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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 Aug 19. 2020

시어머님의 말씀과  내 결심

워킹맘과 도우미육아8

지난번 아이를 돌봐주실 입주식 이모님을 구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는데요...

 '어디까지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컸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던 이유는 타인에게는 평화롭고 여유로운(?) 육아로 보였을지 모르나 도우미 이모님과 육아 속 수많은 사연과 제 고군분투를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비슷한 육아를 하시는 분들에게 "저도 그랬어요. 이모님이 키워준다고 죄책감 갖지 말아요. 이런 이모님도 있고, 저런 이모님도 있더라고요. 그래도 우리가 밖에서 열심히 일하면 아이들도 자랑스러워해요"라는 메시지로 응원을 드리고 싶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화병'을 글로서 치유하고자 했습니다. 웬 화병이냐고요? 몸이 아파 병원에 가도 증상이 나오지 않지만 한의원에서 '화병'이라는 진단을 해주시더라고요. 이 시리즈 마지막쯤 나옵니다.

'어디까지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결론은 '할 수 있을 만큼 다 써본다'로 냈습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이번 편에서는 입주식 이모님과의 생활,

'낳기만 해라 키워주마'했던 시어머님의 어떤 말씀과 제 결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할 수 있을 만큼 다' 이야기해보렵니다.


입주식 이모님을 모시다

출근 2주 전, 생판 모르는 이모님과 생활을 시작합니다.

3년 연애하던 남자와 죽고 못살아 결혼해서 살아가며 서로를 맞춰내기도 힘들었는데...

아이 둘을 낳고 생판 모르는 남과 함께 살아가며 맞추기란...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 어떻게 했지?' 싶기도 합니다.

결혼도 처음, 엄마도 처음, 육아 도우미도 처음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런 사전 정보들을 가르쳐드렸습니다.

☞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 위치와 픽업 장소

☞ 아이들이 주로 먹는 음식, 동네의 마트 위치

☞ 아이들 재우는 방법, 재우는 시간 등

☞ 아이들과 놀아주는 방법, 주로 읽어주셨으면 하는 책

☞ 응급상황 발생 시 대처 방법

☞ 아이들에게 길러주셨으면 하는 습관과 주의사항

☞ 아이들 기저귀 가는 법, 로션 발라주는 법

☞ 아이들 대할 때 주의사항 등...

☞ 세탁 방법(아이들 세탁기가 어른용 세탁기가 달라 사용 방법 등 설명해드렸습니다)

☞ 집안 살림 주요 위치 등...

이 외에도 첫째는 새벽 6시 30분이면 일어나는 아침형, 둘째는 8시까지 푹 자는 잠자는 공주형...

첫째는 육식을 즐기고 그래도 먹는 채소는 브로콜리, 콩, 토마토...

둘째는 다 잘 먹는데 간을 약하게 한 음식을 좋아한다. 옥수수를 특히 좋아하지만 여자 아이기 때문에 너무 많이는 먹이지 말아 달라... 배가 아플 때는 이런 음식(설익은 바나나, '백초'약) 아이 컨디션이 안 좋을 땐 이런 음식을 주시고, 애가 탈이 나면 2년 숙성된 매실액을 따뜻한 물에 희석해 주시라...

둘 다 어리고, 기저귀를 떼지 못하고 있었던 터라 이것저것 가르쳐드릴 것이 많았었습니다.

이 시기가 많이 불편한 시기인데요. 낯선 분과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 우리 집인데도 눈치 보이고, 어찌해야 할지 모릅니다. 일하러 가기 전 좀 쉬었다 나가고 싶지만 아이들과 잘 맞는지, 어떤 식으로 살림하시는지 등을 지켜보고 맞춰나가야 하기 때문에 지금도 이모님을 구하고 맞추는 시간이 제일 힘듭니다.

좀 누워있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요. 이건 제 성격 탓이기도 합니다. 도우미 이모님들도 이 시간이 가장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이모님들이 가장 선호하는 집은 맞벌이 집입니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보내 놓으면 혼자 계실 수 있으니 눈치 볼 것도 없고요.


시어머님의 전화

첫 도우미 이모님을 모신 지 1주일이 지났을 때,

며느리가 경력단절 3년 만에 일을 나간다니...

처음에는 '설마' 하셨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도우미 이모님이 오셨다 하니 전화가 오셨습니다.

시어머니 : "도우미 이모님은 어떠냐?"

나          : "처음이라 정신없어요. 아이들도 남자, 여자아이인 데다 서로 좋아하는 것도 다르고, 먹는 것, 입는 것, 취향, 습관도 다 달라서 아이들 어떤지 이야기해드리느라 바빠요. 어머니

시어머니 : "아들, 딸 어린데 엄마가 일 나간다니 애들이 고생이구나"

나           : (이건 무슨 말씀이시지? )

시어머니 : "엄마가 나가서 얼마나 번다고 남의 손에 애들 맡겨서 고생시키는지 모르겠다~ 돈은 많이 주니? 호호호"

이모님이 혹시 전화 통화내용 들으실까 베란다로 나와 혼자 통화를 하다가 '울컥'했습니다.

늘 제게 '본인 딸 같다' 하실때마다 '절대 딸이 될 수 없다'는 걸 많이 느꼈는데요. 

어린아이 둘을 도우미 이모님께 맡겨두고(남의 손에 맡겨두고) 저 혼자 부귀영화라 누리러 경력단절녀를 탈출한다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리고 "얼.마.나 번다고 아이들이 고생이다" 이 말씀에 제 전투력이 엄청나게 상승했습니다.

얼.마.나 벌긴요. 프리랜서라 4대 보헙은 안되지만 대기업 다니는 6년 차 아드님보다 통장 입금액은 많았는걸요..

이 날, 저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어렵게 대학원까지 공부하고 치열하게 경쟁했는데요. 낳지 못할 거라는 아이 둘을 낳아 3년 만에 경력단절에서 벗어났는데요. '고생한다', '대견하다'가 아닌 아이들 남의 손에 맡겨 내 꿈을 펼치러 가는 엄마로 매도하는 같은 여자로서의 시어머니...

10년 넘게 워킹맘이셨던 분 입에서 나오는 말씀인가 귀를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그날 저는 결심합니다.

'꼭 보란 듯이 아이들 잘 키우고,

부자가 되리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경단녀 탈출을 결심한 이유'

사실, 제가 경단녀에서 재취업을 결심한 것은 '남편으로부터의 경제적 독립'이었습니다. 대학원 시절 학기 방학 중 결혼했고, 회사 생활 3년 하다가 아이를 어렵게 낳고 '잠시 아이를 돌보자'생각으로 시작한 육아휴직이 #연년생 으로 아이가 생기면서 #경단녀 가 되었지요. 아이 둘을 키우면서 어느 가정이나 그러하듯 저희 부부도 육아 문제로 많이 다투었습니다. 아이 둘 키우며 녹초가 되는 저. 늘 야근하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 주변에 친정, 시댁은 물론 자매들도 모두 떨어져 살고 지내니 잠시라도 도움받을 곳이 없었기에 우리 부부의 싸움은 횟수가 잦았었습니다.

제가 아이 둘을 낳고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제 스스로의 자아실현도 중요했지만, 결정적으로 제가 재취업 준비를 결심하고 2~3시간 쪽잠 자면서 공부했던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는 결혼도 일찍 했지만 결혼 후 바로 대출을 최대로 받아 서울에 아파트를 샀습니다.

저희 첫 보금자리였고, 그곳에서 아이 둘을 낳았지요.

어느 날 남편이 이야기합니다.


"동생 내외(제게는 아가씨) 우리 아파트 옆 동으로 전세를 구했다네. 다음 달쯤 온대"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아가씨가 우리 아파트 바로 옆 동으로 다음 달 이사 오는데 나한테 지금 이야기를 한다??' 또 다투었습니다. 남편도 안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합니다. '알자마자 나한테 제일 먼저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다음날 지방에서 시부모님이 저희 집에 올라오셨어요. 그러니 그쯤 이야기를 저한테 한 거겠죠.(지금 생각해도 괘씸하네요)

아가씨가 다음 달 이사 온 다시며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희 집에 책도 많으니 우리 윤주(아가씨 아기 익명)랑 같이 보고, 너 이유식도 잘 만들잖아~ 우리 딸은 채썰기 너무 어렵데. 네가 현이(우리 딸 익명) 이유식 만들 때 윤주 것까지 많이 만들어줘라."

이럴 때는 가족이 됩니다.

제가 뭔가 해야 할 타이밍이 생길 때는요...

제가 그렇게 챙겨야 할 가족이 우리 집 옆 동으로 다음 달 이사 오는 걸 저만 몰랐는데요...

저는 아이 둘 연년생 맘이고 아가씨네 아이는 저희 둘째랑 나이가 같은 딸 하나 입니다. 우리 첫째 겨우 밥 먹이며 둘째 이유식을 만들어주는데 저보고 아가씨 딸 이유식까지 같이 만들면 되겠다는 어머님의 말씀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어이가 없습니다. 더 화가 나는 건 제가 그때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저는 남편에게 이혼장을 내밉니다.

결혼 생활 동안 참 많은 사연들이 다들 있었지만...

그 당시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이 처음에는 믿겨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소득도 없는 연년생 맘이 이혼을 하자니 우스웠겠지요.


"당신이 당신 집에서 착한 아들이라는 것도,

좋은 오빠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이제 나랑 가정을 만들었고 아이 둘을 낳았어. 가족이라며 나를 종 부리듯 하면서 이럴 때는 쏙 빼놓는 거 당신이 잘못하는 거야.

선택해.

당신이 낳아 자란 가정과 당신이 만든 우리 가정. 

아가씨 우리 옆 동으로 이사 오는 거 못 막으면 난 당신이랑 이혼할 거야."

(뭐 이런 일로 이혼하냐? 하지 마시죠. 부부란 그런 거잖아요. 다들 그렇게 살고 계시잖아요. 수많은 시간과 사연들이 쌓여서 이런 거니까요. 부부끼리만 아는 거니까요.)


결국, 아가씨는 다른 곳으로 이사 갔습니다.

저는 그 일이 있고 칼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으로부터의 경제적 독립'을 이루기 위한 재취업 전선에 뛰어든 것이죠.


아차, 너무 깊은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과정이 있는 후 재취업에 성공했고, 이모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을 시작할 때 시어머님의 "얼마나 번다고..."에 제가 그토록 파르르 떨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드디어 저는 멋진 워킹맘으로의 변신을 위해 아이 둘을 입주식 이모님께 맡기고 출근을 시작합니다.


내가 이렇게 어려운 일을 했던가?

4살 2살 아이들과 집에만 있다가 사회에 나와 어른들을 상대하니 적응이 쉽지 않았습니다. 뭔가 반응도 느리고, 상대방이 이야기를 했을 때 받아치는 능력도 현저하게 떨어졌습니다.  저는 TV도 잘 안 보기때문에 최신 유행어도 잘 모르거니와 줄임말도 못 알아들어서 다들 웃는데 저만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 unsplash

저는 프로젝트 단위로 계약했습니다. 프로젝트 기간 동안 데이터 분석 및 고객과 약속한 산출물을 만들어 내야 했습니다. 데이터 분석 코팅 화면을 보고 있는데... '와... 내가 이렇게 어려운 일을 했었나?' 머리가 핑핑 돌았습니다.

"처음에는 힘드시겠지만, 차차 적응하시게 되면 이전에 했던 일들이 다 기억나고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제게 프리랜서를 권해주셨던 팀장님이 프로젝트 은행에 찾아와 힘을 주셨습니다. 이 팀장님은 나중에도 여러모로 제 인생에서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세요. '사람의 인연과 첫인상'이라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한 분이시기도 합니다. 제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성실함과 노력하는 모습뿐이라는 생각으로 늘 일찍 출근하고 늦게 남아 업무를 파악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재취업을 위해 영어 학원에 갔던 경험이 열심히 일하는데 많은 동기부여가 되었습니다. 저보다 10살 어리고 똑똑한 친구들도 취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경단녀 3년차였던 제가 다시 복귀해서 일하고, 3년 경력을 모두 인정받아 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힘들다, 피곤하다, 일이 너무 어렵다' 등의 불평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일을 잘 해내고 싶었어요. 하지만 생각만큼 빠르게 업무가 늘지 않아 자책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성실하게 하나의 프로젝트를 마치고 제가 갑자기 부동산 재테크 공부를 시작하게 됩니다.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 시점. 그때는 몰랐었지만요. 다음 편에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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