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남산 역사트레킹 코스를 기획했을 때가 기억난다. 서울사람들에게 남산은 너무 당연한 곳이다. 너무 당연하다보니 서울 사람들은 굳이 남산을 찾아가지를 않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지방이나 외국여행객들은 서울에 와서 63빌딩, 한강 유람선, 남산타워를 필수적으로 여행한다. 그래서인지 남산 역사트레킹을 행한다고 공지했을 때 이런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남산 뻔하지 않아요? 거기에 트레킹을 할 만한 곳이 있어요?’
그 뻔함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고 열심히 답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연한 곳치고는 꽤 많이 사전답사를 했었다. 그 노력이 통했을까?
*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중심부: 가까이는 북악산이 보이고, 멀리는 북한산이 보인다.
● 목멱대왕 남산
조선시대 남산은 목멱산(木覓山)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었는데 그 외에도 인경산, 종남산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남산은 키가 작은 산이다. 해발 265미터 정도이니 내사산(內四山) 중에서 세 번째로 작은 산이다. 복습해보자. 북악산(340미터), 인왕산(338미터), 남산(265미터), 낙산(125미터) 이중에서 남산이 뒤에서 두 번째다.
그렇게 야트마한 산이지만 남산은 조선시대 때 무척 귀한 대접을 받았었다. 궁궐에서 임금님이 보고 있는 산이라 하여 함부로 건물도 짓지 못하게 하고, 나무도 베지 못하게 했다. 그에 더해 목멱대왕(木覓大王)이라는 벼슬까지 내려진다. 해당 산의 산신령에게 관직을 주며 도성을 방어하라는 뜻이었다. 산신령을 도성방어에 끌어들이다니... 판타지 같은 소리인가? 산을 귀하게 여겼던 우리의 산악신앙은 유교 국가인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당시 북악산도 진국백(鎭國伯)이라는 작위를 받게 된다. 백(伯)이라고 하면 백작이다. 경복궁의 뒷산인 북악산에게는 제후의 작위를 준 것이다. 제후의 서열을 나눈 오등작은 이렇다.
공작 > 후작 > 백작 > 자작 > 남작
북악산의 지위와 비교해보면 ‘왕’ 칭호를 받은 남산이 얼마나 귀하게 대접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소중하게 관리를 한 곳이라 그런지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잘 조성될 수 있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애국가 가사에 나올 정도로 남산의 소나무는 우리민족의 정기를 담아내는 하나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남산의 소나무들은 수난을 당하게 된다. 소나무를 함부로 잘라내고 그 자리에 아카시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이렇듯 남산은 일제강점기 때 엄청난 수난을 당하게 된다. 그 시초는 구한말로 올라간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 정부는 일본인 거류지로 남산 일대를 지정해주는데 궁궐에서 한 치라도 먼 곳을 지정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그렇게 남산 일대는 일본인들이 자리를 잡게 됐고, 결국에는 조선 신궁도 만들어지게 된다.
* 남산의 야경
● 남산에도 둘레길이 있다
자 이제 길을 나서자. 복원된 ‘남산 위의 저 소나무’를 만나러가자. 남산 역사트레킹은 6호선 버티고개역에서부터 시작된다. 버티고개역이라는 명칭에도 나타나있듯이 트레킹팀이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버티고개이다. 버티고개는 그동안 차로로 끊겨져 있다 2012년 5월에 생태통로(생태다리)로 복원되었다. 버티고개와 관련된 이야기는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편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이제 트레킹팀은 국립극장을 앞을 통해 드디어 남산에 들어선다. 이때 트레킹팀 앞을 남산순환버스가 지나가고 있다. 어떤 분이 농담 삼아 이런 말을 하신다.
“저 버스 잡아타고 갈까요? 아니면 케이블카?”
“아니오. 버스나 케이블카보다 더 좋은 남산둘레길을 따라 갈 겁니다!”
그렇다. 남산에도 둘레길이 있다. 2015년 11월에 개통된 남산둘레길이 바로 그곳이다. 기존에 있던 북쪽 순환로와 남쪽 숲길을 연결하여 총 7.5km의 도보여행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북측 순환로는 아스팔트 포장이 된 곳을 걷기에 큰 공원을 걷는 느낌이라면, 남쪽 숲길은 말 그대로 숲길을 걷는 코스다. 서울중심부인 남산에 울창한 숲길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그래서인지 트레킹팀은 이구동성으로 이런 반응을 보였다.
“어, 남산에 이렇게 멋진 숲길이 있었어요? 우리가 아는 남산이 아니었어!”
남산둘레길은 북쪽 순환로 구간보다는 남쪽 숲길 구간이 걷기에도 좋을뿐더러 휴식 공간도 더 넉넉하다. 팔도소나무 단지와 야외식물원 등 볼거리도 풍성하고, 관악산 방면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도 있어서 좋다.
* 성곽과 소나무
● 성곽과 소나무
남산둘레길은 완경사라 초보자들도 어렵지 않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그렇게 한들한들 걷다보면 어느새 정상부에 다다른다. 그리고 앞에 나타난 성곽길을 보며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성곽 앞에 소나무 숲이 펼쳐지는데 그 모습에 감탄사가 나온 것이다.
“남산에 이런 소나무 숲이 있었어요? 성곽하고 소나무하고 너무 잘 어울려요!”
“그렇죠. 여기는 남산이 숨겨놓은 소나무 숲 같아요. 성곽하고 소나무하고 이렇게 잘 어울린답니다.”
성곽 바깥쪽에 소나무를 일정 간격으로 심어 솔밭을 만든 구간이다. 아래쪽에는 맥문동을 심어 운치를 더했다. 맥문동이 개화하는 여름철에 이 소나무 성곽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풍류객으로 변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몇 해 전 여름이었다. 소나기가 지나간 자리를 트레킹팀과 함께 걷고 있었다. 남산도 산이라고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물안개를 머금고 있는 푸른 소나무와 보랏빛을 뽐내고 있는 맥문동꽃, 그리고 그 뒤를 병풍처럼 지키고 있는 성곽이 어우러진 모습이란...! 트레킹팀은 무슨 사극이라도 찍는 느낌이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를 물안개하고 성곽길하고 같이 만나네요.”
“쉿! 강사님 운치 깨지 말고, 쉿!”
그렇다. 풍류를 즐기는 걸 방해하면 안 된다. 분위기 파악을 했어야했는데... 참고로 남산에는 태조 이성계 시대에 쌓은 석성(石城) 구간이 아직 남아있다. 태조 시기 한양도성은 토성(土城)이 70%였고, 석성이 30% 정도였다. 태조 시기에는 자연석을 거의 다듬지 않고 그대로 쌓아올려 성돌이 무척 거칠다. 한양도성이 전부 석성으로 바뀐 시기는 세종 때였다.
* 성곽과 소나무: 비 온 후의 모습
● 국사당과 봉수대
이제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자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국사당은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언급했으니 따로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옛 국사당 자리는 지금 남산 팔각정 자리다. 마치 이곳이 한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국 사람들보다 더 많은 외국인들이 보인다. 남산이 외국인들의 필수 관광 코스임을 다시 한 번 느낀다.
팔각정 옆으로는 복원된 봉수대가 보인다. 경봉수(京烽燧)라고도 불린 남산 봉화는 매일 병조에 보고될 정도로 무척 중요한 통신 수단이었다. 적의 위협에 따라 하나에서 다섯까지 횃불을 올렸는데 정리하면 이렇다.
하나: 이상무
둘: 적이 나타남
셋: 적이 국경에 접근함
넷: 적이 국경을 침범함
다섯: 전투가 벌어짐
* 남산 팔각정: 옛 국사당 자리임.
● 서울 한복판에 제갈공명?
정상부에서 내려온 트레킹팀은 이제 북쪽 순환로를 따라 걷는다. 북쪽 순환로는 폭이 넓어서 좋기는 하지만 흙길이 아니라 걷는 맛이 좀 떨어진다. 이건 필자의 의견이 아니라 트레킹팀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렇게 걷다보면 남산한옥마을로 빠질 수도 있는데 트레킹팀은 와룡묘(臥龍廟)까지 가본다. 와룡묘라고 하니까 이런 질문들이 나온다.
“와룡묘요? 와룡묘라 하면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의 무덤이이에요?”
딩동댕~땡!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와룡이 제갈공명이라는 건 맞는 말이지만 무덤은 아니고 사당이다. 한자를 보시면 무덤묘가 아니라 사당묘(廟)다. 그렇다. 남산의 북서쪽에는 제갈공명을 기리는 와룡묘가 있다. 와룡묘에는 제갈공명과 함께 관운장의 석고상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단군상과 삼성각도 있다. 그러고 보면 와룡묘는 중국의 도교신앙을 한국스타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 서울 한복판에 왜 와룡묘가 있는 것일까? 와룡묘는 고종의 후궁이었던 엄귀비(순헌황귀비)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존의 질서체제가 뿌리째 흔들렸던 구한말, 사람들은 마음 둘 곳을 찾아야했다. 중국의 신령들까지 끌어올 정도로 당시는 다급했던 것이다. 와룡묘는 1924년에 큰 불로 소실됐던 전각들을 1934년에 복구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갈공명은 맹격(盲覡)이 숭상하는 신이다. 맹격은 눈이 먼 무당들을 말한다. 그래서인지 북쪽 순환로에는 눈이 불편한 분들을 자주 뵙는다. 아마도 와룡묘에 치성을 드리러 가시는 분들일 거다.
이렇게 하여 남산 역사트레킹이 종료됐다. 서울사람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남산. 외국인들도 가는 그 길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안 가면 너무 섭섭하지 않은가. 그러니 당연히 가봐야 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