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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ug 21. 2023

너에게 나는 늘, 무력하다

미야케 쇼의 보이는 것을 보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하나 둘 셋 넷 다섯…백 여덟 아홉 열…그리고 백 열둘.

아무것도 아닌 일들에 이름이 새겨진다. 착각일지 모를 설렘이 혹시나 싶은 순간을 기약하고 구두로 정한 약속은 지키지도 않으면서 우연한 만남은 실패하지 않았다. 불성실한 서점 직원 남자가 길에서 스친 같은 직원 사치코와 약간의 신호를 주고받은 뒤 숫자를 세기 시작하는 장면은 아마, 미야케 쇼의 영화적 세계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을 것이다. 어둑한 시간의 거리, 시계도 없고 만남을 예견하는 말은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지만 하나부터 시작해 120까지 홀로 되뇌이는 인내의 이 기다림.  그런 터무니없이 막연한 예감이 둘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한다. 서점에서의 아르바이트를 제외하면 아무것도정해지지 않은 남자 ‘나’와 여자 사치코. 그리고 또 한 명의 남자 시즈오. 청춘의 방황과 사랑 그리고 우정을 여름 한 철 안에 펼쳐 놓은 영화에서 그를 시작하게 하는 건 다름 아닌 이유 없이 카운트되는 1부터 120까지, 그 숫자들이었다. 

실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결국은 아무 의미도 없을 시간에, 둘을 만나게 하고 숫자를 매겨준다. 직감에 의한 시간을 기다리는 법, 그런 영화의 시작이라고나 할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사회가 규정한 질서와 규칙이 아닌 그 밖에 실존하는 아련하고 몽연한 것들. 그 순간 영화는 부쩍 내밀해져 오직 그곳에만 존재하는 세계와 소통하고, 오즈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미야케는 분명, 시간을 필름으로 카운팅할 줄 아는 사람인 것 같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미에케의 세계에 돌어와, 세상 모든 무의미한 소음이 지워진, 그로부터 자유롭게 독립한 여자의 살아가는 오늘을 우리는 마주한다. 미야케의 다음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는 그 자신과는 좀 거리가 느껴지지만 청각 장애를 딛고 복서로 살았던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삶을 바탕으로 한, ‘지지마!(負けるな!)’란 타이틀로 발행되었던 자전적 에세이를 참조로 한 작품이다. 그런데 여기에선 왜인지 시력이 아닌 청력을 향한 어떤 애달픔의 호소가 되어있다. 국내에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라 번역돼 공개된 미야케의 3번째 장편 ‘케이코 눈을 크게 떠(ケイコ、耳を澄ませて)’는 어딘가 눈으로 세상을 보았던, 두 눈 크게 뜨고 세상과 마주한 사람의 혹은 보지 못한 시절의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린다. 막연히 숫자에 기대 기다림을 기다렸던 남자의 그 직감에 더 가까운. 애당초 복싱 영화 제목으로 이건 좀 너무 감상적이지 않은가. 전작의 타이틀을 조금 흉내내보면 ‘그녀의 두 눈은 노래를 할 수 있다.’


보이는 영화와 보는 영화


고요하게 가라앉은 오후, 바람을 가르는 소리. 도쿄 외곽의 어느 체육관에서 샌드백을 때리는 동작은 소리로 맴돌고 가쁜 호흡과 함께 몸의 리듬을 그린다. 아직 체육관엔 도착하지 않았는데 얼추 그곳을 경험한다. 실제 청력 장애를 가진 복서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자전적 에세이 ‘지지 마'를 원작으로 한 미야케 쇼의 첫 복싱 영화, ‘눈을 들여다보면'은 소리로 이야기하면 결코 높은 데시벨의 영화가 아니다. 긴박하고 치열하고 에너지가 상승하기만 하는 긴장감을 쫓지 않는다. 복싱을 소재로 하면서도 좀 고요하다. 

주인공 케이코는 남동생(사토 히미, 참고로 아사노 타다노부의 아들)과 함께 살고, 도쿄 아라카와의 낡고 오래된 체육관엔 그 말고도 경기를 위해 땀을 흘리는 복서들이 대여섯은 된다. 줄넘기를 하고 연습을 하고 땀을 흘리면 집으로 돌아가고, 별 특별한 사건도 없다. 그렇다고 딱히 케이코가 특별한 대우를 받지도 부당한 처우에 몰려있지도 않다. 귀가 들리거나 들리지 않거나 복싱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영화는 별 관심이 없다. 



도리어 영화가 주목하는 건, 어쩌다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의, 왜인지 함께 존재하는 공간의, 우연히 보았거나 마주하게 된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의 지금에의 관찰에 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늘상 그렇게 있는 것들의 이야기되지 않는 것들을 느긋하게 그리고 성실히 바라본다. 가령, 체육관 창가에 비친 해와 날리는 먼지를 괜시리 응시하는 정()의 머무름이랄지, 줄넘기 소리가 들리는 거리에 가로등 불빛이 켜지고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하는 어떤 움직임의 동적 꿈틀거림이랄지, 무엇보다 영화엔 일상의 순간과 순간을 실은 연결하고 있는, 이를테면 잉여 시간에의 묘사가 많다. 줄거리상 한 줄도 되지 않을 대목들이 여기선 영화적 현실이 되어 존재하지 않던 시간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물론 이를 바탕으로 미야케의 영화가 ‘듣기’가 아닌 ‘보기의 영화’로 전환되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는 있는 건 아니다. 애당초 보기와 듣기를 구분해 사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관계의 시점에서 미야케의 영화는 들었거나 보았던 것이 아닌 보지 못했거나 소리로나마 볼 수 있었던 것, 즉 소외되어 가는 것들에 보다 더 가까이서 침습한다. 영화의 초반 샌드백 펀치 소리 만으로 체육관을 떠올리게 하는 것처럼 듣기는 보기를 대신하고, 동생이 여자 친구와 거실에서 이야기하며 음악을 들어도 홀로 방 안에 앉아 아무 방해 받지 않고 일기를 쓸 수 있는 것처럼 듣지 못해 구해지는 시간은 보기로 구원되었다. 

이를테면 사람과 사람 사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농인으로서의 케이코는 별로 열등하지가 않다. 소위 청력 장애자가 주인공인 영화에서 환경음은 소리를 높이기 마련이지만, 반대로 관객을 주인공과 동일화 하기 위해 듣기 어려운 환경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미야케는 이 둘 다 택하지 않았고 오히려 우회하며 적절한 소통을 길어낸다. 주변 환경에 보다 더 집중하면서, 별 거 아닌 배경의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들이 숨쉬는 지근거리 어딘가에 모두를 데려다 놓는 것이다. 


심지어 체육관 관장은 취재를 하러 온 기자에게, ‘청력 장애 선수의 데뷔전 승리’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에 혹해 찾아 온 기자의 질문에 ‘재능은 없어요'라고까지 말했다. 체육관 구석진 자리에 창밖으로 햇살이 가득 비치는 자리에서 그는 선수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케이코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재능은… 없어요. 작고, 리치도 짧고 스피드도 느리고요. 하지만 뭐랄까요. 인간적인 기량이 있어요. 정직하고 솔직하고 아주 좋은 녀석이에요” 인간적 기량의 복서. 복서의 자질로는 아마 가장 생뚱맞을 것 같은데, 오히려 여기에 이 영화가 가장 하고싶은 말이 있다 복싱을 삶에 비유할 수 있다면, 서로가 서로를 외면하지 않고 응시하는 순간의 절대적 고요함에서가 아닐까. 가장 조용하게 삶에 카운터 펀치를 날리는 좀 불편한 복싱 영화가 도착했다.


영화가 되지 않는 것들의 영화


미야케의 전작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와 달리 비교적 ‘스토리’가 존재하는 이번 영화에서 그 스토리를 대하는 방식은 좀 오묘한 구석이 있다. 세상에 줄거리로 설명되는 영화와 그렇지 않는 영화가 있다고 할 때 미야케의 영화는 전적으로 후자에 속하고, 그건 현실을 스토리 순으로 정리한 하일라이트나 요약판의 영화와 달리 별로 편집되지 않은 삶의 영화라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거리를 걷고 목적지에 갔다 반대 방향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기만 하는 이와 같은 시간은 대부분 영화에서 생력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미야케의 영화가 도쿄 외곽 작은 마을에 도착해 카메라를 놓는 건 바로 그와 같은 지점에 있다. 



케이코는 체육관에 가기 위해 집앞의 작은 계단을 걷는다. 그 길에 어느 날은 샐러리맨과 마주치고 또 다른 날엔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동네 남자와도 마주한다. 영화 후반엔 체육관 관장 부부와 만나 짧게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별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핸드폰을 보며 걷던 샐러리맨과는 부딪혀 험한 소리를 들었고, 이웃 남자와는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기도 했지만 아무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야케는 이 별 거 아닌 대목을 거의 똑같은 위치, 같은 앵글 아래서부터 바라보고 그렇게 함으로써 별 거 아닌 것들 사이에 시간성을 입혀낸다. 케이코가 집을 나서 체육관에 갔다 다시 돌아오는 하루의 리듬, 곧 일상성이 확보되었다. 즉, 이곳에 사건은 없지만 현재 진행형의 시간을 영화는 끝내 보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 위주 핀포인트식이 아닌, 아울러 바라보는 촬영의 행위는 듣지 못하는 농인의 일상과 맞물려  좀 낯선 시계를 마주하게 한다.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어느 타자의 진짜 일상이 이상하게 그 곁에 있다. 여기서 타인이란 물론 곧 케이코의 그것을 가리키겠지만 미야케의 영화는 섣불리 알려 하지 않고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지극히 조심스러운, 미안함을 동반한 망설임으로 마주할 뿐이다. 이를테면 듣지 못했거나 말하지 못해 벌어지는 상황에의 연출인데, 임의적 설정을 최대한 자제해 그려낸 장면 속에 케이코는 불안해보이지만 대부분 아무렇지 않(았)다. 



가령, 케이코가 복싱장도 집도 아닌 편의점에 갔을 때 계산대 앞에서 케이코와 점원 사이엔 약간의 버퍼링 상황이 발생한다.점원은 포인트 카드가 있으면 할인을 받을 수 있다고 가입을 제안하지만, 그를 들었을 리 없는 케이코는 고개를 갸우뚱 하거나 되묻는 대신 가방에 넣어 두었던 에코백을 꺼내 구매한 상품을 집어 넣었다. 아마도 그는 상대의 입 모양을 통해 그렇게 이해했을 것이고, 다만 점원은 그 상황이 의아하기만 하지만 코로나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관계하고 하지 않는 시절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는 모양새다. 물건을 다 집어 넣은 케이코는 편의점을 떠났고, 점원은 다음 손님을 상대하고, 영화는 그와 함께 그곳을 뒤로한다. 오해가 오히려 도움이 된 것 같은 상황, 하지만 무언가 남아버렸다. 아마도, 미완의 관계.

귀가 들리지 않는, 욕을 한다해도 들을 수 없는 케이코는 샐러리맨을 그냥 지나치지만, 만약 그 욕설을 들을 수 있었다면 겪었을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이른 아침 인사를 해준 남자에겐 함께 말을 섞기도 했는데, 맘이 심란한 순간에 예기치 않게 마주쳐버린 평소 체육관 관장에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관계하지만 관계하지 않고 관계가 없지만 관계가 있다. 즉 듣고 듣지 못함은 어느새 관계하고 관계하지 않는 일상의 너무 작고 미세해 보이지 않는 리얼리티가 되어있다. 들을 수 있는 청인이 들을 수 없는 농인의 삶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미야케는 타자에 대해 알 수 없다면 그와의 관계를 관찰하고, 그건 곧  어떤 누구도 그 어떤 순간도 관계 하에 존재하고 있다는 굳은 믿음 안에서 가능해진다. 


2020년 2월 크랭크인을 해 약 2개월간 19회차로 촬영을 마친 이 영화는 시기상 코로나 한복판에 완성된 작품이지만, 그와 상관없이 여기엔  마스크 위 눈으로만 소통을 하던 시절의 답답함을 케이코의 들리지 않는 평소 일상과 조응하게 하는 무심함의 리듬이 있다. 단순히 말하면 서로의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방어했던 마스크를 통해 케이코가 평소 살았던 일상의 풍경 곁으로 한 발짝 다가가는 간접적 효과가 본의 아니게 발생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점원의 속내를, 그리고 케이코의 기분을 우리는 알 수 없고, 영화 또한 부연하지 않으면서 영화엔 그냥 그렇게 끝나버린 그리고 지나가는 하루가 남았을 뿐이다. 마스크를 쓰기 시작한 시절 케이코는 전보다는 조금 그들과 다르지 않은 관계하며 살았을지 모르지만, 그건 여지없이 서로가 말하기를 멈추었던 시대적 암묵적 동의에 의존하고, 서로를 확신할 수 없는 타자성은 여전히 그곳에 유효하게 그대로 있다. 관계가 제한된 시절에 마주한 너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혹은 과제. 영화는 오직 여기에만 관심이 있다.


우리는 늘, 

너에게 무력하다

미야케는 이번 영화에서 유독 몇몇 공간들, 케이코의 집이거나 체육관 그리고 그가 일하는 호텔 등 임의로 정해진 공간 안에 나와 너와 그들이 함께 자리하거나 지나치는 순간들을 쌓아간다. 본의든 아니든 코로나 시절 분절된 일상을 프레임에 옮긴 듯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보다 미야케의 영화엔 같은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수평으로 이어지는 어느 시간 축을 연상케 하는 힘이 있다. 이를 테면 비 내리는 아침 미트 펀치 소리 만이 들리는 장면에서 그건 복싱장에서 누군군가 아침 일찍부터 땀을 흘리는 시간과 이어지고, 케이코가 시합을 하는 사이 그곳에 없는 동생이나 엄마의 모습은 그곳에 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애절함과 에잔함 사이 결국 말하지 못할 감정으로 읽힌다. 케이코와 관계하지만 그와 함께 그리고 별도로 흘러가는 각자의 삶을 암시한다. 결국 말이 되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고 보이게 하는 건 각각 장소에서 열심히 하루를 사는 시간들, 프레임과 프레임으로 연결되는 우연한 시간이다. 

케이코가 체육관의 관장이나 트레이너 마츠모토, 그리고 하야시와 있을 때, 집에 돌아와 동생과 함께 있지만 각자의 자리(방이거나 거실)에 있을 때, 그리고 호텔 객실에서 침대 정리를 대충하고 마는 후배에게 지도를 할 때 각 공간에서 그곳의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케이코가 그려진다. 매일같이 같은 케이코의 조금씩 다른 케이코를 보게된다. 그리고 이를 사소하지만 삶, 인생을 살아가는 시간에 대한 최선 아닌 차선의 접근이라 할 수 있을까. 양화가 삶을 따라할 수 있다면 그건 아마 자극적 사건의 조합이 아닌, 반복되고 다시 또 이어지는 오늘과 오늘’ 사이의 몽타주일 것이다. 미야케의 영화는 전적으로 후자, 그 보이지 않는 리듬 위에 안착한다.



그리고 이번엔 체육관도 집도 편의점도 아닌 카페에서 농인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영화는 그들의 대화를 들려주지 않는다. 케이코와 친구들이 하는 말을 장면과 장면 사이 언어화한 자막 인서트 숏으로 삽입하고 본의 아니게 관객과 영화 사이에 일정 정도 시차가 발생하고 만다. 흡사 초기 무성영화 방식대로 미야케는 이 대목을 연출했는데 대사가 극도로 제한된 영화에서 이는 오히려 타자성을 새삼 의식한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처럼도 보인다. 대사 한 줄 치는데 따라붙는 정막의 신이란 현대 영화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내가 아닌 너에게 말하는 자리에서 그 말을 보다 더 대화의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즉 농인의 대화법을 빌려 말 속에 묻혀있던 타자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선다.  무엇보다 관계하고 관계하지 않으면서 드러나는 개개인의 캐릭터성을 존재하게 한다. 말하자면 서로 다른 타자와 관계하고 하지 않는 케이코를 통해 그를 수집하며 케이코란 인물을 이해해가는 과정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위해 벌어지는 일종의 ‘카운트다운’ 작업은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와 같은 장면에서 케이코는 늘 후에 등장하는, 주어진 공간 안에 타자가 먼저 있고 이후에 입장하는 식으로 그려진다. 이는 물론  케이코의 리액션, 농인이란 특이성을 갖는 주인공의 말을 대신하기 위함이겠지만, 그만큼 도드라지는 건 그를 상대하는 타자의 시점과 반응, 즉 각자의 스토리이다. 

체육관의 폐관이 거의 결정되고 회원들은 모두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고 하야시도 마츠모토도 이제는 정리를 하는 상황에서, 두 명의 트레이너는 케이코를 받아 줄 체육관을 수색해 운좋게 한 곳에서 수락 의사를 받아낸다. 그리고는 함께 그곳을 방문하는데 케이코의 표정이 그리 밝지않다. 시설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좋은 건 물론 새로운 관장은 아이패드까지 준비해 소통을 하려하지만, 섣불리 수긍을 하지 못한다. 이유를 물으니 패드에 손글씨로 ‘거리가 너무 멀어서.' 맥이 빠지는 말이다. 

이는 앞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관장이 이야기한 ‘솔직하고 꾸밈이 없는' 성격 그대로일 수도, 혹은 그 무렵 체육관을 쉬고 싶다는 편지를 쓰고 전달은 하지 못한 속내의 다른 표현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에게 먼 길이란 단지 거리가 멀어지는 것 만을 뜻하지 않아서일지 모른다. 아마도 그 이상의 어려움일 것이다. 실은 아주 단순할지 모를 일이다.



편의점에서 케이코의 듣지 못하는 장애는 그 시절의 마스크를 쓰고 살았던 시대 배경에 묻혀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오해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을 관계이다. 하지만 여기서, 보다 가까워진 거리의 관계에서 그 결말은 별로 좋지 못하다. 하야시는 표정이 굳는다. 마츠모토는 심지어 큰 소리로 화를 내버렸다. 케이코를 위한다고 한 일들이 모두 나의 아픔으로 남아 버리는나와 타자 사이 발생한 작용 반작용의 결과. 영화는 케이코의 일상을 그리면서 그와 관계하는 주변의 일상을 함께 아우르고, 이는 우리가 삶에 대해 알 수 없는 것처럼 타자의 세계를 향한 우리들의 무력함과 깊게 어우러져있다. 


타자에 비치는, 그로인해 알게되는 나의 하루가 이곳에 있다. 결코 혼자 보지 못하는 것을 그 곁에서 비로소 보고야 만다. 타자를 타자로 인식하는 것. 들리고 들리지 않음의 현실이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타자라는, 즉 ‘타자 사이’라는 것을 알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서먹함과 망설임, 그리고 조금은 낯설고 어색한 순간들. 아마도 대부분의 영화들이 찍지 않는 것. 이 영화의 하고싶은 말은 아마 바로 여기에 있다. 오래 바라보면 보이는 것, 멈추지 않을 때 비로소 갖게되는 관계. 미야케의 영화는 늘 이 순간을 위해 시간을 살고, 그의 영화가 줄거리로 되지 않는 건 늘 이렇게 보지 못했던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케이코 눈을 크게 떠'라고 하는 말. 그건 아마 케이코를 빌려 우리 모두에게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영화의, 

인생같은 치명타에 관하여



본다는 건 소리보다 능동적이다. 듣고 듣지 않거나 못하는 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이 더 많지만, 본다는 행위엔 의지가 개입하고 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청각 장애를 가진 이의 곁에 함께있기 위해 우린 듣기가 아닌 보기의 커뮤니케이션 곧 수화를 통해야 하고, 그만큼 ‘보는 말과 대화'로서 ‘보기'란 행위는 보다 더 상대에 가까이 다가서 있다. 그리고 미야케 감독에게 그건 곧 영화일지 모른다. 나를 말하기 위해 그리고 너와 말하기 위해 삶 그 전체를  볼 수 없는 한 우린, 너도 나도 아닌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 

영화의 초반 케이코와 그의 다른 친구들이 카페에 모여 대화를 나누며 브런치를 함께할 때, 그들의 말은 수화로 오고갈 뿐 자막조차 제공되지 않았다. 영화는 그저 대화와 대화 사이 옛 무성영화처럼 대사 만을 적은 인서트 컷을 삽입했다. 그리고 우린 보는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존재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다. 케이코의 남동생과 그의 여자 친구가 수화를 배우면서 케이코를 보는 존재로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영화의 인트로는 알고 보면 듣는 이와 듣지 못하는 이가 아닌, 보고 보여지는 것 사이의 수평한 관계를 구축한 새로운 유형의 커뮤니케이션 그 시작이기도 한 셈이다. 관객 모두가 수화를 알고 있거나 배울 수는 없으니.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면 오해나 착각을 듣지 못함을 이유로 옹호하는 듯도 느껴진다. 역으로 듣지 못함을 이용한다고 오인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엔 서로가 서로에게 집중했던 밀도의 거리가 있고, 섣불리 알려 하지 않는 그럴 수 없는 강요된 신중함이 자리한다. 사건이 아닌 풍경을 쫓는 영화에서 본다는 건 무엇보다 섬세한 감각이 되어있다 그래서 미야케 영화가 구현하는 소소한 디테일의 재현, 작고 사소한 관계의 묘사는 도리어 알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작동한다. 서로가 같은 맘으로 쉽게 합의에 이르는 간편한 소통이 아니라 어긋나고 착각하고 비록 오해할지라도 알 수 없음에 매진하려는 노력이다. 사람 사이 관계에서 이야기해보자면 서로에 충실하며 보지 못한 것가지 아울러 보려고 노력하고 부딪히고 넘너지는 머쓱함이 자란다. 


케이코가 잠시 체육관을 쉴가 고민하던 차 체육관의 마츠모토도 그리고 하야시도 서로 같지만 다른 이유로 고민을 한다. 세상은 코로나로 많은 가게가 문을 닫고 케이코의 체육관도 폐관을 할 위기에 놓이고 거리의 샐러리맨은 휴직에 깊은 한숨을 쉰다. 매일같이 아무 고민없이 흘러가던 일상을 새삼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케이코의 고민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되려고 한다. 하지만 영화는 부쩍 고요함을 찾은 거리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을 바라보며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사일런트한 거리에서 살아갈 케이코의 아직 찾지 못한 답을 포기하지 않는다. 도리의 그의 부단히 분투하는 소리 없는 세계로 돌연 소리를 잃어버린 현실의 거리와 마을과 그 모든 것을 감싸는 제스처를 취한다. 



케이코는 오늘도 체육관이 아니면 호텔 객실에서 테이블의 먼지를 소독약을 써가며 보이지 않는 먼지까지 닦아낼 것이고 그 날의 운동량을 일기와 같이 적을 것이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다가올 내일에 대해 있는 힘껏 맞서 싸울 것이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할 뿐. 타자의 현실은 오늘도 여전히 그곳에 있다. 몸과 몸이 부딪히며 발생하는 움직임의 리듬이 그곳에 산다. 거친 숨소리로 증명하는 열심히 살아낸 오늘이 있고, 그건 곧 우리가 코로나의 아픔을 잊고 다시 어제처럼 살아갸는 바로 그 지근거리에서이다. 

애초 복싱이란 수화와 닮아 케이코에게는 없는 ‘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가장 먼저 체육관을 그만둔 고교생 복서는 만약 관장과 직접 만날 수 있었다면 맘을 고쳐 먹었을지 모른다. 케이코가 몇 번이나 편지를 다시 가방에 집어 넣었던 것처럼 그곳엔 다른 내일이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보지 못한다는 건 영화에서도, 그리고 삶에서도 치명적이다. 하지만 그런 현실은 오늘도 아무것도 모른 척, 보지 못한 채 살아갈 뿐이다. 미야케가 제시한 발견한 삶과 복싱 사이의 미스테리, 그건 결국 그를 푸는 건 보지 못하고 살아온 어제를 바라보는 일, 아니면 내가 아닌 타자의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일일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또 한 번의 하루를 사는 것. 


단 한 장면도 눈을 뗼 수 없는 영화, 꾸벅 졸다가는 삶의 길을 잃어버릴지 모를 영화가 지금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을 이야기한다. 아무 소리도 없이, 그 영화는 지금 이곳에 있다.


‘살아감을 배운다는 것은 타자로부터, 타자를 위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과 동일하다' 

-크리스 후지와라(일본계 미국인 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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