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E #15 - 서울아트북페어 2023 리뷰
올해 15회를 맞은 ‘언리미티드 에디션 - 서울아트북페어(이하 UE15)’는 디자이너들의 명절이라 불릴 정도로 매년 가을이면 열리는 행사로 공고히 자리 잡았다. 2009년 홍대 앞 작은 갤러리에서 제1회 UE가 시작하게 된 이면에는 당시 소규모 그래픽 스튜디오 창업과 독립 출판이 성행하던 분위기가 맞물려 있다. 2008년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그래픽 디자인 생태계 흐름도 변화했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디자인 관련 학과와 전공자 수가 증가하는 추세였지만, 외환 위기의 여파로 취업문이 좁아지면서 대기업이나 디자인 전문회사에 진입하지 못한 디자인 전공생 중 대부분은 졸업을 유예하며 취준생으로 스펙을 쌓거나, 대학원이나 유학으로 진로를 정하거나, 처음부터 취업을 포기하고 스튜디오를 운영하기 시작했다고 오창섭은 분석한다.*
*<우리는 너희가 아니며, 너희는 우리가 아니다>, 오창섭, 999 아카이브, 2016, p. 55~56
https://www.yes24.com/Product/Goods/30667761
이때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디자이너들 입장에서 자신의 포트폴리오 페이지를 멋진 작업물로 채우고 싶지만 마땅한 클라이언트를 찾지 못했다면 시도해볼만 한 것이 자가출판(self-publishing)이었다. 이는 책의 기획부터 글쓰기, 디자인 작업, 인쇄 감리, 유통까지 혼자서 진행하는 방식을 말한다. 유어마인드 이로 대표는 독립출판이 활성화되는 현상을 단순히 대형 출판사에 대한 반발로 보면 곤란하다며 “그저 자기 이야기를 할 매체를 찾고 싶은데 그 매체가 책이었을 뿐”*이라고 선을 긋는다.
* “색깔있고 독특한 취향의 ‘자기표현’ … 독립출판의 부흥”, 경향신문, 2013-11-01 (URL: https://m.khan.co.kr/culture/book/article/201311012035045#c2b)
당시 워크룸 옆 ‘가가린’, 아트선재센터에서 독립해서 별도의 공간을 마련한 ‘더북소사이어티’, ‘유어마인드’, ‘땡스북스’ 등이 서촌, 합정동, 홍대 인근을 중심으로 생겨나면서 독립출판물이 유통될만한 창구가 마련되었다. KT&G 상상마당은 ‘어바웃 북스’라는 독립출판물 전시회를 매년 열기도 했다. 독립서점은 일반 대형서점에서 찾기 힘든 보물 같은 책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책에 관심 있는 디자이너들이 꼭 들려야 할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계간 <그래픽>은 2009년 발간한 10호 주제를 ‘셀프 퍼블리싱’으로 정하고 다음과
같이 기사를 실었다.
한국에서 셀프 퍼블리싱은 젊은이들의 매체다. … 이들이 다루는 콘텐츠는 대부분 출판 시장에서 출판이 불가능한 것이다. 발행 주체가 개인인 경우 D.I.Y의 기본 정신에 근거하면서도, 느슨한 협업체를 형성해 주변 지인과 협업하며, 출판 과정 전부를 대부분 혼자서 실행한다. … 한국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목적성을 제시하면서 지속적으로 출판 작업을 하려는 곳은 아직 많지 않다. 유통 자체가 소규모로 순환되기 때문에 자생할 수 있는 운영 시스템을 구축하기 힘들고 자체 생산력도 떨어지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2008년 이후 독립 출판물을 소개하고, 유통하는 서점이 생겨 기존 출판 시장 외에 틈새 시작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 독립 출판물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이들 서점이 성공적으로 안착할 경우, 한국 셀프 퍼블리싱의 흐름이 다른 차원으로 전개될 여지는 충분하다.*
*계간 <그래픽> Vol. 10, 김광철, 프로파간다, 2009, p. 99
UE는 여러 독립서점에 분산된 독립출판물을 특정 기간 동안 특정 장소에 압축적으로 모아 놓은 기획으로 주목을 끌었다. 지난해 10월, UE를 특집 주제로 다룬 계간 <그래픽> 49호는 “한국 독립, 아트북 출판, 이른바 한국 스몰 프레스의 현주소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행사”*라고 소개했다. 2022년에는 2년 만에 창작자가 독자를 만나는 방식이 재개되었던 만큼**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올해도 그 열기를 이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한 걱정을 뒤로 하고 올해는 220팀이 참여한 가운데 3일 동안 2만 2200여 명이 행사장을 방문한 것으로 집계되면서 성공을 자축하는 분위기다.
*계간 <그래픽> 49호, 프로파간다, 김광철 2022, p. 17
**팬데믹이 시작한 2020년에는 행사가 아예 열리지 않았고, 2021년에는 플랫폼엘에서 유어마인드가 100권의 신작을 엄선해 판매 대행하는 형식으로 열렸다.
지난해까지 나는 관람자 입장에서 UE에 참가했지만 올해는 월간 <디자인> 임프린트 브랜드 '스튜디오마감'이라는 이름으로 <A to Z>* 에디션 2권을 가지고 나갔기에 부스 참가자 입장으로 행사를 지켜볼 수 있었다. UE는 어느덧 15회를 맞으면서 매년 참가하는 낯익은 부스도 많아졌다. 덕분에 올해도 프로파간다, 프로파간다 시네마, 봄알람, 안녕 둔촌 주공아파트, 샌드위치 프레스, 보스토크, 6699 프레스 등 고정적이면서 안정된 팬 층이 있는 부스에는 확연하게 사람들이 몰리는 분위기였다. 관람자들은 규모가 큰 행사 특성상 어떤 콘텐츠를 가지고 나왔는지 찬찬히 각 부스를 훑어보기 보다는 눈에 익숙한 부스를 찾아 다니는 양상을 보였다.
*https://m.blog.naver.com/designpress2016/223258198808
이는 새로운 콘텐츠를 가지고 처음 행사에 출전하는 부스 참가자 입장에서 봤을 때 상당히 부담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결국 부스별로 잘 만들어진 한 권의 책으로 승부를 벌이기 보다는 당장 시선을 잡아 끌 수 있는 특이한 일러스트나, 책보다는 저렴한 굿즈 판매에 목 메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또 해외 참가자를 위한 배려 때문인지 접근성이 좋은 1층 전시실에 해외 부스 위주로 배치한 것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레드 & 블루 컬러로 강렬한 행사 아이덴티티를 디자인하고 이를 전시 디자인과 영리하게 연결했으며, 소셜 미디어 상에 각자의 방식으로 홍보할 수 있도록 포스터 디자인 변형에 대해 열어놓은 부분, 또 행사가 종료된 시각에 부스 참가자들이 다 함께 박수치고 스태프들이 각 부스를 돌아다니며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문화는 다른 곳에서 쉽게 모방할 수 없는 UE만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인 아쉬움이라고 한다면, 좀 더 양질의 ‘디자이너들이 저자(발화자)가 된 출판물’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인아 디자이너의 ‘번갯불 문고’ 시리즈처럼 날카롭게 시대를 파고 드는 디자이너들의 저작물을 많이 소개하는 자리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