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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문환 Apr 03. 2017

신세 질 곳이 있다면 주저 마라

보통 사람의 아프리카 여행법 -  Addis Ababa, Ethiopia

 런던과 나이로비를 거쳐 아디스아바바로 가는 길. 세계 일주 항공권에 포함되지 않은 아디스아바바행 비행기표를 굳이 따로 구입한 이유는 학교 선배 한 명이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굿네이버스'라는 NGO에서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여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아니었지만 나는 단지 지인이 있다는 이유 하나로 그곳을 내 첫 번째 목적지로 정했다. 기간 내내 공짜로 머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거니와(사실 이것 때문에 에티오피아 일정을 3주씩이나 잡았다) 낯선 대륙으로의 여행에 동행을 만들어 조금이라도 긴장감을 덜자는 속셈도 있었다.


 케냐 나이로비 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밤 9시. 아디스아바바행 비행기가 내일 아침 6시경이니 공항에서 밤을 꼴딱 새워야 할 판이다. 나이로비 공항은 출국장과 입국장이 따로 있어 짐을 찾고 일단 건물 밖으로 나와야 했다. 초면인데 친구를 먹자는 택시기사들을 사뿐히 지나쳐 입국장 밖을 빠져나왔다. 

 거긴 덥지 않아?라는 물음에는 '아프리카'라는 대륙을 하나의 나라 혹은 도시쯤으로 간주하는 말도 안 되는 전제가 바탕이 되어있다. 아니고서야 어떻게 지구 상에서 아시아 다음으로 큰 대륙의 날씨를 퉁쳐서 '덥지 않냐'라고 물을 수 있을까. 입국장을 빠져나와 출국 터미널까지 걷는 그 몇 발짝 동안 그렇게 묻던 사람들의 순진무구한 얼굴이 떠올랐다. 6월 말의 나이로비 새벽은 전혀 덥지 않았거든. 


 내가 가본 대부분의 아프리카 공항들은 입구에서부터 짐 검사를 했다. 외국인에게는 조금 관대한 편이지만 내국인들의 경우에는 출국하는 사람이 아니면 공항에 들어갈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나이로비 공항도 마찬가지였다. 낡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녹슨 롤 위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손님(?)이 와도 옆 사람과 하던 농담을 계속 이어가는 보안요원 앞에 서서 양 팔을 벌렸다. 그는 내 겨드랑이와 등을 탐지기로 몇 번 훑고는 이번엔 손으로 내 다리와 호주머니를 빠르게 주무른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노골적인 몸수색에 살짝 당황하기를 수 초, 그는 고개를 까딱한다. 다 됐다는 뜻이다.

 인천공항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조모 케냐타 국제공항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편히 앉아 쉴 곳이 없었다. 딱딱해 보이는 의자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 터미널 내부에 있는 사람이라곤 청소부와 나같이 밤을 새우고 새벽 비행기를 타려는 사람들뿐. 위험해 보이진 않지만 편안할 정도는 아니다. 의자는 보기보다 더 불편했고 배낭에 기대어 조는 와중에도 엉덩이가 아파서 계속 자세를 바로잡아야 했다.


 헬로. 헬로. 웬 흑인 아주머니가 내 앞에 서 있다. 에티오피안 항공을 탈 거냐고? 아. 항공사 직원이구나. 예스 예스. 직원이 친히 승객을 깨워주시고 친절도 하셔라. 출발시각 정확히 3시간 전부터 체크인을 시작한다. 보딩패스가 나오는 동안 주위를 둘러봤다. 공항 전체에 동양인은커녕 백인도 찾아볼 수가 없다. 


맞다. 여기 아프리카지.




게르니카, 파블로 피카소, 1937

                                                       

피카소의 추상화 같은, 에티오피아의 땅



 출발시각이 앞당겨져서 예상보다 일찍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했다. 형이 나와 있지 않으면 어쩌나, 마음을 졸이며 밖으로 나갔다. 이른 시간인데도 터미널 앞은 승객을 태우려는 승합차와 택시, 그리고 마중을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열심히 눈을 굴려도 반가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낯선 이들의 무심한 눈빛만이 나를 향할 뿐이다. 가만히 있으면 더 바보처럼 보일까 봐 일단 사람들을 따라 파란색 승합차가 줄지어 서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 스스로도 이 무리에서 섞여있는 내게 이질감을 느끼는데 택시기사들이 보기엔 오죽했을까. 아니나 다를까 젊은 남자 한 명이 내게 다가온다.


“택시?”
“아니,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야.”
“친구 핸드폰 번호 알아? 이걸로 걸어봐.”


‘나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장사꾼 혹은 사기꾼이다. 그냥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없다’라는 여행자의 불문율이 생각나 경계심을 곤두세웠지만 그래도 어떡하나, 일단 형한테 연락을 하고 봐야지. 다행히 형은 거의 다 도착한 모양이다.


“네 친구가 오면 내 택시를 같이 타면 되겠네.”


아저씨는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우리 둘 다 태우려는 것이었다. 친구가 차를 가져온다고 하자 ‘No Problem’이라며 씩 웃으며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꼈다.


 진무 형과 반갑게 재회하고 형이 사는 집으로 가는 길. 너무 번듯해서 놀랐던 공항과는 달리 처음 만난 아디스아바바는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았다. 차선은 없지만 잘 닦여 있는 도로, 여기저기 솟아 있는 고층 건물은 최근 급성장하는 에티오피아의 경제상황을 비춰주었지만 뿌연 하늘과 지독한 매연, 인도를 침범한 공사현장의 잔해들은 그 이면의 부작용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냈다. 


 물론 첫 여행지와의 만남에서 오는 설렘은 이와는 별개로 이미 찾아와 있다.


3주간 나의 보금자리가 될 곳


 형이 사는 집은 혼자 쓰기엔 충분히 넓고 쾌적했다. 널찍한 거실에다가 마치 형에게 예지력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방도 두 개였다. 침대에 옷장, 거울이 있는 화장대까지 있어 앞으로 여행하면서 묵을 도미토리에 비하면 호사를 누리는 격이다. 얼른 밖에 나가고 싶어 짐을 대충 던져놓고 거리로 나왔다. 거리에 발을 디딘 순간, ‘오오. 내가 무사히 아프리카 땅을 밟았구나. 한국에서부터 얼마나 멀리 날아왔던가. 어젯밤 공항은 또 얼마나 추웠던가’ 하는 감격이 몰려왔다. 어디서 왔는지 개 한 마리가 혀를 내밀고 내 옆을 지나갔다.


 골목을 벗어나 대로변으로 나오니 사람들의 시선이 날아와 꽂힌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행인으로부터, 옆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부터, 과일가게 주인으로부터. 이방인에 대한 노골적인 눈빛은 경계심일까 호기심일까. 환희에 차 가볍던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애써 태연한 척 미소와 함께 그들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보냈다.




 와이파이가 거의 없는 에티오피아에서 3주를 지내기 위해서는 유심칩이 필요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향한 곳이 바로 이동통신사였다. 어렵사리 찾은 통신사 사무실은 삼엄했다. 들어가려 하자 경비 아저씨가 길을 막으며 가방을 열어서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가방에 있던 카메라를 보더니 이건 반입할 수 없다며 자기에게 맡기란다. ‘세계 일주의 첫날 카메라를 잃어버리면 여행이 아주 스펙터클 해지겠지?’ 하는 속내를 읽었는지 아저씨는 작은 경비실 안에 보관함을 보여주면서 여기에 둘 테니 걱정 말라는 눈빛을 보내셨다.


 아프리카의 이동통신 산업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말은 사실로 판명이 났다. 평일 낮시간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니 말이다. U자형의 기다란 소파에 앉은 사람들이 한 칸씩 옆으로 이동하며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이 안에서도 시선 세례는 계속된다. 민망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시는 할아버지와 우릴 보고 킥킥거리는 아주머니들. 부담스럽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아마 수십 년 전 한국에 왔던 외국인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테니까. 아까부터 계속 나를 살피던 젊은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어디서 왔어?”
“한국(South Korea).”
“너 그럼 한국과 에티오피아 사이에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6.25 파병을 얘기하는 것 같다.


“알지.”
“뭔데? 말해봐.”


 안면을 트자마자 취조하듯이 묻는 사람의 질문을 거부할 권리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모르는 것처럼 보이긴 싫었다. 기계적으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한국전쟁 때 에티오피아에서 파병했잖아.”
“그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

"..............."

“고… 고맙지.”


 그제야 만족한 듯 엷은 미소를 보이는 그. 뭐지 이 답정너 같은 상황은? 당황스러웠지만 역사의식이 투철한 시민이거나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쯤 되는 사람이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내 대답을 듣고는 볼일이 다 끝난 사람처럼 내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형에게 나중에 물어보니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한국이라고 하면 이 얘기를 항상 한다고 한다. 아…. 나중에 또 물어보면 대답을 더 잘해야겠네.


 나중에 현지 교민분들로부터 한국전쟁 파병용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6천 명의 황실 근위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를 돕기 위해 배를 탔고 그들은 아프리카에선 겪어보지 못한 극한의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내며 전장의 최일선에서 253전 253승을 거두는 용맹함을 떨쳤다. 

 하지만 비극은 이후에 찾아왔다. 왕정이 무너지고 74년 들어선 공산정권은 동맹국인 북한과 싸운 참전용사들을 핍박했고 참전용사들은 이름과 성을 바꾸고 뿔뿔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우리나라에 파병을 보낼 정도로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던 에티오피아는 시간이 흘러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전락했고 연금도 받지 못하는 참전 용사들은 지금도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한 참전용사의 집을 방문한 교민은 마당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군복을 입고 경례를 하는 노병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내게 물었던 남자를 보고 '왜 뜬금없이 옛날 얘기를 하는 거야?'하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온 첫날이니 저녁은 거하게 먹어야 한다며 형이 한식당에 가자고 했다. 설마 식당 이름이 아리랑이 아닐까 했는데 역시나였다. 그렇게 난 전 세계 체인 한식당인 아리랑 아디스아바바점에서 첫날의 저녁 만찬을 즐기게 됐다.  


 어두워질 무렵 도착한 한식당 아리랑. 택시에서 내리는데 아디스아바바에서 흔히 볼 수 없을 것 같은 고급 승용차가 식당 입구에 섰다. 이런 비포장 도로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정색 독일차였다. 곧이어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와 같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반바지에 추리닝 차림으로 온 이곳은 현지 VIP들이 찾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으니 굳이 첫날부터 한식을 먹어야 하나 탐탁지 않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집었다. 어이쿠, 메뉴가 많기도 하다. 김치찌개와 제육볶음을 시켰다. 에티오피아 한식당에 와서 고작 김치찌개와 제육볶음이냐 만은 괜히 모험을 했다가 첫 식사를 망치고 싶지는 않다. 나의 선택에 흐뭇해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옆 테이블에 분위기 있게 앉은 두 여성이 보였다. 그리고 테이블 가운데에는 배추김치를 담은 큰 접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여성은 마치 전채요리를 먹듯이 김치를 조금씩 먹고 있었다. 그것도 젓가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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