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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Sep 12. 2020

'토착왜구' 감별법

누군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할 때, 토착왜구라 비판하고 의심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 느낌이다. “해방된 지 75년이나 지났는데..” 라면서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지만,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비판의 프레임이 된 건 분명하다.


난 토착왜구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한국인이면서 일본의 생각과 이익에 더 동조하거나 혹은 그래야 우리에게도 이익이 된다고 믿고 도모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중요한 것은 ‘누가 토착왜구냐?’하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토착왜구일까? 그게 겉으로 드러날까? 여기서부터는 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토착왜구 '감별법'이 필요하다.


토착왜구란 어떤 사람일까.. 이 개념을 구체화하기 위해 시간을 되돌려 본다. 1949년 6월 백범 김구 선생이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됐다. 충격과 분노에 온 국민들이 눈물을 흘린 장례식, 그 자리에서 백범의 평생 동지 김규식 선생은 절절한 추모사를 낭독한다.


독립운동에 모든 걸 다 바친 동지가 해방 조국에서 동포의 흉탄에 스러진 현실을, 김규식 선생은 한마디로 이렇게 규정했다.


“왜적의 심장을 가진 조선인이 아니면 도저히 감행하지 못할 만행이다”


그렇다. 조선인의 얼굴을 하고 왜놈의 심장을 가진 괴물, 우린 토착왜구의 모습을 그려볼 때 김규식 선생의 이 말에서 강렬하게 그 전형을 상상하게 된다.


안두희는 육군 소위이자 백범 선생이 당수인 한국독립당의 당원이었다.


백범의 철학에 공감하는, 반공 청년 장교로 여겨졌고, 그래서 그렇게 의심을 사지 않고 백범을 단독 면담해 암살의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다.


‘믿음의 빈틈’을 노리는 것이 안두희, 그러니까 왜적의 심장을 가진 조선인, 그러니까 토착왜구들의 수법이다.


토착왜구란 가장 가까이 숨어있는, 다시 말해 동지인 척하는 치명적 위험이 그 본질이다.


드러내 놓고 일본 편을 드는 사람들은 오히려 분명하고 쉽다. 토착왜구라 부를 필요도 없다. 그냥 왜구일 뿐이다.


정말 위험하고 교활한 것은, 왜놈 심장을 가진 조선인, 조국을 위하는 척하면서 실은 왜놈의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들, 토착왜구라 규정한다면 바로 이런 인간들이다.


왜적의 심장을 가진 토착왜구의 이런 특징은 백범이 상해 시절 겪은 두 명의 상반된 젊은이 이야기에서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


상해에서 어느 날 한 조선인 여인의 피살 사건이 발생한다. 현장에 간 백범은 살해된 여인에게서 목 졸린 흔적을 발견했는데 예사롭지 않았다. 백범이 부하들에게 정탐꾼을 처형할 때 사용하라고 가르쳐준 살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살해범은 놀랍게도 한태규라는 임정 경호원, 그러니까 백범의 부하로 드러난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처럼 행동한 청년은 실은 일제에 매수당한 주구였고, 한때 동거했던 여인이 이 사실을 눈치 채자 백범한테 배운 방법으로 그녀를 살해한 것이다.


또 다른 젊은이는 술을 마시면 일본 노래를 불러 ‘일본 영감’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게다를 신고 다니기도 하고 도무지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 분간이 안 돼 수상한 인물로 평가됐고, 이런 사람을 임정 청사에 들인다는 이유로 백범은 수뇌부의 질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일본 영감’은 목숨을 내놓고 도쿄 한복판에서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다.


누가 반일 투사인지 누가 토착왜구인지 말과 겉모습만으로 구별해내는 건 간단치 않다는 사실, 그런데 이보다 더 의미심장한 교훈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토착왜구들은  ‘반일’을 ‘독립’을 ‘투쟁’을 유난히 강조하며 더욱 선명하게 자신을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반일을 외치며 토착왜구를 잡으라고 외치는 그들이 오히려 토착왜구일 가능성이 있다는 충격의 반전에 우린 늘 대비해야 한다.  


작가 한수산 선생이 최근, 자신이 쓴 ‘군함도’가 과도한 반일 프로파간다로 과장 왜곡되는 것에 분노하는 글을 올렸다.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상영한 '군함도의 진실'이라는 영상물은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가득해 국제적 망신을 자초한 것이라고도 비판했다.


한수산 선생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일본 비판은 빌미를 주게 되고 결국 우리를 힘겹게 하는 괴력으로 되돌아온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강경 반일’인 척 하지만 실은 ‘무늬만 반일'’이고 실은 우리가 아닌 일본에 도움을 주는 ‘이적 반일’,,,이런 반일의 숨은 의도는 무엇일까 심각하게 따져 묻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우리를 황당한 구렁텅이로 몰아가는 완벽한 토착왜구가 혹시 아닐까?


자 이제 다시 한번 주변을 살펴보자.


반일의 선봉인 듯 떠드는 사람들이야말로, 삶이 아니라 구호만 외치는 반일주의자야말로,

어쩌면 군국주의 일본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일지 모르고,  그렇다면 진정한 토착왜구일지 모른다고 난 강력히 의심한다.  


그들의 반일은 한국을 위한 반일인가, 자신을 위한 반일인가, 아니면 일본을 위한 반일인가?


먼 훗날 토착왜구 논쟁이 벌어질 걸 미리 예상이라도 했던 것일까,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운 안창호 선생은 이런 말을 남겼다.


“최후의 승리는 혈전에 있나니 혈전을 하려면 그 성의와 그 용기가 있어야 되리로다. 전정한 성의와 용기가 있는 자는 입으로 혈전을 하지 않고 그 혈전이 실현되도록 몸으로 노력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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