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브랜드가 공예에 주목하는 이유
스페인 럭셔리 브랜드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Jonathan Anderson이 2016년 론칭한 로에베 재단 공예상Loewe Craft Prize은 매년 현대 공예의 탁월함과 예술성, 독창성을 기린다. 올해는 7명의 한국 공예가들이 파이널리스트로 선정된 가운데 최종 후보작 30점이 7월 한 달간 서울공예박물관을 방문할 예정으로 눈길을 모은다.
(작품 설명. 왼쪽 위부터 순서대로)
1. 말총으로 빗살무늬 토기 형태를 엮은 정다혜 작가의 ‘A Time of Sincerity(성실의 시간)’.
2. 정명택 작가의 ‘Dumbung-jucho(덤벙주초)’는 주춧돌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걸터앉을 수 있는 가구다.
3. 김준수 작가의 ‘Sense of Forest(숲의 감각)’는 식물성 태닝 가죽을 한 줄 한 줄 붙이고 옻칠로 마감한 작품이다.
4. 몽환적인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정소윤 작가의 ‘Someone Is Praying for You (누군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5. 레이저 커팅과 미세 용접 등 현대 기술을 가미해 완성한 정용진 작가의 ‘Wavy Inverted Bowl(물결 모양의 거꾸로 된 그릇)’.
6. 분청 기법의 대가 허상욱의 ‘Vessel with Plantain Surface Decoration(파초가 그려진 화병)’. 표면에 은을 입혀 은은한 광택을 연출했다.
7. 김민욱 작가의‘Instinctive(본능적)’. 수분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팽창하고 수축하는 나무의 특성을 작품에 표현했다.
일상의 모든 것들이 빠르게 디지털로 개편되는 것은 아트 마켓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버추얼 투어는 물론이거니와 NFT를 사고 팔거나 메타버스 공간으로 접속해 전시를 둘러보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선 가속화되는 디지털 세계에 대한 반대급부 현상으로 손의 흔적을 쫓는 공예와 크래프트맨십을 향한 예찬이 지속되고 있다. 로에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은 “공예는 로에베의 본질이다. 패션 하우스로서 로에베는 가장 순수한 공예를 추구하고자 한다. 로에베의 현대성이 발현되는 곳이 바로 공예이며, 앞으로도 늘 로에베는 공예와의 관련성을 가질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2016년 로에베 재단 공예상을 론칭한 바 있다. 그 일환으로 올해 7월 1일부터 30일까지 서울공예박물관에서 파이널리스트 작품 30점이 전시된다는 반가운 소식에 전세계 공예인들의 시선이 한국으로 쏠리는 중이다.
최근 몇 년간 한국 공예는 꾸준히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공예 주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는 물론,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이면 선보이는 ‘밀라노 한국공예전’, 파리장식미술관에서 2015년 열린 <코리아 나우> 등 국제 무대에서도 한국 공예는 좋은 반응을 이어갔다. 국립현대미술관도 이제껏 미술의 메인 장르에서 소외되었던 공예에 관심을 기울이며 전시를 개최하는가 하면, 지난해 문을 연 서울공예박물관도 공예라는 파이를 키우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로에베 재단 공예상에 이름을 올리며 두각을 드러내는 국내 공예가들이 많아진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모든 것은 로에베 재단이 차기 전시 장소로 한국을 지목한 것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2017년 첫 회 파이널리스트로 배세진 도예가를 배출한 이래, 이듬해에는 정해조·장연순·김준용 작가의 작품이 런던 디자인 뮤지엄에서 선보였고, 2019년에는 29명의 수상자 중 이영순·고희승·손계연·김민희 작가가 도쿄 소게츠 재단에서 전시했다. 한편 2021년에는 코로나19의 여파로 파리 장식미술관이 VR 전시로 대체되면서 그해 수상자였던 강석근·김계옥·김혜정·박성열·이지용·조성호 작가의 작품을 버추얼 투어로 감상하며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한편 올해는 김준수·김민욱·정다혜·정명택·정소윤·정용진·하상욱 등 총 7명의 공예가가 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면서 기대를 모으는 중이다.
한국이 이처럼 공예 강국으로 알려지게 된 데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작업에 매진하는 공예가들과 정부 기관을 비롯해 민간 전문가의 기여도 간과할 수 없다. 이번 해에는 전문가 패널로 조혜영 큐레이터와 지난해 파이널리스트였던 이지용 유리 공예가가, 심사위원에는 김홍남 국립중앙박물관 전 관장이 참여해 활동 중이다. 전문가 패널이 1차적으로 탁월성, 새로움, 혁신, 예술적 비전을 가치에 두고 116개국 3100개의 작품 중 30명의 후보자를 추렸고 심사위원단은 서울공예박물관에서 6월 30일 개막식날 단 한 명의 위너를 발표한다. 이번 전문가 패널의 사무총장 아나수 자발베아스코아 Anatxu Zabalbeascoa는 “전 분야의 공예를 망라해 다룸으로써 로에베 재단 공예상이 추구하는 다양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가장 높은 수준의 공예는 시간을 초월하면서도 견고한 뿌리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국제적 차원에서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로에베 재단 공예상은 럭셔리 브랜드가 마케팅의 일환으로 펼치는 이벤트라고 넘겨 짚어서는 곤란하다. 그렇다고 해서 쟁쟁한 파이널리스트 가운데 위너라는 옥석을 가르려는 시도라고 보는 것도 너무 좁은 해석이다. 로에베 재단 공예상은 이제 공예가들이 최고의 기량으로 펼쳐내는 아름다운 공예의 향연으로 전세계인들을 초대하는 자리가 되었다.
*본 글은 월간 <디자인> 2022년 7월호에 실린 기사의 원본입니다.
로에베 재단이 7월 1일부터 30일까지 서울공예박물관에서 〈2022 로에베 공예상〉전을 열었다. 결승 진출작 30점을 전시한 가운데 로에베 재단은 500년 동안 전승된 말총 공예 기법을 현대적으로 변용한 정다혜 작가를 최종 우승자로 선정했다.
부르노 무나리는 일찍이 예술과 디자인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술가는 자기 자신이나 특정 엘리트를 위해 주관적으로 일하는 반면, 디자이너는 다수의 공동체를 위해 실용적인 감각을 가지고 (생산을 목적으로 하기에) 그룹으로 일한다.” 여기서 공예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주관적으로 작품 세계를 구축하면서도 다수를 위한 쓰임을 고민하니 예술과 디자인 그 중간 어디쯤일 듯하다.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 시스템의 도입과 함께 설계와 제작 단계가 분리되면서 디자인의 개념이 태동했는데, 그 이전까지 공예품은 생활 도구이자 시대별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던 오브제로 일상 속에 존재했다.
오늘날 공예 전시가 심미적 감상의 차원으로 흐르는 현상을 경계하며 공예의 본질인 쓰임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스페인 럭셔리 브랜드 로에베는 로에베재단 공예상이 제정된 2016년부터 지금까지 예술의 초월적 경지에 이른 공예에 주목하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너선 앤더슨이 제정한 로에베재단 공예상은 현대 공예의 탁월함, 예술성, 독창성을 기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실 크래프트맨십이 럭셔리 브랜드의 헤리티지로 대우받은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로에베는 ‘한 땀 한 땀 장인이 꿰맨’이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클리셰를 고가의 가방을 통해 보여주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공예를 찬미하지 않는다. 공예 작가를 지원하고 작품 활동을 장려하는 시상 제도를 운영하는 것은 여타 브랜드와 분명히 구별되는 지속 가능한 행보다.〈2022 로에베 공예상〉전은 이런 로에베의 철학을 직관적으로 드러냈다.
서울공예박물관 1층에 마련한 이번 전시는 특별한 기교 없이 담백한 구성으로 작품에 오롯이 집중하도록 유도한 연출이 돋보였다. 올해 결선 진출자 30명 중 최종 우승자로 선정된 정다혜 작가의 ‘성실의 시간(A Time of Sincerity)’은 한국에서 고사 직전인 말총으로 갓을 만드는 공예 기법으로 제작한 빗살무늬 토기 형태의 바구니로 심사위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제주에서 태어나 조소와 전통 섬유 공예를 공부한 작가는 500년 동안 지역에서 전승된 말총 공예를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길을 찾았던 것이다. 말의 꼬리털을 한 가닥씩 조밀하게 연결한 작품에서,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쓴 갓의 한 종류인 사방관의 마름모꼴 무늬를 아름다운 패턴으로 재현한 디테일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말총이 견고하게 형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서로 엮이는 밀도와 기울기, 재료의 굵기 등 수많은 샘플 제작 실험을 거쳤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흘러간 각각의 순간이 모여 성실을 증명하는 완성의 시간이 되었다. 공예가 디자인의 오래된 미래라고 할 때, ‘성실의 시간’은 느리고 무해하게 500년을 훌쩍 넘어 우리 앞에 당도했다. craftprize.loewe.com
“조선 갓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특질을 내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성에 담아 표현했다. 혼자서 작업하지만 말총 공예에 담긴 긴 시간성과 줄곧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수상으로 한국이 500년간 지켜온 말총 공예 분야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듯해 기쁘다.”
(로에베재단공예상 위너 정다혜 공예가)
““정다혜 작가는 전통 기법과 방식을 사용해 좀 더 새롭고 진보적인 것을 만들었다. 로에베재단 공예상은 지난 5년 동안 공예뿐 아니라 예술에 몸담은 크리에이터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상식 중 하나로 거듭났다. 로에베재단 공예상 수상은 작가의 성장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심사위원 나오토 후카사와)
인터뷰
데얀 수직(전 런던 디자인 뮤지엄 관장)
이번 최종 결승작에 대한 평가를 해달라.
정다혜 작가의 작품은 극도로 아름다우면서 기술집약적이다. 한국의 전통 공예를 되돌아보게 하면서도 시간을 완벽하게 초월한 것처럼 보인다. 30명의 결승 진출자 중에서 일부는 완벽하게 색다른 방식으로 전통을 재현했지만 그들 역시 최종 결승자로 정다혜 작가가 뽑힐 만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디자인과 공예의 경계가 점차 흐려지고 있는 최근의 현상을 어떻게 보나?
디자이너와 공예가는 모두 신기술의 영향을 받으면서 독자적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올해 로에베재단 공예상 결승 진출작 중 3D 프린팅 등 현대 제조 기술을 적용한 작품도 눈여겨볼 만했다. 공예의 강점과 자신감은 전통 기술의 진본성을 유지하며 스스로를 한정해 가두는 것보다 이런 방식의 실험에서 나온다. 디자인과 공예 모두 형태와 촉감뿐 아니라 사물을 만들어내는 퀄리티와 스킬을 중시한다. 한 분야에서 이룬 성취는 다른 분야에도 필수 불가결하게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디자이너들이 공예에서 배울 만한 점이 있다면?
시계와 카메라부터 책과 타자기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많은 대량생산품이 디지털 혁신을 거치면서 잉여품이 되었다. 〈2022 로에베재단 공예상〉전에서 선보인 30점의 작품은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은 물질에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는 기억과 문화에 형태를 부여하고 기술을 시연하는 역량을 말한다. 디자이너들은 형태를 만드는 측면에서 더 정직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해야 하고 사용성보다는 사물을 왜 만드는지에 대한 의미를 고민해야 한다.
참고자료: 예술가와 디자이너, 부르노 무나리, 양영완 역, 디자인하우스, 2011
*본 글은 월간 <디자인> 2022년 8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