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인사동 인덱스 갤러리 <골목안 풍경>
코로나19로 몇 년간 가지 못했던 사진작품 전시회에 오랜만에 다녀왔다. 김기찬(1938~2005)의 <골목안 풍경> 사진전은 옛 서울골목의 풍경이 담은 정겨운 흑백사진들이다. 서울 중림동을 중심으로 공덕동, 도화동, 아현동 등 1970~2000년대 초반 까지 서울의 골목 풍경이 담겨있다. 가난과 행복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 시대에, 가난했지만 행복했다고 좋은 시절이었다고 느껴지는 사진들이 차곡차곡 포개져있다. 종로구 인사동 인덱스 갤러리에서 4월 3일까지 전시하고 있다. 매일 오후 6시까지 운영 중이며 화요일은 휴관, 입장료는 없다.
사진의 배경은 80년대 이후 우후죽순 들어서기 시작한 아파트에 밀려 사라진 공간 ‘골목’이다. 그는 사진의 기록성에 주목하여 30여 년간 골목을 평생 자신의 작업 테마로 삼았다. 경제성장과 도심개발로 골목이라는 말은 잊혀진 단어가 되었지만, 그의 사진들은 작품을 넘어 도시 서울의 기록으로서 꾸준히 재평가되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021년 김 작가의 유족에게서 필름 10만여 점과 사진, 육필 원고, 작가 노트 등 유품자료를 기증받아 박물관 수장고에 영구 보존하고 있다.
김기찬은 사진작가가 아닌 방송국에서 영상제작을 하던 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진 속 인물들의 면면이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달동네를 찍은 사진으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사진 하나하나에서 작가의 사람됨과 따스함이 느껴졌다. 인정 많은 사람, 남의 불행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 남의 경조사를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이지 싶다.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바꾸는 김기찬의 사진의 매력이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요즘 접하기 힘든 흑백사진은 동네 주민들이 짓는 저마다 다른 표정에 집중하게 한다. 보기만 해도 슬금슬금 미소가 지어지는 아이들 사진이 있는가하면, 다가가 속사정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주름진 얼굴의 어르신 사진도 있다.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요, 한 권의 책”이라는 명언이 절로 떠올랐다. 과거의 유물로 여겼던 흑백사진엔 대상에 몰입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음을 알게 됐다. 사람의 표정 속에 숨은 내면에 대해 잠시 생각에 빠지게 한다.
중장년 관람객들은 저마다의 추억과 기억이 담겨있는 골목 사진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을 머물기도 한다. 흐뭇한 웃음을 짓는 사람, 추억에 젖은 표정, 감동한 얼굴··· 마치 자신과 가족, 그리운 친인척들의 사진을 보는 듯한 표정들이다. 자동차가 아닌 사람이 주인이 되어 한가롭게 거닐기도 하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골목같은 공간이 그리워서 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서울의 풍경은 회색빛 슬레이트와 거친 시멘트 블록 등이 주요 배경으로 그 삭막함과 비인간적인 느낌은 지금의 획일적인 아파트와도 만만치 않다. 그런 삭막함이 정감 있게 기억되는 건 아마도 골목의 힘이 아닌가 싶다. 주거공간의 일부이고 이웃간 만남의 장소이며 사랑방이자 놀이터이기도 한 공간, 골목이 있어 척박했던 환경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는 미소를 머금게 한다.
구불구불 휘어져 있으며 요리조리 삐뚤삐뚤 미로 같은 골목에는 이야기가 있다. 고무줄 놀이에 푹 빠진 아이들, 대문 앞에 앉아 지나가는 주민들을 쳐다보며 햇볕을 쬐는 노인, 소박한 생일상 앞에서 웃음꽃을 피우는 사람들···· 그는 골목안에서 자신의 고향을 보았고,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따뜻한 본성을 느꼈다고 한다. 골목안 주민들과의 오랜 유대감을 바탕으로 진행된 그의 골목안 작업은 그가 타계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골목의 주인은 사람만이 아님을 말하는 사진들도 재미있다. 바둑을 두는 주민들 사이에서 같이 바둑판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반려견이 참 기특하고, 골목에서 빠질 수 없는 고양이들이 담장 위, 계단 끝에서 수시로 등장한다. 희미해진 기억 속, 초라한 동네에도 엄연히 에로스가 존재함을 주인을 대신하여 증명이라도 하듯 교미에 열중하던 동네 개들이 떠올랐다. 예나 지금이나 동물들은 도시인의 팍팍한 삶에 많은 위로를 주는 고마운 존재다.
전시회장 한켠에 김기찬의 사진집 <골목안 풍경>이 나와 있어 전시회에 없는 여러 사진을 찬찬히 감상할 수 있다. 미공개 사진과 컬러 골목 사진도 담겨있다. 방송국 영상제작부장을 지내면서도 틈만 나면 카메라를 메고 서울역 뒤 염천교, 중림동, 사근동 뚝방촌 일대를 다닌 사연도 소개돼 있다. 그는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주민들의 삶에 스며들었다.
1968년부터 무려 30년 넘게 골목을 드나들며 어느덧 그 골목의 일부가 된 것이다. 퇴근길에, 주말에, 심지어 명절에도 골목을 찾으면서 친근한 사진사 아저씨가 되어갔다. 김기찬은 그가 반평생 사진으로 담았던 서울의 골목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2005년에 돌아가셨다. 아마도 골목은 그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나 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책 속 표현대로 너무나 빨리, 너무나 많이 사라진 옛 서울에 대한 회한과 공간의 부조리 또한 느끼게 된다. 과거를 살아냈던 중장년층 시민들에겐 사진 속 풍경이 새삼스럽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2,30대 젊은이들에겐 사진 속 공간들이 새롭게 다가올 것 같다.
내게 고향하면 떠오르는 풍경에 넓은 들이나 실개천, 얼룩배기 황소가 출현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향수어린 정경들이 있는데 굳이 명명하자면 '고향의 골목' 정도가 아닐까한다. 그래서 도시 속에서 아직도 존재하는 골목길을 만나면 고향에 온 것 같은 아련함과 그리움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골목을 이리저리 배회하곤 한다. 내가 자란 어린 시절의 놀이터요 다 자라 어른이 되어서도 마음속으로 찾아 헤매던 고향의 골목을 추억하면서··· - 김기찬 사진집 <골목안 풍경> 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