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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디미 Jul 01. 2022

전시

여주에서 만나는 <이 계절, 형形의 기억>

2012년 시작한 ‘한국생활도자100인전’은 도예가 100인을 릴레이 형식으로 초청하는 전시회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생활도자’라는 이름은 훨씬 더 넓은 의미로 일상에 스며든 것 같다. 87명의 작가가 릴레이에 참여하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도자기는 점차 우리 삶에서 가까이 두고 즐기는 예술작품이 되었다. 이번 전시를 요즘 식으로 다시 명명하자면, ‘생활 속 도자’에서 비로소 예술로서의 ‘일상 속 공예’를 초대하는 자리가 된 것이다.


<이 계절, 형形의 기억> 전은 권대섭, 박성욱, 박종훈, 장석현, 정재효 5명의 도예가를 느슨히 묶는다(가나다 순). 사실상 다섯 개의 개인전이 개최되고 있는 형식이라 기억에 남도록 엮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공력이 한껏 느껴지는 대형 작품이 각 전시장마다 등장해 또렷한 인상을 남겼다. 각 작가들마다 빚어낸 도자기의 대표적인 ‘형태’를 마주하다 보면, 전시 제목처럼 ‘이 계절, 형形의 기억’이 깊숙이 스며드는 듯하다.     



권대섭

전시장에 들어서면 둥그스름하고 풍만한 달항아리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짐짓 반갑다. 어쩌면 달항아리는 전통이자 현대를 잇는 하나의 메타포로서 삶에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이 아닐까.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도자기를 직접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 나라는 한 손에 꼽았다. 달항아리는 근대에 단절된 조선 공예의 기억을 품고 있다. 위아래를 붙여 빚어낸 달항아리의 비정형적이면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은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다. 


물질이 차고 넘치는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왜 다시 공예를 찾을까. 기계로 똑같이 찍어낸 풍요 속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손으로 빚어낸 항아리며 병, 연적이 주는 맛이 그립기 때문이 아닐까. 21세기에도 흙은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다. 도예가는 여전히 가소성의 한계와 불에 견디는 힘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체득된 감각으로 도자기를 빚는다. 작가의 말처럼 ‘극한상황 그 어딘가에 정점이 존재’하기에 ‘고집스럽게도, 언제나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다.      



박성욱

그렇기에 도자기가 품고 있는 고착된 형形의 기억 속에는 많은 시간이 켜켜이 누적되어 있다. 완벽하지 않기에 의미 있는 수많은 분청 도자기 편片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이룬다. 분청토에 백토를 담그는 덤벙 기법을 사용한 도편陶片들은 먹의 농담처럼 짙고 옅은 색으로 완성된다. 흙과 불이 지나간 흔적은 동일한 평면에서 만나 정렬된다. 각각의 편들은 ‘인연으로 연결’되고 그 자체로 한 폭의 회화가 된다. 


분청 회화에서부터 분청 달항아리까지, 그가 그리는 곡선-원형形은 보고 있노라면 한없이 바라보게 되는 매력이 있다. 완벽한 원형이 아니기에 개개의 원은 각각 하나의 독립적이고 특별한 개체가 된다. 일견 자유분방해 보이는 분청의 미감을 완성하기까지 작가는 수없이 시도했으리라. 닮은 듯 조금씩 다른, 그럼에도 온전히 완성된 느낌을 주는 작품으로서 박성욱의 도자기는 그 자리에 존재한다.     



박종훈

형形을 완성하기까지 축적된 기술을 갈고 닦는 많은 기법이 있겠지만, 도예에서 물레를 빼놓고 말할 수 있을까. 작가의 다관이며 잔을 보고 있으면 일필휘지로 그려낸 듯 숙련된 손놀림이 절로 연상된다. 백자, 청자, 분청과 옹기의 경계를 넘나들며 옻칠까지 이어지는 작가의 다양한 물성적 시도를 보고 있으면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예술? 기술이 끝나는 곳에 있지. 나는 요즘도 늦도록 물레에 앉아있다. 예술과 만나기 위해.”


물레질을 두고 “참 재미있다, 내 말을 잘 들어서”라고 말할 수 있는 데는 그만한 공력이 드러나는 것이다. 작가는 여전히 긴 시간을 물레 앞에서 보낸다. 하나의 사발을 빚을 때마다 그는 조선의 백성과 장인을 만난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돋보이는 다양한 쌍이잔雙耳盞을 보고 있으면, 전통의 기술에 현대적 감각을 더한 작품이 바로 이런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상에 가까이 두고 가끔은 꺼내보고 싶은 삶 속의 공예 그 자체이다.     


장석현

삶에 가장 가까웠던 우리의 도자기를 말하자면 단연 옹기가 아닐까. 왕실부터 일반까지 널리 쓰였고, 현대까지 이어지는 옹기의 실용성과 심미적인 아름다움은 지금까지도 많은 도예가들이 옹기의 매력에 빠져드는 바탕이 되는 듯싶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항아리의 곡선과 색을 닮은 배경과 좌대 위, 작가의 푸레도기가 고요하게 놓여져 있다. 은은하고 깊은 조명 속에서 작가 특유의 금속적이고 세련된 색감과 형태가 돋보인다. 


‘푸레’는 소성 과정에서 그을음을 먹으면서 색이 ‘푸르스름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작가는 전통적인 옹기 제작 기법을 활용하면서도, 푸레함函 등의 기형器形에 직선을 접목해 현대적이고 고급스러운 푸레도기를 제작했다. 작가의 말처럼 “세상 모든 색과 질감을 순수히 담아낸 푸레의 깊이에 관한 명상”을 담아낸 골호骨壺 작품은 생명과 죽음이 만나는 자리를 담담하고 묵직하게 빛내고 있다.     



정재효

우리 모두는 우리가 살아온 시간의 총합이듯이, 모든 공예품은 작가의 총체적 사유로부터 나온다. 다양한 기법과 문양이 돋보이는 분청 작업은 작가에게 훌륭한 표현 수단이 된다. 역사의 시간이 누적되는 동한 하늘 아래 새로운 작업이 없을 듯한데, 작가의 손은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를 빚고 마음 속 그림을 옮긴다. 짙은 분청토 위를 가로지르며 죽죽 그어진 듯한 백토의 흰 선은 무성한 풀 같기도 하고 흐르는 물 같기도 하다. 


“내가 그리는 선의 구조는 그냥 머릿속에서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손 가는 대로 그려지는 것도 아니다. 이제껏 보아온 자연의 모습. 느꼈던 그 구조의 선들. 만져보았던 촉감의 부드럽고 또 거친 모습들……. (후략)” 희고 검은 불규칙한 점, 선, 면이 자유 분방하고 활달하게 기면을 채운다. 늘 수직과 수평을 마주하는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일상 속에서, 작가의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만큼은 공예가 주는 비정형적이고 자유로운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국내 유수의 미술 전시와 아트 페어에서 만날 법한 작품을 생활도자라는 이름으로 묶어낸 이번 전시는 여러 의미에서 뜻깊다 할 수 있다. 초대에 흔쾌히 응해준 작가들의 작업과 전시 연출은 생활도자의 격을 한층 끌어올렸으며, 관람객에게 도예가의 대형 작품뿐 아니라 보다 다양한 소품까지 감상하는 즐거움을 주었다. 올 봄에서 여름까지, 이 계절 다양한 도자기의 형태와 미감을 감각하는 경험을 더욱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기를. 


앞으로 한국도자재단을 통해 만나게 될 더욱 많은 작가들의 작업이 기대되는 전시였다. 권대섭 선생의 작가의 말로 글의 마무리를 대신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지금까지 만든 작품 중 최고를 보여달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다음 가마에 나올 바로 그것이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그 명품은 아직 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전시 기획. 박민혜 한국도자재단 큐레이터

글. 수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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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을 받아서 급하게 쓴 글인데, 정작 쓸 일이 없어져 웹에 공개:) 브런치의 순기능이다. 중간에 좀 이상한 일이 있었지만, 이상한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그나저나 정말 좋은 전시였다. 날씨가 오락가락 하고 있지만, 오늘 같은 날이면 참 여주 가기 좋은 날씨다.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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