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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mize Impact Oct 21. 2022

꼭 그렇게까지 일을 해야 해요?

꼭 그렇게까지 일을 해야 해요?


얼마 전 지방 출장에서 생긴 일이다. 지방에서 열리는 엑스포에 출전한 회사 전시 부스를 지키는 일이었는데, 워낙 규모가 크고 행사 기간이 길어 다른 부서의 사람들도 여럿 투입됐다. 나도 3일 정도 출장을 신청하고 내려갔다. 행사를 주관하는 부서에서 행사장과 그나마 가깝고 시설이 좋은 곳이 있다며 숙소를 대신 예약해주었다. 며칠 미리 묵어본 사람들 사이에서 숙소가 참 깨끗하고 좋더라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첫날 행사를 끝내고 숙소에 도착했을 때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건 숙소 1층에 즐비하게 늘어선 색색의 개업 축하 화환들이었다.


'아... 신축이구나'


우리 회사는 숙소가 개업하자마자 예약한 첫 손님이었다. 이제는 새집증후군이라면 진절머리가 날 것 같은데 이런 상황이 오면 적지 않게 당황스럽다. 그렇다고 그 늦은 시각에 새 숙소를 따로 구할 수도 없었다. 나는 군말 없이 키를 받아 들고 배정된 방으로 향했다. 깨끗한 벽과 잘 정돈된 화장실 타일에서 새집냄새가 났다.


역시 인간 새집증후군 측정기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 듯, 다음날 눈이 퉁퉁 붓고 얼굴 전체에 열감이 오른 채로 깨어났다. '여기가 신축이라서 그런가? 어제저녁으로 해산물을 갑자기 먹어서 그런가? 출장 때문에 생활패턴이 무너져서 그런가?' 상태가 나빠지면 온갖 원인을 찾아내려는 잡생각을 겨우 떨쳐내고 전시장 부스로 출근했다. 오픈 준비를 어느 정도 마치고 잠시 쉬고 있는데 평소 서로 왕래가 없던 다른 부서의 팀장님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


"출장 와서 피곤한 것도 있고, 제가 아토피가 있는데 숙소가 신축이라 새집증후군도 좀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그냥 안 하겠다고 하면 안 돼? 꼭 그렇게까지 일을 해야 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웃음 섞인 그 말에 나는 너털웃음을 지었다만 곧 마음이 시끌시끌해졌다. '아침에 그나마 가린다고 나왔는데 그게 충분하지 않았나...'.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갛냐는 말이 꼬리표처럼 귀에 달라붙어 계속 신경이 쓰였다. 대충 하던 일을 놓고 나는 행사장의 좁아터진 화장실로 달려갔다. 한 칸 밖에 없는 거울 앞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나를 관찰했다. '음... 빨갛긴 빨갛군. 그런데 이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었나?'. 그리곤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파운데이션을 꺼내 빨간 기운이 누그러질 때까지 덧발랐다. 비록 파운데이션을 바른 덕분에 내 피부는 더 퍼석하고 더 건조해졌지만, 남들이 입을 뗄 만큼 빨 개 보이지는 않을 정도로 대충 마무리하고 다시 행사장으로 나섰다. 그제야 귀에 달라붙은 꼬리표가 떨어져 나간 느낌이 들었다.




아프지만 미안하지 않습니다


'꼭 그렇게까지 일을 해야 하냐'는 말을 들었음에도 예정대로 맡은 스케줄을 소화했다.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굳이 내가 없었어도 어쨌든 일은 돌아갔겠지만, 다들 주말 출근에 연속된 스케줄로 지쳐있는 상태였음으로 손을 하나라도 더 보태고 싶었다. 물론 나 스스로가 느낄 정도로 아주 힘든 상태였다면 당연히 병가를 내서라도 쉬는 것이 맞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내가 수행하는 데 무리가 없는 정도라면 공공연하게 '피부 때문에' 약속한 일을 수행하지 못했던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굳이 그렇게 한다면 정말 내 상태가 견딜 수 없이 힘들 때를 위해 아껴두고 싶었다. 마치 조커 카드를 아껴 쓰는 것처럼. 적절하게 눈칫밥 안 먹는 사회생활을 하려면 남들보다 더 컨디션을 아껴 써야 하는 것이다. '꼭 그렇게까지 일을 해야 하냐'라는 말은 내 상태가 얼마큼까지 나빠질 수 있는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언젠가 <아프지만 미안하지 않습니다>라는 연극을 본 적이다. 저마다 다른 질병, 질환(크론병, 조현병, 암 등)을 앓고 있는 당사자들이 직접 겪은 말들과 경험들을 엮어 직접 출연까지 했던 연극이었다. 연극의 타이틀은 원작의 책 제목에서 그대로 따왔다. 나도 연극의 출연진이자 질병의 당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건강한 몸이 기본값인 사회에서 미안해하지 않고 '당당하게 아프기'를 갈구한다. 나의 있는 그대로가 '그 자체'이길 원한다. 내 존재나 내 상태를 누차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  '건강한 몸'이 기본값인 사회가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도록 좋은 싸움을 이어나가고 싶다. 하지만 실제로 '당당하게 아프기'란 현실에선 얼마나 또 어려운 것인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사람들의 배려에 내성이 생기지 않을 만큼만 아파야 한다는 심리적인 압박, 나의 아토피를 상쇄할 만큼 다른 능력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콤플렉스와 한 끗 차이인 '자기 증명의 욕구' 사이에서 늘 줄타기를 하는 느낌이다. 나도 내 몸 상태를 이겨내 보려고 애쓰고 싶지 않다. 건강한 몸을 가진 이들처럼 내 몸을, 내 피부를 이물 감 없이 투명하게 느끼고 싶다. 나의 질환 때문에 내가 일하고, 먹고, 입고, 바르고, 자는 모든 것들을 제한받고 싶지 않다.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 내 상태에 대해 일일이 설명을 요구받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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