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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May 09. 2024

맨발로 걷다 만난 벌 한 마리

전국적으로 맨발 걷기가 열풍이다. 맨발 걷기의 효과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많아지더니 급기야 흙이 보이는 길마다 맨발로 걸어 출근했다는 어느 기자의 후일담이 기사로 나오기도 했다. 인간이 생활하는데 겪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계발된 이기들이 무용지물이 되고 있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땅에 맨발을 접지하며 걷는, 원시생활로 퇴보해야만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는 이 모순된 상황을 점차 모두가 인지하고 수용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 중심에 내 오래된 고향 친구가 있고, 친구는 하루에 3번씩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매일 땅과 발을 만나게 하고 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얼린 땅이나 질펀하게 젖은 땅이나 상관없이 그는 맨발 걷기를 하기 위해 매일 떠오르는 해를 간절히 기다린다.


“비가 오면 더 좋아. 접지가 더 잘되거든. 비올 때도 꼭 한번 해봐.”


어느덧 친구는 맨발 걷기 전문가 못지않게, 아니 이미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맨발 걷기 학교를 수료했고, 맨발 걷기의 효과를 지인들에게 설파 중이고 친구의 가족들은 오래전부터 모두 매일 맨발 걷기에 동참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아토피가 거의 다 나았고 환절기마다 고생했던 비염도 잦아들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연과 교감하며 산속에서 흙을 만나고 있는 아이들은 신체의 건강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편안하고 건강하다고 덧붙인다.


마음은 친구 옆을 향해있지만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운명처럼 집 바로 앞에 맨발 걷기를 위한 황톳길이 조성되었다. 정말 운명처럼.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 내 집 앞마당에 마치 요술 램프에서 지니가 나타나 내가 그토록 원하던 소원 하나를 들어준 것처럼, 그렇게 운명적으로 하루아침에 내 눈앞에 나타났다. 이건 하늘의 계시일 것이다. 아니다. 이건 그토록 진하게 베인 친구의 맨발 기운이 멀리서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나에게 전해져 온 것이다. 내게 전화를 할 때마다 친구는 맨발 걷기 중이었고, 당장 나도 어디든 흙을 밟아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었다. 제발 100일만 해보라고, 매일 30분 이상씩 해보면 앞으로 안 하고는 못 버틸 거라며. 100일의 기적을 친구인 내게도 선사해주고 싶어 안달 난 내 오랜 친구.


100일의 기적을 아이에게 선사하기 위해 먼저 계획을 세웠다. 종이에 아래로 날짜를 죽 적고 옆에다 체크할 수 있는 공간을 뒀다. 저녁 식사 전이나 후 매일 30분씩 걷기로 아이와 약속했다. 덧붙여 아이에게 엄마 친구의 맨발 인증 사진을 보여주었고, 그 친구의 맨발 역사를 들려주었다. 아이는 일주일에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매일은 어렵다는 현실적인 답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나는 응수했다. 변수는 항상 존재하지만 계획이 반이고 시작이 반이라고.


지니가 만들어주고 간 집 앞마당 황톳길을 그때부터 수시로 걸었다. 일과가 끝날 무렵 아이와 함께. 내 아이의 입에 밥 들어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르고 흐뭇한 게 부모의 마음인지라, 이 좋은 걸 혼자만 할 수 없었다. 비염이 없는 나보다 비염이 너무 심해 환절기마다 고생하는 아이가 이 좋은 걸 해도 더 많이 해야 하고, 밤새 화장실을 여러 번 가느라 숙면이 어려운 아이가 이 좋은 걸 해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내 건강보다 아이의 건강이 우선인 것은 어쩔 수 없는 동물적 본능이다. 맨발 걷기의 무수한 효과 중에 아이의 아토피가 사라졌다는 친구의 말이 내 가슴에 가장 깊이 새겨졌으니, 나보다 내 아이를 위해서라도 집 앞마당으로 나서야 했다.


맨발 걷기 4일 차.


그날따라 흐릿하고 어두운 하늘만큼 어두운 기운이 우리 주위를 점차적으로 스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건강을 위한 습관 형성도 매일 하는 숙제처럼 느껴질 무렵, 아이는 그날따라 맨발 걷기를 내켜하지 않았다. 10분만 하겠다는 둥, 황톳길 근처에 있는 운동기구로 운동을 하겠다는 둥 근처를 배회했다.

그러다 한 바퀴만 맨발로 걷다 집에 가겠다며 몇 발자국 디딘 찰나, 아이는 악 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혹시 꾀병은 아닌가 하며 나는 대수롭지 않게 아이에게 다가갔다.


순간 아이 발 근처에 옆으로 죽은 시늉을 하며 누워있는 벌 한 마리.


내막은 이러했다. 황톳길가에 잡초들이 무성한데 아이는 그리로 걷다 죽은 벌인 지 살아있는 벌인 지를 밟은 것이다. 침을 쏘인 건지 아니면 다른 걸 밟아서 통증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 아이와 나는 그 길로 곧장 집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팅팅 불기 시작하는 발. 엄지발가락 근처에서 시작해서 발등으로 벌겋게 퍼지고 있는 아이의 발. 독이 자신의 몸 안에서 퍼지고 있다는 상상에 아이는 통증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어릴 적부터 닳고 닳도록 봤던 곤충 동물 배틀책 속 독성이 강한 놈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울먹이며 옆으로 힘없이 누워있는 아이를 보니 좀 전에 봤던 옆으로 누워 죽은 시늉을 하던 벌 한 마리가 떠올라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뭘 좀 해보려니 참...

100일의 기적 좀 맞아보려 했더니 참...


3일 천하로 끝나게 된 우리들의 맨발 걷기.

피부과 원장님이 엄마인 나보다 아이의 발을 더 걱정해 주시는 바람에 아이에게 당분간 맨발 걷기의 '맨' 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건강하려다 건강을 잃을 뻔했다며 '좀 적당히 하라'는 아이의 아빠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적당히가 되나? 건강해진다는데, 비염이 낫는다는데, 숙면할 수 있다는데 그리고 정서적으로 편안해진다는데...


맨발 걷기를 통해 100일의 기적을 맛보게 하겠다는 아이의 건강에 대한 내 의지가 욕망으로 변질되어 가려던 찰나, 옆으로 누워있던 벌 한 마리 덕분에 잠시 내려놓게 되었다. 엄마 뜻대로 되는 건 없다. 심지어 아이 건강까지도. 언제나 그랬다. 그 어떤 것이든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 마음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순간, 아이는 멀찍이 달아나버린다. 부모의 무거워진 사랑을 아이들은 버텨낼 재간이 없다. 사랑이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고 과한 욕망과 집착으로 느껴진다면 아이들은 서서히 뒷걸음을 치며 달아날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희한하게 엄마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꿰뚫어 본다.


“엄마, 적당히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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