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몽고, 말
'코로나'는 우리 집 경제에는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흠뻑 빠져지내던 '사진과 여행'이라는 내 취미생활은 멈추게 했다. 한참 사진에 빠져 사진작가로 여행작가로 전국을 헤매고 다니기도 했지만 카메라를 놓은 지 벌써 몇 년 째다. 오랜만에 사진만을 위한 여행을 다녀왔다.
울란부통(내몽고)은 중국 북부 몽골 아래에 있는 중국의 자치구로 대부분 광활한 초원과 사막으로 이뤄져 있고 몽골족도 다수 거주하고 있다. 해발 1700 미터 정도의 구릉지대는 독특한 풍경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다 말떼들이 질주하며 뽀얀 분진 속에 말들이 그려내는 실루엣을 찍을 수 있어 세계 사진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우리나라는 이상 기후로 추석이 지나도록 열대야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패상초원은 푸른 초원이 황금빛으로 물든 데다 아침저녁으로는 꽤 추워 패딩점퍼까지 입어야 했다.
솔직히 처음 갈 때만 해도 이곳이 몽골인지 중국의 내몽고인지 조차 잘 몰랐다. 그저 넓은 초원에서 뛰는 '말'만 상상하며 카메라 두 대에 삼각대 그리고 갖은 렌즈와 필터까지 몽땅 들고 집을 나섰다. 23킬로그램을 꽉 채운 캐리어와 카메라 가방만으로도 온몸이 휘청거렸다. 공항버스 첫차를 탈 때부터 앞으로의 여정을 가늠했어야 했다.
심양까지는 비행기로 한 시간 정도라 가뿐했다. 하지만 심양에서 울란부통까지는 중국 내부의 끝없는 옥수수밭을 보며 거의 9시간 이상을 달려가야 한다. 지루하고 아깝기 그지없는 시간이었지만 멋진 말이 초원을 달리는 모습만 떠올리며 애써 참았다.
말에 대한 사랑은 제주살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다리를 하늘 높이 쳐들며 포효하는 모습이나 흙먼지를 휘날리며 달리는 용맹한 모습, 또 가까이 가면 기다란 속눈썹에 큰 눈을 감추고 애써 우리의 시선을 피하는 그들의 순수함에 홀딱 빠져버리고 말았다.
역사시간에 많이 듣던 만주벌판이 바로 심양이란다. 고구려가 한참 영토를 넓혔을 때 우리 고구려의 땅이었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활동하던 바로 그곳이다. 가이드의 설명 한 마디에 지루하기만 했던 옥수수밭은 달라 보였다. 이 넓은 땅을 우리 옛 선조들이 말을 타고 달렸단 말이지? 고구려 벽화에서 보던 장수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가슴이 뿌듯해졌다.
"우리를 왜 재중동포라고 하지 않나요?"
맞다. 미국에 살면 재미동포, 일본에 살면 재일동포라고 하는데 왜 중국에 사는 사람들만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조선족이라는 말은 중국 사람들이 자기네는 한족이고 그 외의 소수민족들을 ~족이라고 부르는 데서 시작되었다.
솔직히 우리들이 조선족 하면 다른 재외동포와 달리 조금 무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심양에 살고 있는 조선족이 120만 명인데 30만 명 정도가 한국에 들어와 일을 하고 있단다. 이제부터라도 조선족이라고 부르지 말고 재중동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맘때쯤이면 우리의 평야지대도 낱알이 굵어진 벼가 황금빛으로 변해 장관인데 패상의 초지도 누렇게 변해 있었다. 작은 바람결도 느껴지지 않는 초지, 푸르고 넓디넓은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제 세상을 만난 듯 맘껏 떠다니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그 잔디밭을 마구 굴러다니고 싶었다.
중국의 '산' 하면 장가계에서 보았던 독특한 산이나, 황산과 같은 어마무시한 산만 떠올렸으나 패상의 산은 아주 야트막했다. 제주의 작은 오름 같은 산 앞에 넓은 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마치 동그란 얼굴에 큰 눈 반짝이며 예쁜 삔 하나 꽂은 캐릭터 같기도 하고 듬성듬성 몇 가닥 남은 대머리 아저씨가 연상되기도 했다.
천연 초원지역은 갑작스럽게 온도가 높아지면서 조성된 기후와 식 피의 변화로 장자커우 북부 100 킬로미터 지점에서 청더 북부 100 킬로미터까지 고원습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사진작가들에게 사랑받는 풍경 중 하나가 일출과 일몰 장면이다. 우리는 매일 일출 사진을 찍기 위해 새벽 서너 시에 일어나 지프차를 타고 차가 갈 수 있는 제일 높은 곳까지 올라 사진을 찍고 대낮에 잠깐 휴식을 취하고는 해가 떨어진 후에야 숙소로 돌아왔다.
첫 목적지는 사령하천. 우리가 가장 먼저 도착했기 때문에 제일 좋은 자리에 삼각대를 설치하고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해 뜰 무렵부터 무더기로 올라오는 중국인들은 아무리 안된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끼어드는 바람에 시야가 가려 도저히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망원렌즈 하나 들고 산비탈 아래로 내려가며 사진을 찍어야 했다. 어느새 중국도 사진애호가들이 많이 늘었나 보다. 장비는 최신식 카메라를 들고 있었지만 그들의 매너는 아주 꽝이었다. 막무가내일 뿐만 아니라 삼각대를 설치해 놓고는 태연히 담배까지 피우고 있다. 이런~~
하지만 저 아래 계곡에서 양과 소와 말 떼가 몰려가는 모습은 이곳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다. 좀 더 긴 망원렌즈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다음에 간 곳은 하마패. 하마는 올챙이를 뜻한다. 물 수급을 위해서인지 물을 가두다가 만들어진 호수 같다. 가을 풍경은 고스란히 물에 비춰 데칼코마니가 되었다.
일몰 촬영지라고 내려준 곳은 하마패에서 몽골인들이 사는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말을 빌려 탈 수도 있는 넓은 광장에는 진사들보다는 일반 관광객들이 많았다.
다음날 일출을 찍기 위해 간 곳은 북구의 유럽풍경구다. 잔뜩 찌푸린 날씨로 일출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으나 한적한 초원에는 일출을 보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여린 가을 햇살을 듬뿍 받고 있는 오채산. 굽이굽이 펼쳐진 구릉과 구릉 사이에 들어선 나무들이 주황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며 한껏 미소를 지으며 유혹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모습에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가 겅중겅중 뛰어가는 말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카메라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가피구(구는 골짜기를 뜻한다)에는 자작나무가 있다. 우리보다 북쪽이어서인지 자작나무의 키가 작다. 바람이 불면 자작자작 소리를 내서 자작나무라 했을까? 사진을 시작하고 처음 인제의 자작나무숲에 갔을 때의 감흥은 잊을 수가 없다. 무거운 카메라 메고 그 높은 산을 오르라고 할 때는 정말 짜증이 났다. 하지만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뻗어 올라간 하얀 숲 안에 들어섰을 때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우리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이 있었다. 생채기가 된 옹이들은 자기들을 보러 온 우리가 신기한 듯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숲이라니, 게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떨어질 듯 겨우 매달려 있는 노란 나뭇잎과의 조화는 환상 그 자체였다. 가피구의 자작나무숲은 그보다는 덜했지만 나뭇가지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속살 다 내보이는 이파리들이 예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백화구(어우 바우 푸)의 넓은 광장에서는 진사들이 말 사진을 잘 찍도록 빛의 방향까지 고려하며 말을 뛰게 했다. 다들 숨을 멎은 채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직 '드르륵드르륵' 연사를 날리는 셔터소리와 또 허공을 가르는 채찍소리만 들려왔다. 순간 이건 아니다 싶어 말몰이꾼들을 자세히 바라보니 말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채찍에 무슨 장치가 있는지 휘두르면 괴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고 겁 많은 말들은 그 소리에 놀라 기겁해서 뛰고 있었다. 그래도 그 멋진 말들을 때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던지!
사진으로 담아 온 모습보다 눈으로 담은 모습이 더 리얼하고 많다. 채 사진으로 담지 못한 장면과 다그닥 다그닥 말이 힘차게 뛰는 소리도 함께 기억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도 진사들의 자리다툼은 말도 못 했고 끼어들지 못하게 하려다가 나는 뺨까지 얻어맞고 말았다. 남자도 아닌 중국 여자의 주먹이 내 얼굴로 날아왔고 더 이상 하다가는 큰 싸움이 될까 싶어 그만두었지만 정말 이번 여행에서 중국인들의 면모를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이렇게 오늘 하루도 저물고 있다. 도대체 사진을 몇 장이나 찍은 걸까? 그저 카메라만 들면 다리가 아픈 것도 어깨가 아프다는 것도 잊고 만다.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것이 사진을 취미로 가진 것이다. 같이 온 사람들 대부분이 60대도 별로 없고 70대를 훌쩍 넘긴 분들이다. 다들 힘들어하기는커녕 한밤중에 별을 찍겠다고 다시 나갔다. 감기몸살로 몸 상태가 최하였던 나는 다음날을 위해 잠을 청했다. 내일은 또 어떤 모습을 보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