와 필린의 낭만성을 바탕에 두되 국제적인 장르들을 한데 섞어 만들어 낸 리듬에 혁명의 정신을 고취하는 가사를 실어 노래하는 음악이라는 점에서 두 운동은 차이가 있었다. 인디오 민속 음악에 기반을 둔 누에바 칸시온에 비해 미국과 유럽의 음악을 적극 받아들여 혼합한 쿠바의 누에바 트로바는 좌파 혁명의 흐름을 타고 라틴아메리카와 스페인으로 퍼져 새로운 노래 운동의 중심 장르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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