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한 날들에게 안녕을 고하며
참으로 바쁜 나날이었다. 이직한 후 바쁜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바쁜 것뿐만 아니라 신경 쓸게 한두 개가 아니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많았다. 주중엔 늦게까지 일하고, 주말에 몰아자긴 했으나 또다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 이뤄졌다. 바쁜 걸 원했지만 너무 한 거 아닌가?
손을 놓지 못하는 내 탓도 있었다. 뭔가 잘하고 싶은 마음인데 업계가 불황인 건가? 아니면 내 능력이 부족한 건가? 잘 되지 않은 탓에 인간관계까지 꼬여만 가고 있었다. 하루종일 기분 나쁜 일을 곱씹고 있었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하고 말했나 곱씹기도 하고 게임을 하며 잊으려 했지만 잘 잊히지 않았다.
떠나가는 벚꽃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해서 아쉬울 시점, 선거일이라는 핑계로 잠을 곤히 잤던 나를 깨워 산책을 나섰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벚꽃을 즐기고 있었다. 그 안에서 산책하는 나는 왠지 더 외로웠달까? 아름다운 광경인데 왠지 혼자 보는 게 아쉽기도 하고 또 오랜만에 산책 나와 바뀐 풍경을 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집에 돌아오니 답답한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인터넷을 휘적거리며 또 한 손에는 게임을 놓지 못하던 그 순간, 쌓인 이메일을 처리하고자 연 이메일 함에는 그동안 구독만 해놓고 못 본 여러 가지 레터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클릭해 보니 참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많다. 바쁘다는 핑계로 또 시간 없다는 핑계로, 또 AI가 글쓰기를 대신한다는 또 다른 알량한 핑계로 브런치 알람을 꺼놓은 지 몇 개월째.
눈에 띄는 글이 보였다. '맥시멀리스트', '미니멀리스트'.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는 곤도 마리에 언니의 말을 따라 비움을 실천하고 있지만, 왠지 이 글은 재밌을 것만 같았다. '딜레탕트'. 이탈리아어로 즐긴다의 의미인 '딜레트(Diletto)'에서 나온 용어로 예술애호가, 아는척하기 좋아하는 아마추어를 뜻한다.
딱 나다. 무언가를 하나 빠지긴 하지만, 이내 내 능력이 거기에서 미치면 금세 흥미를 잃고 이거 저거 건드려본 건 언어부터 예술분야, 그리고 심리학 분야에 까지 이른다. 이과 체질은 아니어서 과학 쪽으로 흐르진 않았지만, 이 세상에 신기한 것들은 알고 싶은 내 알량한 욕심이랄까? 알고 싶지만 내 맘만큼 안 따라주는 내 머리 때문에 많은 걸 놓치고 있다.
글에서 읽은 '여성 과학인들'. 업무에서 접한 이진형 스탠퍼드 신경외과학 겸 생명공학과 교수님 이름을 보니 이렇게 대단하신 분이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한 분야를 꾸준히 파온 그들은 수많은 몰입의 순간과 또 실패의 절차를 기어이 반복했을 것이다. 지루한 연구가 이어져을 것이고, 또 좌절도 누구보다 많이 겪었을 터. 그리고 연구의 마지막에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엄청난 희열까지.
다른 여교수님 또한 "매일 연구실 가는 길이 너무 설렌다."라고 까지 말할 정도면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무언갈 잘하는 지도 모르겠고, 또 무언가를 해보고 싶지도 않았던 요즘, 이 레터 하나가 나를 참 부끄럽게 만들기도, 또 새로운 마음이 들게도 했다. 짧고 자극적인 숏츠에만 전염되었던 요즘에 이렇게 활자 한 자 한 자를 읽으면서 전율을 느끼는 나를 보니 숨어 있는 예술성이 돋나? 싶기도 한순간이었다.
결국 불필요한 일로부터 마음을 담아두지 말고, 맥시멀 한 몰입이 성과를 이룬다는 것. 하루에 70여 가지 정도의 결정을 하기에 옷 고르는 사소한 결정은 하지 않고 싶어 검은색 민무늬 티만 입는 스티브 잡스를 보며 나 같은 그냥 일개미가 세계적인 회사의 CEO만큼 바쁘다고 착각하고 살았던 것 같다.
선거일이라는 휴일을 어떻게 보낼 까 하는 생각부터 벚꽃이 지기 전에 산책을 하겠다는 결정도, 쌓여있던 이메일 중 하나를 여는 순간도 모두 내 무의식이 내린 사소한 결정이었다. 하루하루 행하는 사소한 것들은 독립적이며 중요하다는 걸 느끼게 해 준다. 내 머리로 내린 결정이 나의 손과 몸을 일으키게 하는 거니깐.
오늘, 글 하나로 인해 숨어있던 글쓰기의 열정을 되찾았다. 이제 머리를 좀 식히며 소비하는 삶이 아닌 하나하나 내 손끝으로 써 내려가는 삶을 살겠다고. 하루에 한 번은 나를 기쁘게 하겠다고. 일에 맥시멀로 몰입해서 성과를 내겠다고. 이 세상 떠나기 전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되는 무언가는 한번 남기겠다고. 삶 속의 사소한 순간들에게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그 안의 보물을 찾는 나날들을 만들 거라고.
✔️꼭 읽어야 할 글
[엘르보이스] '맥시멀'한 몰입을 향해 - SOCIETY (ell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