닝보(宁波) 지역연구 2일차 (1)
닝보에서의 둘째 날 아침. 오늘은 아침부터 기차를 타고 샤오싱(绍兴)으로 건너가야 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방 안을 어둡게 덮고 있던 암막 커튼을 걷어내자 창 밖은 안개와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은 아침이다. 어젯밤의 화려한 야경은 온 데 간 데 없다. 외출 채비를 하고 닝보 기차역으로 향한다. 상하이에서 미리 기차표 발권을 해둔 덕에 평소보단 좀 여유로울 수 있었다.
40분 정도 기차를 타고 이동하여 소흥북역(绍兴北站)에 도착했다. 잔뜩 흐린 닝보의 날씨를 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샤오싱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본래 오후 4시쯤 닝보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끊어놨었는데, 날씨를 보아하니 샤오싱에 오래 머물러봤자 애매해질 것 같아 기차표 시간을 바꿔 재발권했다. 택시 정거장에서 우산을 쓰고 줄을 서고 있자니 조금 우울해졌다.
샤오싱에서 가기로 한 곳은 안창고진(安昌古镇)이라는 수향마을. 식당이나 찻집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거의 바깥에서 구경하게 되어 있는 곳이라 비 오는 날씨가 반갑지 않았던 탓이다. 원래 날씨에 따라 감정 기복이 좀 있는 편이긴 한데, 돌아다니는 데 장애가 될까 걱정이 배가되었다. 하지만 어쩌랴, 既来之,则安之.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일단 택시를 타고 목적지로 향한다.
안창고진 입구에 도착했다. 비 오는 날씨에 중국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우비를 한국에서도 거의 입지 않는지라 우비를 입고 다니는 중국인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여러 곳으로 지역연구를 다니다 보니 우비가 꽤 편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듦새는 값에 따라(!, 너무 싼 걸 사면 단추와 함께 옷이 뜯어질 수 있다) 천차만별이지만, 적당한 우비를 사서 입으면 두 손이 자유로워지고 생각보다 방수효과도 좋다. 오늘 나는 우비가 없으니 일단 우산에 의지하여 다녀야 한다. 비를 맞으면 안 되는 카메라는 가방 안에 넣고, 오늘은 어쩔 수 없이 휴대전화 카메라를 써야겠다.
안창고진(安昌古镇)은 중국 강남지방에 생긴 첫 수향마을 중 한 곳이라고 한다. 샤오싱의 4대 수향마을 중 하나로, 북송 때 만들어진 뒤에 수차례 전란으로 불타버렸는데, 명청대에 다시 조성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관직이 없이 관료 뒤에서 비서처럼 일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스예(师爷)가 가장 많이 있었던 지역이라, 관련 박물관도 있다. 가운데에 물이 흐르고 물의 양 옆으로 주택가와 상가가 있는, 전형적인 수향마을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입구부터 상가벽에 안창고진 그림이 그려져 있어 기대감을 한층 높인다.
안창고진의 특색 중 하나는 양쪽 수변을 이어주는 크고 작은 다리들이다. 때로는 아치형, 때로는 직선형, 때로는 정자형 등 다양한 형태의 다리가 우리를 반겨주는데, 총 17개의 다리가 있다고 한다. 예부터 "푸른 물이 거리의 수많은 집들을 관통하고, 무지개는 강의 17개 다리를 넘어가네(碧水贯街千万居,彩虹跨河十七桥)"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17개의 크고 작은 다리는 이곳의 특색이 되었다. 17개 다리 중 복록(福禄), 여의(如意), 만안(万安)이라는 이름의 다리는 특히 유명해서, 이곳의 여자들이 결혼할 때 이 세 개의 다리는 꼭 건너가야 했다고 한다. 아마 이름이 가진 의미 때문이겠지.
이곳의 또 다른 특색은 먹거리다. 고진을 돌아다니다 보니 상점에 말린 라창(腊肠, 중국식 소시지인데 우리가 아는 소시지랑 맛이 전혀 다르다)과 말린 비둘기, 말린 거위 등 염장하여 말린 식재료가 진열되어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곳은 특히 라창으로 유명하며, 간장도 잘 만든다고 한다. 실제로 간장 항아리가 잔뜩 있는 인창장유(仁昌酱油)라는 곳도 있었다. 현재까지도 전통 방식으로 간장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점심시간이 되어 고진 안에 있는 한 식당에 들어갔다. 이커우웨이 식당(一口味菜馆)이라는 곳이었는데, 그래도 고진 안에서는 평이 그나마 좋았다. 라창이 유명한 곳이라고 하니 하나 시키고, 토마토에 생선살을 함께 졸여낸 음식과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돼지고기 볶음을 시켰다. 유명하다고 해서 시키긴 했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라창의 그 중국 소시지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 터라, 많이 남겼던 기억이 있다.
점심을 마치고 강변을 따라 끝까지 걸어보았다. 입구에 가까운 곳에는 식당이나 찻집이 보였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사람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주택 구역이 많이 보였고, 습한 날씨 탓에 곰팡이가 잔뜩 슬어 있는 전통 가옥들을 볼 수 있었다. 돌계단이 강 아래까지 이어져 있는 것으로 봐선 이전엔 빨래 등에 쓸 생활용수를 강물을 길어 사용할 가능성도 있을 것 같았다. 이곳에선 수상 혼례도 전통 중 하나라고 하는데, 물이 이곳 사람들에겐 관광 요소가 아니라 삶의 일부임을 알 수 있었다.
안개비 내리는 거리를 따라 쭉 걷다 보니 기차 타러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샤오싱에 도착했을 땐 날씨 때문에 우울했지만, 막상 구경을 마치고 나니 이렇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가 이런 수향 마을 구경에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진 찍을 땐 좀 불편했지만 말이다. <안개비연가(情深深雨蒙蒙)>라는 중국 드라마의 제목처럼, 안개비 속 안창고진을 거닐고 있다 보니 나름대로 몽환적으로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진에 왔다면 메인 스트리트 옆으로 난 작은 샛길을 따라 걸어보자. 꽤 운치 있는 풍경이 우리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자, 그럼 다시 닝보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