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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난돌 Jan 06. 2019

우리는 그들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만비키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8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의 첫 장면엔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는 부자, 오사무와 쇼타가 등장한다. 한두 번 해본 것 솜씨가 아닌 듯 능숙하게 손발을 착착 맞추며 함께 하는 일이 도둑질이라는 점은 여느 부자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하루 일(?)을 마치고 군것질을 하며 집으로 돌아갈 때만큼은 지극히 평범하다. 그리고 그 길목에서 살이 아리도록 추운 겨울 베란다에 내복 차림으로 나와 있는 여자 아이 유리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집으로 데려오며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1. 도대체 가족이란 무엇인가?

  한국에서는 《어느 가족》이란 이름으로 개봉했지만, 일본판 이름은 《만비키 가족》, 즉 좀도둑 가족이란 뜻이다. 어느 쪽이든, 가족은 가족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론 가족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의 모습을 뒤집어 버린다. 만비키 가족의 구성원인 하츠에, 노부요, 오사무, 쇼타, 아키, 유리 중 어떠한 관계도 혈연이 아니다. 그 뿐인가? 지금 당장 가족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그 안에 자식들에게 도둑질을 놀이처럼 가르치는 부모나, 손녀가 할머니에게 웃으며 남자들에게 가슴을 덜렁거리는 일을 찾았다고 말하는 모습도 들어가 있는지? 이 기함할 것만 같은 상황들이 ‘어느 가족’에겐 그저 일상이다.

  하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우리는 그들을 진정한 가족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비록 피로 맺어지지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가족이다. 특히 영화의 끝무렵, ‘어느 가족’이 와해되고 유리는 친엄마에게로 돌아간다, 아니, 돌려보내진다. 유리의 실종 사건으로 한차례 매스컴을 탔기에 유리의 친부모 역시 인터뷰를 가지며, ‘유리는 친엄마가 차려준 따뜻한 밥을 먹으며 안정을 찾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단번에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다시 친엄마로부터 학대당하는 유리를 보며 우리는 우리가 그 동안 생각한 가족이야말로 환상은 아닌지, 진정한 가족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속에서 ‘어느 가족’은 서로를 엄마, 아빠와 같은 호칭으로 부르지 않는다. 다함께 떠난 여름 휴가에서 할머니는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하지만, 고맙다는 말을 소리내어 말하지 못한다. 가족이 와해된 이후 마주한 오사무와 쇼타가 마지막으로 함께하던 밤, 오사무는 쇼타에게 ‘아빠는 아저씨로 돌아갈게’ 말한다. 헤어지는 버스에서 쇼타 역시 ‘아빠’라는 단어를 소리 내지 못하고, 그저 뻐끔거린다. 이는 어쩌면 전통적인 언어로는 ‘어느 가족’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닐까?  

  


2. 탈근대 사회와 가족의 해체

  탈근대를 말하기 위해서는 근대를 먼저 이야기해야만 한다. 근대 사회는 곧 산업화의 사회로 고도의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우리나라가 7,80년대에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던 것처럼 일본은 우리보다 조금 앞선 5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이례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며 풍요로움을 누렸다.

  산업화와 짝을 이루는 키워드는 자본주의와 효율성이다. 대량 생산을 위해 들어선 공장에서 효율성을 위한 분업이 자리 잡았고, 이는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인 가족에게도 요구되었다. 가정 밖에서 노동을 하며 자본을 들여오는 일은 아빠가, 집안의 가정일은 엄마가, 장남은 장남대로, 장녀는 장녀대로, 막내는 막내대로 각자 맡은 바가 뚜렷이 나뉘었고, 모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각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 곧 가족 모두에게 악영향이 미치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근대화에 의해 현재까지도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람의 도구화, 수단화이다. 철저한 분업을 통해 일의 전체 그림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이 노동에서 소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력 역시 망가지면 언제든지 교체 가능한 부품 수준으로 전락했다. 가족 역시 개개인의 특성보다는, 아빠로서의 역할, 엄마로서의 역할, 자녀로서의 역할이 우선하면서 오늘날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돈 벌어오는 기계 아빠와 자녀 사이의 소통 단절’, ‘엄마로서의 역할과 직장에서의 역할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는 워킹맘’, ‘모성 신화’ 등의 문제들이 비롯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성장 역시 침체기를 맞이하고, 각자의 역할에만 충실하면 풍요롭고 행복하리란 기대가 좌절되면서 열리는 탈근대는 곧 가족의 해체를 동반한다. 늘어나는 1인 가구와 구직을 포기하고, 사람들과의 소통을 단절하기 시작하는 젊은 세대들은 이러한 흐름의 산증인이다. 일본의 현재는 우리나라의 10년 뒤라는 말이 있듯이, 일본의 90년대에서는 히키코모리가, 2000년대 초중반에는 니트족 등의 단어가 등장하며 탈근대의 현상들을 잘 설명한다.

  특히 요즘의 일본에서는 ‘히키코모리의 고령화’라고 하여, 집안에 틀어박혀 어떠한 생산 활동도 하지 않고, 고령 부모의 연금을 통해 생활하는 4,50대, 더 나아가서는 60대 히키코모리를 지칭하는 말이 생겼다. 실제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역시 어머니의 죽음을 신고하지 않고 그 연금으로 생활하다 체포된 가족의 연금 사기 사건에 영감을 받아 영화를 구상했다고 한다.  

  노부요는 오랫동안 일한 공장에서 ‘워크 셰어’라는 명분으로 해고당한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와 푸념하듯이 말한다.

  “모두 조금씩 가난해지는 거지.”

  도둑질에 회의감을 가지는 쇼타에게 오사무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가게가 망하지 않을 만큼만 훔치며 어때?”

  우리 모두 물건을 훔치는 것은 나쁘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어느 가족’을 돌로 후려치기엔 팔이 너무나 무겁다. ‘어느 가족’의 구성원들이 근대화 이후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받은 이들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에.  



3. 좀도둑 가족
  이번엔 ‘어느 가족’보다 ‘좀도둑 가족’이라는 일본의 원제에 좀 더 초점을 맞춰 보자. 우리가 ‘좀도둑 가족’에 대해 어지러운 감정을 갖는 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다면적인 모습 때문이다.

  노부요와 하츠에가 육교에서 앞서 뛰어가는 쇼타와 유리(영화의 중반부에서부터는 린)을 보며 대화를 나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서로를 선택한 거니까. 그러니 더 끈끈할 수도 있지.”

  “혈연이 아니니까, 쓸 데 없는 기대를 안 해서 좋아.”

  이 짧은 대화는 이 가족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한 토막이다.

  그들은 서로를 가족처럼 여기지만, 서로에 대해 도덕적인 판단을 하거나 간섭은 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도둑질을 놀이처럼 가르치듯 오사무나, 자신이 새로 구한 직업을 자랑스레 설명하는 아키와, 돈 벌기 쉬워졌다며 감탄하는 하츠에의 대화 장면이 그러하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놀라우리만치 냉정하다.

  하츠에의 죽음 이후, 노부요와 오사무는 신고하거나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지 않고 집 안의 마룻바닥을 구덩이처럼 파내고, 그 안에 하츠에의 시신을 묻는다. 쇼타가 입원했다는 병원에서 경찰과 마주한 이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가 주저없이 쇼타를 두고 도망치는 선택을 한다. 서로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고, 어쩌면 계산적으로 보이기까지 한 그 모습은 탈근대의 파편화된 개인의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족’ 인 이유는 그들이 곧 ‘연대’의 의인화이기 때문이다. 좀도둑 가족의 구성원들은 각자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남편이 바람을 피고 새 가정을 꾸린 하츠에, 전 남편에게 가정 폭력을 당했던 노부요와 그런 노부요를 도와 전 남편을 살해한 오사무, 가족으로부터 버림 받은 아키, 쇼타와 학대를 당하는 유리까지. 그러나 그들은 상처받은 스스로를 연민하지 않고, 자신과 같은 상처를 지닌 이들에게 동정심이 아닌 진정한 위로를 보낸다.

  함께 목욕을 하다 친엄마에게 뜨거운 다리미로 맞아 생긴 유리의 흉터를 본 노부요는 자신 역시 일터에서 다리미에 의해 생긴 흉터를 보여준다. 아키는 자신처럼 손목에 상처가 있는 손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한다. 그들의 상처는 숨겨야 할 약점이 아니라 서로를 잇는 연결고리로 탈바꿈한다.

  영화에서 어린 쇼타는 오사무에게 틈틈이 ‘스위미’라는 동화를 이야기한다. 네덜란드의 동화 작가 레오 리오니의 ‘으뜸 헤엄이’를 따온 것인데, 내용은 대략 이렇다. 참치에게 친구들을 모두 잃은 작은 물고기 으뜸 헤엄이는 참치를 피해 작고 빨간 물고기들이 사는 곳으로 피한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숨어 살 수 없던 으뜸 헤엄이가 빨간 물고기들과 함께 큰 물고기의 모습으로 수영하여 참치를 물리친다는 것이다. 영화 속 좀도둑 가족은 제도화된 가족이 아니라 사회에 소외당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거칠게 말하면 살아남기 위해 구성한 연대를 의미한다.

 


 4. 겨울, 여름, 그리고 다시 겨울
  영화가 시작할 때의 배경은 겨울이다. 날카롭도록 추워 밖으로 나가기가 두려운 겨울. 유리가 새로운 구성원으로 합류하고, 가족들의 짧디 짧은 행복이 피어나는 계절은 녹음이 우거진 여름이다. 이후 유리를 구하기 위해 경찰에 잡힌 쇼타에 의해 가족은 다시 뿔뿔이 흩어진다. 하츠에는 따라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노부요는 감옥으로, 유리는 학대를 가했던 호적상 가족의 품으로, 그리고 쇼타는 자기와 같은 아이들을 보살피는 곳으로. 그리고 그 시기는 다시 겨울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좀도둑 가족을 탈근대 사회의 대안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사회는 이미 그들을 한 번 사회의 사각지대로 몰아놓고선, 제도라는 이름으로 또 다시 와해시킨다.

  “아이를 낳을 수 없으면 엄마가 될 수 없죠. 그러니까 유리를 유괴한 거잖아요?”

  “도대체 왜 쇼타에게 도둑질을 가르친 겁니까?”

  경찰의 입을 빌려 재구성된 노부요와 오사무는 파렴치한, 아니 금수만도 못한 사람들이 되어버린다. 영화를 본 우리는 ‘그게 아닌데…….’생각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지만 영화 밖의 현실에서, 그런 기사들을 접한다면 우리는 영화를 보듯이 다르게 생각할 수 있을까? 학대당하는 모습은 가려지고 친엄마가 차려준 따뜻한 밥을 먹고 있다는, 현실 속 또 다른 유리의 기사를 보고 그 이면을 얼마나 상상할 수 있을까?

  영화의 마지막과 함께 도래한 겨울이 좀도둑 가족의 앞으로의 험난한 나날들을 상징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삶의 굴곡이든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다시 여름이 찾아올 수 있을지 나는 모른다. 이는 아마, 영화를 본 우리 몫의 숙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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