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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객여행자 Sep 06. 2017

‘광고주병’은 왜 걸릴까?

대행사 출신이 걸리는 연예인병보다 무서운 병

저는 대부분의 사회생활을 광고나 마케팅 관련 에이젼시에서 보냈습니다. 소히 말하는 ‘대행사 출신’인 거죠. 요즘 많은 기업의 브랜드 매니저나 마케터들은 ‘대행사 출신’ 들이 많습니다. 광고 에이젼시나 컨설팅 에이젼시에서 일하다가 클라이언트 회사로 스카우트되거나 본인이 하고 싶었던 카테고리의 마케터로 지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죠. 저 역시 그런 과정을 겪은 '대행사 출신' 마케터였습니다.


‘대행사 출신’ 들은 많은 기업에서 선호하는 편입니다. 물론 해당 인력이 원래 일을 잘했던 인력이라는 전제하에 ^^; 일 못하는 사람이 대행사에서 광고주 갔다고 해서 달라지진 않습니다 ㅎㅎ  ‘대행사 출신’ 들은 먼저 안 해본 일에 대한 두려움이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클라이언트들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도 무조건 알아보는 버릇이 몸에 배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죠.


하지만 이러한 ‘대행사 출신’ 들에게도 첫 1~2년 동안은 보통 ‘광고주병’에 걸립니다. 심한 분들은 5년 이상, 10년 이상 가는 분들도 있어요. 연예인병 보다 무서운 게 광고주병이라고, 갑질을 하고 대행사 담당자들을 못살게 굴고 비용도 최소한으로 줄이려 합니다. '대행사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내가 다 알고 있다는 말을 하며 담당자들을 달달 볶는 경우도 많죠.


결국 그런 '광고주병'에 걸린 담당자들이 맡고 있는 브랜드는 좋지 못한 결과에 다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은 시간대로 가고 결과물의 퀄리티는 점점 낮아지며, 담당자는 왠지 대행사의 일까지 하는 것처럼 바빠지고, 대행사는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체 불만족 안에서 억지로 일을 하게 됩니다. 당연히 크리에이티브한 결과물이 나올 확률은 더 희박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바로 며칠 전까지도 그 지병에 걸린 분들과 미팅을 하며, 저의 과거 경험을 토대로 그 이유를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안타깝지만 저 역시 한때 심각한 '광고주병'에 걸린 마케터였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1. 절대적인 업무시간을 파악하지 못한다

어떤 일에 대해 오더를 받고 그 오더를 받은 미팅 담당자가 회사에 돌아가 팀에 전달하고, 타 팀에 전달해 담당자를 지정하여 제작물을 만들고, 거래처에 연락하고 컨디션을 조율하며 타사와의 커뮤니케이션도 해야 하고. 보통 광고주의 오더가 떨어지면 이러한 프로세스로 일을 하게 되는데, ‘대행사 출신’들은 그 프로세스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단계를 머릿속으로 밟아 일의 과정을 예측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으로 최단경로로 안내를 받더라도 실제 자동차를 운전하다 보면 차가 막히기도 하고, 누군가가 끼어들기도 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가거나 차가 고장 나는 일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대행사 출신’들은 머리 속으로 모든 일의 과정을 예측하며 실제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지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자신이 담당자의 유일한 클라이언트가 아님을 알면서도 프로세스를 안다는 이유로 그렇게 행동합니다.


2. 본인의 대행사 시절이 미화되어 있다

과거 저는 나름대로 회사에서 인정받던 광고기획자였습니다. 하지만 마케팅 팀장으로 지내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외주와 ‘내 일’은 철저히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대행사 시절'에는 3가지 아이디어를 내면 그중에 하나만 괜찮아도 '아이디어가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케터로 가서는 '아이디어'로만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대부분이며, 10가지 일을 수행하면 10가지가 다 괜찮아야 합니다. 하나만 잘못해도 브랜드에 손해를 입히는 마케팅 활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생각해 보니 '광고주병'과 '꼰대'가 아주 비슷하다


모든 마케팅 활동의 1차 책임은 보통 마케팅 담당자가 지고 가기 때문에 대행사가 가지고 오는 일의 아웃풋들이 모두 자신의 퍼포먼스와 이어집니다. 자신의 대행사 시절을 생각해보면 광고주도 만족하고 회사에서도 인정받았던 기억들이 있는데 현재의 '대행사'는 한 두 개의 좋은 아이디어를 가져와도 나머지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자신의 '대행사 시절'에도 일부의 좋은 아이디어와 대부분의 안 좋은 아이디어를 가져왔던 사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3. 본인의 대행사 시절이 더 고생스러웠다고 생각한다

남자들이 3명 이상이 모이면 종종 군대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들 자신의 경험담과 고생 담을 이야기 하지만 누가 더 고생스러운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가장 맞는 말은 "자기 자신이 갔다 온 군대가 제일 힘들다"입니다. '대행사 출신'들은 과거의 시스템, 과거의 일하는데 어려움 등을 종종 토로하며 "요즘에는 쉽네요" "와 이제는 많이 편하네요"라고 코멘트하기도 합니다.


과거에 어떤 상사 때문에 힘들었고 어떤 회사 때문에 힘들었고 어떤 시스템 때문에 고생했는지 기억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번의 이유와 더불어 대행사의 아웃풋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현재의 대행사가 자신의 과거 '대행사 시절'에 비해 쉽게 일하는 것과 같은 착각에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군대 경험담처럼 '착각'입니다. 광고회사에서 박봉으로 힘들게 일하는 것 누구나 다 여럽습니다. 본인도 그래서 마케터로 오지 않았을까요?


4. 본인이 다니던 회사가 아니라는 걸 모른다

광고회사라고 하더라도 그 종류는 수십 가지입니다. 비슷한 업계라고 하더라도 회사마다 그 시스템과 장단점이 달라 동일한 광고물 하나를 만들어도 다른 프로세스와 다른 인력, 다른 시간이 들 수 있습니다.


앞에서 자신의 '대행사 시절'을 생각하며 일의 프로세스에 대해 상상하며 파악한다고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그 프로세스 중에 절대 파악하지 못할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각 회사의 특징이죠. 어떤 회사는 광고 배너 하나 만드는데 기획자 1명, 막내 디자이너 1명이 일할 수도 있으나 어떤 회사에서는 CD가 관장하고 카피라이터가 카피를 쓰고 디자인 팀장이 컨펌을 하고 막내 디자이너가 수십 개의 시안을 내는 과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본인이 일했던 회사도 프로세스와 인력이 바뀌는데 남의 회사 내에서 이뤄지는 프로세스와 인력 구성 등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5. 직접 하면 훨씬 잘할 것이라 생각한다

브랜드에서 모든 마케팅 활동과 인력들을 내부에 넣지 않고 대행사와 계약하여 일을 진행하는 이유는 바로 '효율' 때문입니다. 수시로 변화하고 다양한 마케팅 활동들을 진행하려면 수많은 인력들이 필요한데 이를 항상 내부에 둘 수는 없습니다. 마케터는 이 점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일을 한 번 요청하는 것은 쉽지만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많은 사람들이 투입됩니다. 하나의 일은 보통 한 사람의 실적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여러 상황들에 의해 좌지우지됩니다. '대행사 시절'을 떠올리며 '내가 하면 더 잘할 텐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대행사'의 컨디션과 인력 구성 등은 알 수가 없을 테니까요.


결국 '갑질'로 폄하되는 '광고주병'의 해결책은 어디에?

제가 다시 에이전시에 돌아온 이후에도 그런 병에 걸리신 분들 자주 봤습니다. 화가 나는 적도 많습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한 때 저도 중증 환자였기 때문에 왜 광고주병에 걸렸었는지,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알게 되었으니까요. 제가 '광고주병'에서 치유되기에는 딱 1년 반 정도가 걸렸습니다. 저는 그나마 무지 빠른 편이라고 하더군요 ^^;


그럼 마케터들이 어떻게 생각을 바꿔야 할까요?

70살에도 탁월한 공감능력을 보여준 영화 '인턴'의 Ben

1. 대행사도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기업'임을 인정하자

'대행사 시절'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가격을 깎고 결과물의 퀄리티를 폄하하며, 일정도 주지 않는 광고주에게 어떤 마음이 들었었는지 기억에 날 겁니다. 아마 그런 광고주에게는 더욱더 정성을 다하기 싫었을 테고요. '대행사'도 마케터가 일하고 있는 회사처럼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회사입니다. 감정적으로 상해서 일하기도 싫어하는데 돈도 안 되는 광고주라면 대행사 입장에서는 '쓸데없이 마케팅 비용만 많이 드는 잘 안 팔리는 상품'에 불과합니다.


2. 본인 말고 다른 클라이언트가 필요함을 인정하자

안타깝게도 일부 회사를 제외하고는 광고회사들의 영업이익률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좋은 광고주 여러 개를 영입하는 것보다는 돈 많은 하나의 광고주를 영입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광고업계의 불문율이 있죠. "백억 광고주던 백만 원 광고주던 똑같이 힘들다"고요. 대부분의 광고주의 예산으로는 한 명의 AE에 하나의 광고주만 붙이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대행사가 어떻다고 평가하기 전에 본인이 얼마나 '우량 광고주'인지를 자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3. 더 챙겨주고 싶은 광고주가 되자

마케터도 광고회사 담당자도 똑같은 직장인입니다. 기업은 이윤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고 직원들은 회사와 상사의 방향을 크게 거스르지 못하고 월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월급쟁이 들입니다. 단순히 돈 주고 '갑'인 '광고주'가 아니라 더 챙겨주고 싶은 '거래처 담당자'가 되는 것이 좋습니다. '대행사 시절'을 생각해보면 예산은 별로 없지만 착하고 매너 좋은 광고주와 돈 많고 힘든 광고주 중에 누구를 더 챙겨주셨는지를 쉽게 기억할 수 있을 겁니다. 


4. 대행사의 한계를 인정하자

대행사는 동종업계도 아닐뿐더러 외부에 있는 회사입니다. 외부에 있는 회사가 아무리 설명을 잘 듣고 공부를 했다고 해서 마케터만큼 회사 내부 사정과 브랜드를 잘 알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업계소식은 더 알기 어렵겠죠. 고작 접할 수 있는 것은 기사들과 외부에 공시된 정보 정도인데 마케터와 같은 수준의 지식과 인사이트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당연히 틀린 정보를 알 수도 있고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대행사는 브랜드의 마케팅 전략을 짜고 예산을 만들어내는 조직이 아닙니다. 잘 짜인 마케팅 전략과 사업계획에 따른 예산이 나오고 그에 맞는 마케팅 예산이 나온다면 - 그 예산에 맞추어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짜고, 그에 따른 액션플랜과 제작물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는 곳입니다. 내부의 일을 외부에서 못한다고 질책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월급통장에서 금방 나가는 사이버머니를 쫓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고, 하고 싶은 건 많지만 할 일이 훨씬 많은 직장인들입니다. 내가 계약서 상의 어떤 위치에 속한 사람인지 보다는 다들 어려운 사회생활을 서로 이해해주고 배려해주는 사람들이면 좋겠습니다. 광고주도 광고회사 담당자도 서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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