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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ldred Dec 30. 2020

마흔의 매직

"난 빨리 마흔이 됐으면 좋겠는데."



스무 살, 대학교 1학년 때만 해도 4학년 언니들이 대단해 보였다. 언어문화학부, 그중에서도 영어를 전공할 생각으로 입학했으니 4학년쯤 되면 제법 영어를 잘하는 멋진 대학생이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되다시피 워낙 겁도 많고 수줍음도 많은 탓에 복도에서 외국인 교수님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기 일쑤였고, 교양 삼아 들었던 중국어가 재미있어 복수전공으로 중국어를 선택했으나 그마저도 어설프게 배우다 끝났다. (이건 여담인데, 영어는 말은 못 해도 알아듣기라도 하지. 중국어는 읽지도 쓰지도 듣지도 못하는 상태라 교수가 농담을 해도 함께 웃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4학년이 되었지만, 1학년 때 상상했던 근사한 모습의 나는 없었고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어 안달 난 사람으로만 남아있었다.


24살, 운 좋게 카피라이터가 되었으나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허들 넘기 선수 마냥 매번 벅찬 호흡으로 살았다. 그러면서 막연하게 생각했다. 아, 빨리 마흔이 되면 좋겠다. 그쯤 되면 뭔가 조급한 마음도 사라질 것 같고, 한결 여유롭게 살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다들 서른에 대해 환상 아닌 환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나에게는 마흔이 그런 의미였던 것 같다.


마흔만 되면... 마흔만 되면...


그런데 이제 고작 3년밖에 안 남았네? 누가 이렇게 시간을 잡아먹었지? 상상 속의 수많던 여유는 어디 갔지? 이상해도 이렇게 이상할 수가 없다.


얼마 전, 기록의 쓸모라는 책을 읽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을 잘하고 싶어서 기록을 하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란다. 이러다가 내가 결국엔 '회사 인간'이 될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퇴사를 결심했다고 했다. (이후로 그녀는 회사 인간이 아닌, 쓰는 인간으로 열심히 살고 있는 중이다.)


회사 인간이라니. 나는 단 한 번도 회사 밖을 벗어난 내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마약 같은 월급 탓도 있고 회사에서 일을 잘하는 게 결국 내가 잘 사는 것이라고 믿었다.(상담하면서 선생님께 들었는데, 정체성에 집착하는 경향이 너무 크다고 했다. 글 쓰는 일 = 회사 = 나 이렇게 되어 있다고.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좀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했다.) 그보다도 내가 여길 나가서 뭘 할 수 있겠어라는 생각이 제일 컸던 것 같다. 아 물론, 그건 지금도 유효하다. 그런데 잠깐.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살 건가? 마흔이 코 앞인데? 마흔 안에 내 책을 내는 게 목표라고 해놓고선?


그래서 뭐라도 쓰기로 했다. 매일 일기 쓰듯이.


읽던 책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은 모서리를 접어뒀다가 타이핑해서 파일로 만들어두는 편인데, 나중에 아이디어 낼 때 한 번씩 보기 위해서였지만 쉽지 않았다. 금방 내용도 잊히고 무슨 책에 무슨 내용이 나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알아야 찾아볼 텐데, 사실 귀찮기도 했다. 인스타그램이나 인터넷에서 본 내용들 중에 괜찮은 것들도 오!라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북마크를 해두지만, 그것도 그때뿐. 물론 스크린 캡처도 마찬가지다. 돌아서면 잊었다.


마흔이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 조급하게 만드나. 서른여섯이 된다고 했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서른일곱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삼십 대 후반이라 그런 걸까.


어쨌거나 확실히 이건 알겠다. 이제 더 이상 도망갈 수는 없다는 걸. 복도에서 외국인 교수를 마주쳤을 처럼 숨거나 뒤돌아갈 수 없다는 걸. 카피를 잘 쓰는 걸로 인정받는 시기도 지났고, 관리직의 위치에서 충분한 역할도 해내야 하고 나 역시 '회사 인간'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선 뭐든 해야 한다는 걸.


그런데,

정말 마흔의 매직은 일어날 수 있을까. 있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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