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 스페인 7편>
* 도노스티아-산세바스티안: 아르굴산에서 바라본 시내와 콘차해변
명색히 필자가 역사트레킹 마스터 아닌가? 그래서인지 숲길트레킹을 무척 좋아한다. 겸사겸사 나무에 대한 지식을 넓히겠다고 숲학교에 등록한 적이 있었다.
"세상에 참나무는 없습니다. 딱 이게 참나무라고 찍어서 부를 수 있는 나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 전날에 참나무 장작으로 구운 삼겹살을 먹었는데... 그 말대로 하면 난 존재하지도 않는 나무로 고기를 구웠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말이 맞았다. 참나무라는 종은 없다. 참나무는 특정되는 나무가 아닌 참나무 종류를 모두 아우르는 통칭이다. 그룹을 연상하시면 좋을 듯싶다. 그룹명은 참나무이고, 보컬 갈참나무, 기타 굴참나무, 베이스 상수리나무, 드럼 졸참나무, 키보드 신갈나무, 퍼커션 떡갈나무... 여기서 언급된 여섯 나무를은 이른바 참나무 육형제라고 불린다. 그게 그 나무인 거 같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하기가 쉽지가 않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후였다. 스페인어가 배우고 싶어서 회화책도 사고, 동영상도 찾아보았다.
"세상에 스페인어는 없습니다. 애초에 스페인어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어요."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참나무 때처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동영상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현재 스페인어는 전세계 인구 중 약 5억명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다. 영어를 뛰어넘어 중국어 다음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다. 스페인 본국을 필두로 스페인의 옛 식민지였던 중남미 국가와 아프리카 적도에 있는 적도 기니 등 20개국이 사용을 한다. 참고로 적도 기니(Equatorial Guinea)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1968년에 독립을 한다. 프랑스 식민지였다 1958년에 독립한 기니(Guinea)와는 구별되는 나라다. 적도 기니는 아프리카 주권국 중에서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스페인어는 미국에서도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히스패닉'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실텐데 히스패닉은 미국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주로 중남미 출신자들인데 그 수가 약 5천 만명이 넘는다. 그 수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스페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마당에 스페인어가 없다고 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 도노스티아-산세바스티안: 바스크 이름인 도노스티아와 카스티야어인 산세바스티안이 병기됐다. 그나저나 맨홀 뚜껑이 사각형이다.
서기 711년, 북아프리카에 있던 이슬람 무어인들이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하였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 왕국은 무어인들의 무력 앞에 몰락하고 만다. 이후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불리는 국토회복운동이 1492년에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무려 800년이란 시간이 소요된다. 그 오랜기간 동안 이베리아반도 내에서는 여러 왕국들이 등장한다. 그 왕국들이 자리잡은 지역에서는 해당 지역의 색채가 강하게 묻어있는 언어가 분화, 발전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등장한 언어는 카스티야어,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 바스크어 등이다.
1479년, 이베리아반도 중앙에 위치한 카스티야왕국과 지금의 카탈루냐 지역에 위치한 아라곤왕국이 합쳐져 카스티야-아라곤 공동왕국이 형성된다. 이후 1492년,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었던 그라나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국토회복운동은 종료가 된다. 그해 콜롬버스는 신대륙을 찾아 돛을 올렸다.
스페인이 지금과 같이 통일된 형태를 갖춘 시기는 카를로스 1세(Carlos Ⅰ)가 즉위한 1516년 이후이다.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겸했는데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칼 5세(Karl Ⅴ)로 불렸다. 카를로스 1세의 아들은 그 유명한 펠리페 2세다.
카스티야왕국의 주도로 통일된 스페인왕국이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언어도 카스티야어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스페인이 어떤 나라인가? 그 어떤 유럽 국가들보다도 지역색이 강한 나라가 아니던가? 카스티야로 대변되는 중앙권력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크게 4대 언어 권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권역은 민족적인 분포와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카스티야어: 약 74%
카탈루냐어: 12%
갈리시아어: 8%
바스크어: 1%
기타
지금은 중심어이지만 카스티야어도 예전에는 북부 지방의 방언 중 하나였다. 이후 12세기 경, 스페인의 중북부 지역에 카스티야-레온왕국이 들어서게 됐는데 그때 궁중언어로 사용됐다. 15세기 후반 카스티야왕국은 이후 아라곤왕국과 병합했고, 카스티야어는 명실상부한 스페인의 가장 중심이되는 언어로 자리매김한다.
* 사그라다 파밀리아: 건축가 가우디가 설계한 성가족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카탈란어라고도 불리는 카탈루냐어는 동북쪽에 위치한 카탈루냐, 발렌시아,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사용되고 있다. 동북쪽의 중심 도시는 그 유명한 바르셀로나이다. 발렌시아는 바르셀로나에서 남쪽으로 약 3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지중해에 있는 섬들인데 중심도시는 팔마이다. 발렌시아에서 약 280km 정도 떨어져 있다.
카탈루냐(Cataluña)는 프랑스와 근접해있어서 그런지 역사적으로 공유되는 점들이 꽤 많다. 언어도 그렇다. 카탈루냐어는 남부 프랑스에서 사용되는 프로방스어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카탈루냐어를 배운 이들 중에는 카탈루냐어가 카스티야어와 프랑스어를 섞어찌개를 한거 같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한다. 한편 위에 언급된 지역들 이외에도 피레네산맥에 있는 작은 나라 안도라도 카탈루냐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가예고(gallego)라고 불리는 갈리시아어는 이베리아반도 서북쪽에 위치한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서 사용되는 언어다. 갈리시아는 포르투갈의 바로 위쪽에 위치해있는데 포르투갈의 건국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포르투갈이 갈리시아 백작령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갈리시아어는 포르투갈어의 조상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에우스카라(euskara)라고 불리는 바스크어는 바스크(Basque) 지방에서 사용된다. 바스크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에 있는 피레네 산맥 서쪽에 위치하는데 스페인은 물론 프랑스에도 바스크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유럽 지역은 보통 라틴어의 영향을 받아 로망스어군을 이룬다. 카스티야어,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들 모두 로망스어군이다. 프랑스어, 포르투갈어도 로망스어군에 속한다. 하지만 바스크어는 로망스어군이 아닌 독자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다. 로망스어군이 사방으로 둘러쌓여 있지만 자신만의 고유성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를 두고 언어학상으로는 고립어라고 부른다.
바스크인들은 그들이 즐겨 쓰는 독특한 외형의 바스크베레모처럼 자신들만의 고유한 정체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자부심의 토대를 이루는 것 중 하나가 바스크어이이다.
* 바르셀로나 지하철역: 카탈루냐광장역(plaça de catalunya). c자가 아닌 ç자다. 아래에 작은 갈고리가 달렸는데 이걸 두고 '세디유'라고 부른다. 발음이 '프라카'가 아닌 '프라사'가 된다.
여기서 각 언어를 비교해보자.
영어: hello / 카스티야어 hola / 카탈로냐어 hola / 갈리시아어 ola / 바스크어 kaixo
영어: plaza / 카스티야어 plaza / 카탈로냐어 plaÇa / 갈리시아 cadrado / 바스크 plaza
영어: see you later / 카스티야어 hasta luego / 카탈로냐어 fins després / 갈리시아어 vémonos despois / 바스크어 gero arte
영어: please / 카스티야어 por favor / 카탈로냐어 si us plau / 갈리시아어 por favor / 바스크어 mesedez
영어: how much? / 카스티야어 ¿Cuánto? / 카탈로냐어 quant? / 갈리시아어 canto? / 바스크어 zenbat?
영어: cheers! / 카스티야어 ¡salud! / 카탈로냐어 salut! / 갈리시아어 saude! / 바스크어 topa!
영어: thank you / 카스티야어 gracias / 카탈로냐어 gracies / 갈리시아어 gracias / 바스크어 eskerrik asko
다른 언어보다도 바스크어가 확실히 두드러지게 구별된다. 한편 카스티야어에서 의문문과 감탄문을 한 번 보자. ¡salud!(건배!), ¿Cuánto?(얼마에요?). 다른 언어와 달리 거꾸로 뒤집어져 있는 느낌표와 물음표를 앞에 하나 더 써주어야 한다. 그래야 문장이 완성된다. 그나저나 건배 너무 많이 하지 말자. 돈이 너무 많이 나온다.
이런 지역 언어들은 1978년에 개정된 헌법에 따라 카스티야어와 함께 공식적인 위치를 부여받는다. 지도나 도로명 같은 공공문서에 카스티야어와 각 지역어가 동시에 기재된다. 예를 들어 바스크 지역에 있는 도노스티아(Donostia)라는 도시는 산세바스티안(San Sebastián)이라는 명칭을 동시에 기재한다. 도노스티아가 바스크어고, 산세바스티안이 카스티야 명칭이다.
앞서 참나무 육형제처럼 스페인의 지역어를 그룹으로 빗대서 생각해봤다. 리더는 카스티야어일 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멤버들이 만만치가 않다. 불화설이 계속나오고, 그룹을 탈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멤버도 있을 정도다. 리더 입장에서는 꽤 골치가 아플 것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내가 스페인어, 정확히는 카스티야어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 하나를 써본다.
¡yo soy peregrino!(나는 순례자입니다!)
종교, 철학을 떠나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인생길에 순례자가 아니던가!
* 산티아고콤포스텔라대성당
* 스페인의 지역어 분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