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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이드는창가 Jan 25. 2023

책 덕후라면 이 정돈 되어야지

닝보(宁波) 지역연구 2일차 (2)

책 덕후라면 이 정돈 되어야지, 천일각(天一阁)


명나라 때 한 책 덕후가 살았다. 책을 읽는 것도, 소장하는 것도 매우 좋아했던 이 덕후님은 재산을 일정 정도가지고 은퇴하게 되자 자신의 보물단지인 책을 진열해둘 개인 서고를 만들 결심을 한다. 살던 집의 동쪽에 장서루를 짓고 그 이름을 천일각이라 명하는데, 처음 이곳에 놓여진 책의 권수가 칠만여 권에 달한다 한다. 이 책 덕후님의 이름이 범흠(范钦)이고, 아래 사진 속 인물이다.



그는 책을 정말 사랑했는데 관직도 높아 중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진귀한 책을 모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어렵게 모은 책들을 정말 애지중지 아꼈다 한다. 온습도 조절 및 방화 조치 철저는 물론이고, 이곳 서고에 타인은 개인적으로 들어올 수 없게 한다거나, 술에 취한 자는 들어올 수 없게 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그는 자신의 장서를 최대한 지켰다. 심지어 자녀들에게도 "내가 죽으면 내 재산을 선택할래, 아니면 이 장서루와 책들을 선택할래?"라는 운명의 선택지를 건넸다 하니, 이 덕후는 찐이다.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서면서, 또 닝보가 영국군에 함락당하고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면서, 심지어는 태풍까지도 이 서고의 책들을 가만 놔두질 않아 중간에 여러 번 책이 유실되거나 도난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긴 했지만, 범흠의 후손과 중국 정부, 책방 주인들(!)의 처절한 노력 끝에 없어진 책들을 최대한 찾아냈고, 현재는 30만 권에 달하는 장서가 있다고 전해진다.



샤오싱에서 닝보로 기차를 타고 돌아와 바로 향한 곳이 이 책 덕후 범흠님의 개인 서고, 천일각(天一阁)이다. 현존하는 개인 서고 중 가장 오래된 곳이라는 이곳은 장서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남 원림 스타일로 정원도 꾸며져 있어 풍경도 즐길 수가 있다. 입장료는 30 위안이었다.



천일각에 도착하니 비가 더 거세게 오기 시작해서 멋진 풍경이나 건축 양식을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고즈넉한 분위기는 느낄 수가 있었다. 서재 하나를 짓는 데도 정원에 조경에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을 신경써야 한다니! 옛날 사람들은 참 피곤했겠다 싶다.



신기했던 것은 여기 마작 관련 전시관이 있다는 거였다. 찾아보니 이곳이 마작을 만든 천위먼(陈鱼门)의 가족 사당이 있는 곳이라, 여기에 그의 생애와 마작에 대해 다루는 전시관을 만든 것. 이곳을 마작의 기원지라고 판단했는지, 이름도 마작 기원지 진열관(麻将起源地陈列馆)이다. 전시관을 들어가는 길조차 마작 패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재미있었다.



라오와이탄에서 술 한 잔


책 덕후의 개인 서고라서 나름 기대하고 갔건만, 날씨가 너무 궂어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나왔다. 다음날 저녁 상하이에서 서법 수업이 있어 오전 기차로 상하이로 돌아가기로 했기 때문에, 사실상 닝보에서의 일정은 오늘 저녁이 끝. 중국 음식(아마도 라창?)에 질린 일행과 저녁으로 간단하게 한식을 먹고, 다시 라오와이탄으로 향했다. 작은 펍(小酒馆)에서 간단히 한 잔 하며 닝보, 그리고 샤오싱에서의 이틀을 갈무리한다.




닝보만의 매력은 어떤 것이었을까


상하이보다 남쪽에 위치한 해안도시 닝보. 화동, 개항 도시, 해안 인접도시라는 점 및 지형 등 여러모로 상하이와 조건이 비슷했다. 특히 닝보의 와이탄은 상하이의 그것보다 20년이나 일러 라오와이탄(老外滩)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화함과 발전 정도를 따지자면 닝보는 상하이보다 한참 못 미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도시가 주는 전체적인 느낌이, 늦게나마 상하이처럼 되어 보려고 안간힘을 쓰며 상하이와 비슷한 면을 계속 강조하는 느낌이었다. 라오와이탄도 그렇고, 상하이의 예원이나 신톈디를 모티브로 한 듯한 난탕라오졔(南塘老街)도 그랬다.


자기만의 매력을 알지 못하면 초조해진다. 왠지 모르게 조급해지고 조바심이 난다. 그리고 그것이 심해지면 타인에게 불친절한 모습으로 구현된다. 내가 느끼기엔 닝보가 그랬다. 택시기사는 손님을 태우고 한숨을 푹-푹 쉬고, 식당에 종업원은 많은데 손님의 부름에 응하는 사람은 없고, 주문은 안 들어가 음식도 늦게 나오고. 이런 모습들이 닝보의 전체적인 인상을 깎아먹었다.


오히려 닝보에서 고속철을 타고 이동해서 돌아본 샤오싱의 수향마을 안창고진(安昌古镇)이 나는 더 좋았다. 비는 왔지만 운치 있었고, 다른 수향마을에 비해 상업화가 덜 되어 그 특색이 보였다. 주거지와 공존하여 생활감이 있는 것도 좋았다. 자신의 매력을 잘 알고 살린 셈이다.


닝보만의 매력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쉽게도 나는 2박 3일 동안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쩌면 비가 많이 와서, 혹은 내가 갔던 식당이 딱 그정도밖에 안 되는 식당이어서였을 수도 있다. 아니, 그랬길 바란다. 닝보가 가진 진짜 매력을, 닝보를 방문하는 다른 분들은 부디 느낄 수 있길 바라며. 짧았던 닝보의 기록을 마친다.



[닝보 2·3일차 일정]


[중문 일기 in 위챗 모멘트(朋友圈)]

(譯) 닝보/샤오싱 여행기! 난탕라오졔-위에후 공원-구러우-라오와이탄-샤오싱의 안창고진-천일각-톈펑타를 본 2박 3일. 닝보라는 도시가 주는 인상은 음.. 성적이 안 좋은 학생이 얼른 좋은 성적을 받으려고 벼락치기하는 느낌? 닝보 라오와이탄이 상하이 와이탄보다 20년이나 이르다는데, 지금의 발전 정도는 상하이에 완전 못미친다. 난탕라오졔는 좀 가짜 느낌이 강했고, 특색 있다고 느껴진 건 유일하게 구러우. 중국과 서양식 건축의 결합. 반나절을 샤오싱 안창고진에 가도록 계획했는데, 이렇게 하길 정말 잘했다. 보슬비가 내려 구쩐이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졌고 느낌 있었다. 게다가 상업화도 덜 되어서 인간적인 느낌이 들었다. 닝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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