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새 멜론에 근접한 유튜브 뮤직의 헤게모니에 힘입어 대-플레이리스트 시대가 도래했다. 개인 채널이든 대형 유통사든, 갬성 카피와 썸네일을 담은 플레이리스트 채널을 통해 사람들을 끌어모으려고 혈안이다. 여러 곡을 특정 테마에 따라 청취하고, 댓글을 통해 채널 주인장(?)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음악을 소비하는 행위는 이제 익숙하다. 인기 있는 플레이리스트 유튜버들은 수천, 수만의 구독자들을 거느리기도 한다.
2. LP 뒤에 CD가 등장했고, CD를 누른 mp3 또한 스트리밍에 굴복하는 역사와 함께 앨범 단위의 청취 습관은 곡 단위로 분절되는 과정을 거쳤다. 초기 디지털 플랫폼에 모인 사용자들이 유행가 위주로 곡을 듣게 되면서 히트 싱글 하나의 위력이 중요해졌다. 당시는 우리 모두가 똑같은 스타를 가지는 '대중'가수의 시대였다.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TOP 100에 들어가기 위해 안달이었던 10년대를 기억한다. 그리고 사재기와 줄세우기를 경험한 대중들의 피로감이 증가하면서 인기 차트는 서서히 종말을 맞게 된다.
3. 한편 유통 서비스만 변화를 거친 것이 아니다. 콘텐츠 시장의 파이가 커지면서 절대적인 음악 발매량/퀄리티가 증가했고, 지금도 수많은 곡들이 손가락을 빨며 발매를 기다리고 있다. 그 외에도 교육/기술 발달로 음악 제작의 접근성이 높아진 점, 음원 사이트 외에도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 등 새로운 SNS형 플랫폼이 부상한 점은, 우리가 시도 때도 없이 '다양한 음악'을 '다양한 형태로'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앤 마리와 같은 아티스트 또한 연간 차트 상위권을 차지하는 등 우리들은 해외 음악도 스스럼없이 즐기게 됐다. 이러한 상황은 매스 미디어가 메이저 음악 위주로 떠먹여주던 과거로부터 벗어나 개인이 온전한 자신만의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4. 이렇게 탄생한 곡 및 관련 콘텐츠들이 24시간 내내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판친다. 즉 정보 과부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여기서 큐레이션이 두둥등장한다. 대중음악 씬에서 큐레이션은 두 가지로 나뉜다. 스포티파이처럼 머신러닝을 통해 자동적으로 정교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주거나, 아니면 인간이 직접 테마와 취향을 이해하고 플레이리스트를 짜거나. 물론 전자가 후자를 포함할 수 있기는 하다. 이 둘은 편리함과 정확성/직관성을 모두 갖추고 인기 차트를 위협한다. 정리하자면 대-플레이리스트 시대는 "콘텐츠의 과부하로부터 취향에 따른 교통정리를 하자"는 움직임으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부하는 음악 발매뿐만 아니라 콘텐츠 자체의 범람과 함께 찾아왔다.
5. 테마와 취향 중심으로 꾸려진 플레이리스트는'소중'가수들이 기회를 얻는 장이기도 하다. 음악 소비의 민주화라고 할까나(곡의 절대 소비량을 보여주는 가온차트의 상위권 지수가 매해 떨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스포티파이에서는 큐레이션을 통해 인디 가수가 메이저 씬으로 떡상하기도 했다. 한편 플레이리스트 유튜브 채널에서는 댓글을 통해 채널 사람들과 주접을 떨고 소통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제는 뮤직비디오, 보는 음악(이제 이 단어도 진부하다)을 넘어서서 플레이리스트 자체가 하나의 놀이터가 된 것이다. 취향을 저격하고 플레이리스트를 '건네는' 과정을 통해 음악은 일종의 브랜딩을 통해 제공받는 서비스로 거듭난다. 음악은 더 이상 청각적 자극만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닌 것 같다.
6. 이렇게 복잡해진 소비 형태는 음악 산업 내 제작자, 마케터들의 고민을 양산한다. 플레이리스트라는 새로운 시장은 기회이기도 하지만 누구에게는 도전이기도 하다. 까놓고 말해 좋은 음악만 만들면 되는 시대는 끝났다. 나 또한 처음 엔터 쪽에 관심을 가졌을 때 "일단 음악이 먼저다"라는 생각을 고수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없다. 제작자의 경우 대중들에게 최대한 직관적이고 흥미로운 콘셉트, 그리고 라이브/챌린지와 같은 가지고 놀 수 있는 포인트, 게임 속 세계관/웹툰 OST와 같은 독창적인 발매 형태까지 고려해야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아무래도 A&R과 마케터가 긴밀하게 협업하는 형태가 이상적이지 않을까 싶다.
7. 물론 음악이 다양한 콘텐츠의 형태로 변형되고 소비에만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음악 자체의 중요성이 간과되고 경우에 따라 좋은 음악이 상품성 기준으로 평가절하당할 수도 있긴 하다. 어쨌든 이런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이제 음악이 아니라 '콘텐츠' 개념 하에 재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제작자들은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기획 역량은 물론이고 콘텐츠와 플랫폼에 대한 통찰력 또한 갖추어야 할 것이다. 유통 분야 종사자들도 비슷하다. 멜론이란 거대한 함선이 위기를 맞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영원히 빠르게 흘러가는 콘텐츠의 바다를 슬기롭게 유영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음원을 플랫폼에서 '순수하게' 소비하지 않게 된 건 의미심장하다. 음악의 저작권 자체가 급부상하고 있다는 해외의 몇몇 소식은 유통의 형태가 음원 자체가 아닌, 콘텐츠의 모습으로 퍼져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