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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Feb 25. 2024

15. 그란마

#348 파란 유니콘

검열

  미국이 쿠바를 봉쇄한 힘은 가혹했다. 쿠바는 브레즈네프가 통치한 소련의 원조에 의존해야 했고 미국의 봉쇄가 강해질수록 쿠바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커졌다. 설탕값보다 훨씬 많은 원유와 생필품을 원조받았지만, 소련도 식료품, 연료 등 기초생필품마저 부족해 어려운 처지로 빠져들고 있었으므로 원조는 쿠바를 유지하는데 충분하지 못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프라하의 봄’이라는 민주화 운동을 브레즈네프는 탱크로 민주화 개혁을 진압했다. 소련의 침공을 제국주의로 비판할지 말지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이념적 반발이 일었고 반제국주의 투쟁의 기치로 제3세계를 주도해 온 쿠바 공산당에서도 의견이 대립했다. 피델은 소련의 체코 침공과 프라하의 봄을 무력 진압한 일을 지지한다고 했다. 소련을 비판하고, 소련을 지지한 피델을 비판한 43명의 공산당 위원이 즉석에서 체포되었고 26명은 투옥되었다. 중국은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혁명이 1968년 정점에 이르고 있었다. 급진적인 홍위병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마오쩌둥의 정적과 예술인과 지식인을 반혁명적이라며 폭력을 행사하고 파괴하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 혁명 정부는 설탕 생산증대를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969년 쿠바의 GNP는 혁명 이후 가장 저조했다.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1970년에 전 국민 총동원령을 내려 설탕 1천만 톤 생산 운동까지 벌였지만 결국 실패했고, 사탕수수 생산에 국민을 총동원된 탓에 다른 분야까지 생산이 마비되어 국가 경제는 최악의 상태로 몰렸다. 경제에서 위기를 맞은 혁명 정부는 더욱 경직되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소규모 사업체까지도 모두 국유화했다. 그럴수록 쿠바의 경제는 위축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쿠바에서도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이데올로기 폭력에 시달렸다. 불법 감금은 물론이고 감옥에 투옥되거나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그들의 작품에 대해서는 인민 재판하듯 여론사냥이 있었다. 심지어는 ‘자발적’으로 강제 노동 수용소에 끌려가기도 했다. 이제 쿠바 민중에게 피델 정부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자유로운 의견교환이 제약되는 사건들이 표면화되었다.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상황, 국제적인 환경들이 결합하여 쿠바에서 표현의 자유와 쿠바 리브레는 빛을 잃었다.   

   

  애니메이션 시리즈 캐릭터 도널드 덕Dornald Duck이 미국에서 라틴아메리카 문화를 선보였다. 라틴아메리카 문화를 소개한다고 했지만, 애니메이션은 가난하고 미개한 라틴아메리카 인디오들이 미국과 미국인을 선망한다는 내용이었다. 도널드 덕은 미국인의 자부심을 느끼게 해 준 캐릭터였다. 미 해군 병사의 군복 셔츠와 모자를 쓴 도널드 덕 애니메이션을 즐겨 본 미국인들에게 라틴아메리카는 미국인들이 쾌락과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이국적인 여행지이자 절대 환영받는 곳이었다. 디즈니는 라틴아메리카는 혁명 이전의 쿠바처럼 미국인이 여행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역할을 잘 해냈다. 미국 국무부 자금으로 제작한 이 애니메이션은 스페인어로도 더빙해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방송국에 무료로 제공되었다. 콘텐츠가 부족한 방송국들은 재방송을 거듭했다.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이제 미국 사람은 우수하고 라틴아메리카인들은 열등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미국인들이 마시는 코카콜라를 마시고 싶어 했고, 카멜과 말보로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미국인들이 열광한 메이저리그 야구를 라틴아메리카 사람들도 응원했다. 미국인과 미국문화를 선망한 그들은 미국 시민권자가 되고 싶었다. 열등한 라틴아메리카에서 가난한 인디오, 메스티소, 크리오요로 세상에 나온 자기를 원망했다. 록펠러의 기획은 뛰어났고, 적중했다. 1970년대에 미국은 문화와 미디어 콘텐츠를 통해 갈등을 조장하는 저강도 정책에 집중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에게 미국을 선망하고, 자신들을 열등하게 느끼게 했다.

 CIA와 쿠바 망명자들의 군사 침공은 줄었지만, 쿠바는 미국과 자본주의에 대해 환상과 편견을 심는 미국문화와 싸워야 했다. 새로운 공격 방법인 저강도 문화 침략은 쿠바 국민의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 의지를 약화하고 단결을 허물었다. 피델은 문화적 식민주의에 대항해 승리하지 못한다면 또다시 정치적 식민주의와 경제적 식민주의에 패배당할 것이라 했다. 이전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쿠바를 병들게 하는 문화적 식민주의와의 싸움은 아주 긴 투쟁이 될 것이고 쿠바는 이미 그 싸움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혁명 이전에 완전히 고사할 뻔한 위기에 놓인 쿠바 민족음악을 구해내는 것이 시급했다. 쿠바의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에서 자국 음악을 70% 이상으로 편성하도록 한 조치가 대표적이었다.      

  쿠바 정부가 특히 주목한 미국문화는 쿠바와 세계 젊은이들 문화의 한 중심에 있는 록 음악이었다. 록은 여러 측면에서 사회 전복적인 성향이 있었다. 미국과 자본주의 국가들의 퇴폐성이 투영되어 있고, 상식을 벗어난 괴이한 옷차림에 기성의 행동양식을 따르지 않고 거부하는 행동도 문제로 보였지만 무엇보다 영어로 된 가사가 쿠바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1970년대에 록은 사운드나 리듬을 넘어서서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이자 가치관으로 형체가 만들어지던 중이었다. 길게 장발하고, 히피풍의 찢어진 옷차림새를 하고서 무대가 아닌 길거리와 마을 놀이터에서 공연했고 음악을 만드는 일 말고 다른 사회 행동에도 참여하여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그 시절 미국이나 영국의 로커들과 많은 분야의 예술가들이 사회 여러 이슈에 대해 암시적으로 의견을 내고 도전하는 것이 예술적인 기준이 되었듯이 누에바 트로바 뮤지션들은 그렇게 행동했다. 이들은 혁명 정부가 지시하거나 제시하는 가이드라인의 가사를 거부하고자 저항했다. 혁명 정부의 혁명이 아닌, 자신들이 생각하는 혁명의 이상을 위해 혁명 정부에 도전하는 가사로 누에바 트로바를 불렀다. 그것은 끝내 쿠바 혁명이 가고자 하는 목표에 수렴되지 않을 것이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예술로 돈을 버는 일은 도덕적이지도 못할뿐더러 반사회주의적인 소행이며, 예술이 이데올로기와의 관계에서 독자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배격했다. 예술은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도구가 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혁명에 동의하는 진정한 예술가들이라면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부패하고 오염된 음악인 록의 어떤 스타일도, 록 음악의 어떤 요소도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혁명 정부에서 표현에 대한 검열이 시작되었다. 대중보다 검열관들이 먼저 음악을 들었다. 공안 요원들은 음악이 주는 감성보다는 혁명 윤리에 맞는지 틀리는지를 따졌다. 연필을 들고 많은 가사 분량을 지우고 즉석에서 새로 적어 넣었다. 이 대목, 저 대목은 공산당이 생각하기에 해석에 다른 여지가 있을 수 있으므로 가사를 이렇게 바꾸라고 명령했다. 정부를 비판하는 음악인을 감금 억류하고, 공연 기회를 박탈했다. 심지어 반혁명 분자로 몰기도 했다. 음악인들은 이제는 진짜 자기들이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고충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말썽이 될 만한 표현을 아예 회피하고 있었다. 음악만이 아니었다. 공안 요원이 먼저 기사를 첨삭하지 않고서는 신문사의 윤전기도 돌지 못했다. 언론이 정부를 비판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정부가 소유하지 않은 저널리즘도 있을 수 없었다. 정부에 비판적인 예술가와 작가들은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고 검열하고 있는지 묻는 물음에 정부 관리는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럴 필요가 있어서 검열하며 미국과 해외 망명자들이 쿠바 정부에 적대적인 선전 선동을 계속하고 있으므로 체제를 방어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 제약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여전히 쿠바는 미국과 전쟁 상태에 있고, 혁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강력한 조치라도 단행할 수 있다고 했다. 사회의 저변에 마르크스주의의 원칙들을 깊게 반영하는 프로그램들이 속속 추진되었다. 바티스타 정부가 했던 것보다 혁명 정부의 역할과 개입은 더 폭넓어졌고, 정도도 강해졌다. 그런 변화는 경제 영역에서 확실히 드러났다. ‘혁명 보위’라는 구호 아래서 정부는 모든 사적 경제 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시골길에서 망고 사라고 외치는 농부의 망고를 빼앗고 수레도 몰수했다. 집에서 손톱에 매니큐어를 발라주고 돈을 버는 여성도 당에 고발되었다. 남성의 장발이나 동성애 자유를 사회주의라는 이유로 억압할 수는 없다는 주장들은 반혁명적이고 타락한 것이었다. 카바레의 벗은 여자들의 엉덩이와 허벅지 속살은 민중들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악의 산물일 뿐이었고 나이트클럽은 민중들이 더 중요한 이슈들에 생각을 모을 수 없게끔 만드는 자본주의 착취의 한 형태인 아편에 비유되었다. 국민을 위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피델 정부에게 완전한 지적 자유는 사회주의적 목표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혁명에 저항하는 노래라도 있을 수 없었다. 저항가요를 부른 음악인은 잠재적 반혁명 혐의자가 되어 고초를 겪어야 했다. 파블로 밀라네스는 감옥에 투옥되었고, 출소했지만 당국은 그를 동성애자라는 죄목으로 기소해 또 1년 이상을 감옥에 넣었다. 불순분자는 사회로부터 격리한다는 명분이었다. 감옥에서는 혁명에 온전히 복종하는 것이 좋을 것임을 주입했다. 혁명의 이상을 지키는 일은 이제 쿠바 공산당의 독트린을 절대적으로 따라야만 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정책결정자들은 드러내놓고 정치적인 가사의 곡이나 사회적 의식을 담은 음악을 지원했다. 이제껏 쿠바에서는 연주되지 않았던 군대 행진곡풍의 음악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7.26 운동>이나 그란마 호의 출정, 농업개혁에 부응하자는 사회주의 단결을 주제로 하는 합창곡도 나왔다. 이런 노래들이 쿠바 사회를 뒤덮었으니 60년대에 손son과 맘보, 탱고, 재즈 같은 댄스 뮤직은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빈 모래사장처럼 한순간에 사라졌다. 사회주의라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집단 토론과 의견의 다양성을 위한 공간도 사라졌고, 독트린이 제시하는 한 방향에만 집중해야 했다. 피델의 정부는 더는 혁명 정부가 아니었다. 소비에트 연방 국가의 전형적인 독재 정부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혁명 정부는 경직되었고, 중앙통제가 국민을 불편하게 했다. 쿠바 국민은 바티스타 이후에 다시 쿠바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봉쇄로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스튜디오의 녹음 장비나 앰프 같은 것들을 수리할 부품도 구하기가 힘들었고 제때 고쳐지지도 않았다. 수백 명의 음악인이 악기 대신 농작물 수확 증대 운동에 동원되었다. 쿠바를 대표한 주요 예술가들이 쿠바를 떠났다.      

7.26 운동은 쿠바 음악의 다양성을 소멸시켰다.

  살아남고자 하는 정권에게 검열은 중요한 수단이다. 하지만 그것은 양날의 칼이기도 했다. 검열은 국민을 국가와 정부에서 멀어지게 하고 반정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사회주의 신봉자임을 자처한 실비오는 검열에 관한 조국의 현실을 이렇게 비판했다. “쿠바에서 소통과 정보 부족이 늘 나를 괴롭힌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왜 내가 모르고 있어야 하는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 그것이 내 생각과 음악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견으로 나를 더 발전시킬 수 있고, 내가 쿠바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시스템이 분명하게 가진 문제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왜 자본주의 시스템이 사회주의보다 더 많은 자유를 갖는 체제라고 말하게 만드는가? 그 지적은 정확하다. 뭐라고 이유를 대든 지 사회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는 함의를 틀림없이 포함하고 있다. 나는 철저한 사회주의자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주의 체제가 다른 체제보다 더 자유롭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어야 훨씬 행복한 사회라고 말할 것이다. 쿠바가 만들려는 사회주의는 바로 그런 사회주의였다.” 실비오 로드리게스와 파블로 밀라네스 같은 아마추어 운동 출신의 젊은 음악가들이 피델에 항의하고 비판했다. 어떤 이유로든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혁명의 정신을 어기는 것이라고 질타했고, 쿠바가 피델의 독재에 저항하고 순수한 혁명의 정신으로 되돌아갈 것을 노래로 촉구했다. 실비오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이상은 ‘유니콘’이었고 그가 사랑한 쿠바는 푸른색 국기였으므로 그의 유니콘은 <내 파란 유니콘 Mi Unicornio Azul>이었다. 느릿하고 시적인 발라드곡으로 쿠바 혁명을 상징하는 유니콘의 이미지를 통해서 판타지, 노스텔지아와 함께 순수함을 잃어버린 혁명 지도부를 질타하면서 혁명의 초기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하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혁명의 이상을 향해 자신을 바치겠다는 태도를 선언한 노래다. 이 곡은 대중에게 혁명 이데올로기를 전파해 ‘새로운 인간nuevo hombre’을 만든다는 누에바 트로바 운동의 음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곡으로 평가받는다.      

<내 파란 유니콘 Mi Unicornio Azul>

Mi unicornio azul ayer se me perdió 내 파란 유니콘을 어제 잃어버렸어요.

Pastando lo deje y desapareció       풀을 뜯고 있었는데 사라져 버렸네요.

Cualquier información bien la voy a pagar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면 모든 걸 드릴게요.

Las flores que dejó   꽃들은 알면서도 

No me han querido hablar 내게 말해주지 않네요

Mi unicornio azul 내 파란 유니콘을

Ayer se me perdió 어제 나는 잃어버렸어요

No sé si se me fue 유니콘이 나를 떠난 건지

No sé si se extravió 아니면 길을 잃어버렸는지 모르겠어요     

Y yo no tengo más 내게 파란 유니콘보다 

Que un unicornio azul 더 좋은 건 없어요

Si alguien sabe de él 파란 유니콘이 어디 있는지 안다면

Le ruego información 부디 알려주세요.

Cien mil o un millón 십만이든 백만이든

Yo pagaré 내 모든 걸 드릴게요.     

Mi unicornio azul내 파란 유니콘을

Se me ha perdido ayer 어제 유니콘을 잃어버렸어요.

Se fue 가버렸어요     

Mi unicornio y yo 내 유니콘과 나는

Hicimos amistad 우정을 나누었지요.

Un poco con amor 우리는 사랑했고

Un poco con verdad 진실했어요

Con su cuerno de añil 유니콘의 푸른 뿔로

Pescaba una canción 혁명의 노래를 짓고는 했지요.

Saberla compartir 그 노래를 나누는 것은 

Era su vocación 유니콘의 사명이었죠     

Mi unicornio azul 내 파란 유니콘을 

Ayer se me perdió어제 잃어버렸어요

Y puede parecer 어쩌면 

Acaso una obsesión집착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Pero no tengo más하지만 나는 

Que un unicornio azul파란 유니콘보다 더 좋은 건 없어요

Y aunque tuviera dos 설령 다른 유니콘이 있다 해도

Yo solo quiero aquel 나는 오직 파란 유니콘이어야 해요

Cualquier información 그러니 내 파란 유니콘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시면

La pagaré 내 모든 걸 드릴게요     

Mi unicornio azul 내 파란 유니콘이여

Se me ha perdido ayer 나는 어제 잃어버렸어요

Se fue 유니콘이 떠나버렸어요     

쿠바의 누에바 트로바 운동을 이끈 실비오 로드리게스

  뛰어난 젊은 예술가들이 피델의 표현의 자유 억압을 비판한 저항가요가 전국적인 지지를 얻었다. 국민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피델이 누에바 트로바 운동의 리더인 실비오 로드게스와 파블로 밀라네스를 직접 만나 토론하고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지 말라는 요구를 받아들였고 예술적 표현의 자유 신장을 약속해 1970년대에는 예술적 표현의 자유가 크게 확대되었다. 누에바 트로바는 그렇게 쿠바 공산당 정부에 투쟁하고 탄압을 견디며 성장했다. 1970년대 중반 피델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인정했다. “우리 같은 정치가들이 누에바 트로바 운동을 구상했다고요? 우리가 기획한 것이라고? 절대 그렇지 않아요. 다른 노래들이 그렇듯이 이 노래들은 스스로 성장했습니다. 이 노래들이 이렇게까지 성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누에바 트로바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사회주의 음악 제작의 주류방식으로 바뀌었고 쿠바 정부는 누에바 트로바가 혁명의 고단한 여정을 대변하는 훌륭한 성과라고 선전했다. 쿠바 정부가 갑작스럽게 누에바 트로바를 수용한 것은 쿠바 인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누에바 트로바를 외교에 활용하려는 의도도 고려한 조치였다. 피델 정부는 쿠바보다 6~7년 정도 앞서 빅토르 하라가 주도해 라틴아메리카의 저항 음악 운동을 이끌고 있는 칠레 아옌데 정부를 비롯해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좌파 정부 나라들과 긴밀한 정치적 연대를 꾀하고 있었다. 실비오의 음악은 스페인어권 세계에서 좌파 문화를 대표하는 요소가 되었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젊은 음악 대중들을 겨냥한 중요한 음악 형식이 되었다.  1970~8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독재정권은 이 곡의 방송과 공연을 금지했다.      

실내 벽에 그려진 푸른 유니콘. 쿠바인들은 푸른 유니콘이 쿠바 혁명의 이상을 상징한다고 여긴다.


  쿠바의 누에바 트로나와 라틴아메리카의 누에바 칸시온 같은 저항 음악 운동은 1973년부터 80년대 중반까지 계속 활발하게 이어졌다. 군부독재를 극복하고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선 국가들이 연합해 이런 노래들을 부르는 페스티벌이 여러 나라를 번갈아 가며 해마다 꾸준히 치러졌다. 실비오와 파블로가 해외 공연을 마치고 귀국하면 피델 카스트로가 직접 환영 행사를 해주기도 했을 정도였다. 파란 유니콘은 8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 동안 다시 쿠바에 돌아온 듯했다. 이전에 비해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기는 했지만 그들이 완전히 자유롭게 노래를 한 것은 아니었다. 정부에 저항할 때는 제약 없이 음악을 만들었지만, 이제는 자신들을 지원해 주고 있는 정부의 상황에 대해서도 충실해야 했다. 이들의 노래가 비판과 저항보다는 민족주의나 국제 정치 같은 주제들로 소재들이 바뀌었다. 예를 들어 1980년 쿠바에서 미국으로 탈출한 선상 난민 사건이 생기고 나서 파블로 밀라네스는 쿠바를 떠나지 말고 혁명을 지키자는 메시지가 담긴 <나는 이 섬을 사랑해 Amo esta isla>를 불렀다. 이런 예술은 대중들의 취향에 맞지 않게 되었고 1980년대 후반부터 누에바 트로바 음악은 시들해지기 시작했고 90년대에 소멸했다. 1992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고 러시아 연방이 등장했다. 소련의 붕괴는 소련의 원조에 의존해 온 쿠바에 크나큰 타격이었고 이때부터 10년 동안 ‘특별 시기período especial’를 겪었고 위기를 맞은 국가는 다시 표현의 자유를 제약했다. 

쿠바는 '특별 시기'에 극심한 식량과 에너지 부족을 겪었다. 이 시기는 북한의 '고난의 행군'기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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