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에 잠이 깼다. 대만에서 살았기에 크고 작은 지진을 여러번 경험해봤는데도 오롯이 혼자 있는 타지에서 겪는 지진은 너무 무서웠다. 오래된 건물이 끼익 끼익 거리면서 흔들리는 소리가 났고 빠르게 여권을 챙기고 옷을 입었다. 문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지진이 멈췄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여전히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구글을 검색했다. 치앙마이에서 머지 않은 미얀마에서 발생했던 5.9의 지진. 아주 오랜만에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진에 잠이 깨고 다시 낮잠을 잤는데 꿈에 엄마가 나왔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고 버스였나, 기차였나 무슨 교통수단이었는데 엄마를 찾아야 하는데 엄마가 없었다. 그닥 슬프지도, 인상깊지도 않았고 그저 엄마가 있어야 하는데 없다 정도로 꿈은 끝이 났다. 어디 나가기에 시간은 좀 늦었고 지진 때문인지 마음도 뒤숭숭해 배달 음식이나 시켜먹어야지 하던 찰나 아빠에게 문자가 왔다.
기관지 절개를 하고 위루술까지 진행했던 엄마는 정기적으로 교체를 받아야 했는데 이 날이 그 날이었던 모양이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아빠는 뱃줄 시술을 잘 했다며 문자를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귀국 하라는 메세지가 왔다. 보자마자 바로 비행기표를 샀다. 다행히 치앙마이에서 한국 가는 표는 대부분 저녁에 있었고 태국 시간으로 오후 4시쯤 알게 되었으니 왠만한 저녁 표를 다 살 수 있었다.
비행기 표를 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엄마는 세상을 떠나셨다. 이 때의 기분, 사실 일주일이 지난 지금 기분도 내가 태어나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다. 우리엄마는 꼬박 여섯해를 아팠고 3년 반을 병원 생활을 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등산 아니 자기 발로 땅을 짚어본건 2년 반 전 대학병원의 재활치료가 마지막이었을거다. 자기 입으로 말도 하지 못하고, 물도 마시지 못하고, 밥도 먹지 못하는 생활이 길어지면서 나는 엄마가 더이상 고통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차라리 엄마가 돌아가시길 바랬던 적도 수도 없이 많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은 내가 기다려온 순간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지진보다 더 몸을 바르르 떨며 울었다. 소리내어 한참을 울고 또 울고 또 울고. 마치 엄마가 처음 기는 것을 봤을 때, 엄마가 처음 중환자실을 갔을 때, 엄마가 팔이 부러져 수술을 해야했을 때 그럴 때 마음이 쿵 떨어졌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지하로 마음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짐을 싸는 것 밖에 없는데 엄마의 숨은 멎어가고 마지막 능력이라는 청각도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아빠 역시 엄마의 죽음을 믿을 수 없어 사망 선고를 받은 후에도 다시 돌아가 확인을 해봐도 되냐고 물었단다. 의사들 앞에서 아빠가 뭘 알겠냐만은 그래도 확인을 하고 싶어 코 아래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는 아빠에 말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엄마가 더이상 숨을 쉬지 않음을 확인하자 아빠는 우리가 쓴 메세지를 엄마에게 전해주었단다. 그렇게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눈이 많이 내렸던 날 세상을 떠났지만, 엄마의 장례식이 있던 주말은 날이 참 포근했다.
누가 봐도 배낭여행객 차림으로 큰 배낭을 메고 엄마의 빈소에 들어갔다. 아빠와 친척들이 있었다.
그리고 참 고운 엄마의 사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언니는 조금 있다 입관을 하면 엄마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어쩌면 언니도 정신이 없는거 같았다. 언니는 나를 달래려고 하고 있었다. 비행기 연착에 눈길에 길까지 밀리면서 나는 엄마의 입관 4시간 전, 발인 22시간 전에 겨우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엄마를 떠나보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세상을 떠난 사람을 처음으로 마주한 건 2년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다. 그때는 할머니이기도 하지만 숨이 멎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있었다. 장례 지도사에게 손을 잡아도 되냐고 먼저 물어봤을 정도니까. 하지만 엄마의 입관식에서 나는 엄마를 끌어 안고 하염없이 손을 주무르고 볼을 어루만졌다. 나는 한없이 엄마를 부르고 또 불렀다. 엄마 사랑한다고. 엄마. 엄마. 엄마 힘들었지. 엄마. 엄마. 엄마 아프지마. 엄마. 엄마 사랑해. 엄마 낳아줘서 고마워. 울부짖으며 엄마를 불렀고 그런 나에게 그렇게 슬퍼하면 엄마가 편하게 가지 못한다는 장례지도사에 말에도 나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해서라도 엄마가 가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엄마의 볼은 차가웠다. 나의 귀국이 정확하지 않다보니 입관을 다소 늦게 한 편이었는데 그래서였을까. 엄마 귀는 이미 보라색으로 변해있었다. 말랑했던 엄마의 볼은 이미 아주 차가워졌다. 마치 스테인리스 제품을 한 겨울에 만지는 것처럼 엄마의 볼은 온기가 하나도 없이 그렇게 차가웠다. 손 마디가 얼어버릴 정도로 이미 엄마는 변해있었다. 울음을 쉽게 그치지 못하고 엄마를 계속해서 부르자 주변에서 나를 말렸고, 장례지도사는 어머니가 너무 일찍 가신거 같다며 마음이 아프다는 말과 함께 하고 싶은 말을 관에 적으라고 했다. 엄마와 함께 태워질 이 관이라면, 지금은 이렇게 쉴 틈없이 울고있어도 글에는 예쁘고 귀엽게 나답게, 막내딸 답게 써야지 하는 생각이 앞섰던 것 같다.
[엄마 사랑해요. 이제 아프지말구 재밌게 지내고 있어. 우리 또 만나!]
청실 홍실, 온갖 생화로 장식한 엄마의 관은 그렇게 덮여졌고 우리는 엄마의 노잣돈까지 꽂았다. 예전엔 노잣돈을 왜 꽂나 했는데 참. 엄마가 편히 눈감을 수 있다면 내 모든 재산을 털어서 그 안을 돈으로 채우고라고 싶었다.
입관을 마치고 다시 빈소로 돌아오니 정말 오랜만에 본 친가 친척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모들을 보자마자 나는 고모들과 함께 자주 만나던 그 초등학생으로 돌아간것처럼 끌어 안아 울었다. 어쩌면 좋니. 어쩌면 좋니. 사람들을 엄마의 영정 사진 앞에서 참 많이도 울었다. 엄마의 사촌 오빠들도, 사촌 동생들도 아빠의 친척 식구들도. 엄마의 친구들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슬픔 그리고 그동안 투병으로 고생했던 안타까움을 눈물로 엄마 앞에서 표현했다.
고마운 친구들이 밤이 새도록 옆에 있어주었다. 괜찮다고 가라고 했지만 막상 옆에 있어주니 참 좋더라. 친구들을 보내고 싶었던 마음에는 친구들이 불편할까봐 하는 걱정, 그리고 그것에 더해 친구들이 불편하는 것을 걱정할 여력이 없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일찍 돌아가주길 바랬는데 친구들은 도리어 고집을 부리며 남아있었다. 지나고보니 그게 맞았다. 그냥 친구들이 옆에 있어서 계속 이야기 하고 술을 마시고 무언가를 먹고 그렇게 정신없이 장례식이 지나가는게 맞는 것 같았다.
예상치도 못한 많은 손님들을 맞이하고 엄마를 보내러 가는 길. 10년 전쯤 고모를 화장한 후 유골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부서지지 않은 사람 형태의 유골, 그러니 두개골을 그대로 본 적이 있는데 그게 큰 트라우마로 남더라. 그래서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그렇게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라면 어떤 형태의 엄마이든 기억해두고 싶기도 했다. 스스로 갈등하던 찰나, 아빠와 언니는 당연하게 유골을 확인하겠다고 했고 마치 서류봉투 안에 가득 담길 정도로 변해버린 엄마의 뼛조각들을 마주했다. 구역질이 곧바로 치솟았지만 빠르게 창문이 닫히고 분쇄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안녕. 엄마 안녕. 나는 멀어진 유골에 대고 계속 외쳤다. 엄마. 엄마. 엄마 사랑해. 엄마 안녕.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야하는 순간 나는 유골함을 끌어안고 마치 엄마가 숨을 쉬고 있는 것 마냥 계속 외쳤다. 엄마 사랑해. 엄마. 엄마. 사랑해. 엄마 너무 고생했어. 엄마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엄마 너무 사랑해요.유골함에 담겨 나온 엄마는 화장터의 열기지만 마치 살아있을 때의 엄마의 손처럼, 엄마가 덮던 이불처럼 따뜻했다.
한명씩 다 인사를 마치고 유골함은 우리가 정해둔 자리에 놓여졌고 화장의 열기 때문에 바로 유리문을 닫지 않는다고 하여 나는 한참을 앉아서 엄마를 어루 만졌다. 엄마가 병원에 누워있었을 땐 엄마의 굳어버린 손을 한없이 쓰다듬었는데, 이제는 엄마가 담긴 유골함을 만지는 것 밖에 할 수 없다는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쓰다듬다가 또 다시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엄마 보고싶어. 엄마. 엄마 미안해. 엄마 사랑해. 엄마. 엄마.
지금 사는 집에 엄마가 함께 산 적은 거의 없다. 병원 생활을 위해 소도시로 이사를 왔고, 이사온 직후부터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속 병원 생활을 했으니까. 그럼에도 세상에 엄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뒤의 집의 공기는 마치 달랐다. 잠이 잘 오지 않았고 자다 깨서 아빠에게 가서 기분이 이상하다며 울었다. 아빠 역시 엄마 면회를 몇시에 가야하나 생각했다며 자기가 잠시 정신이 나간것 같다고 말했다.
자그마치 6년. 심지어 엄마가 말을 하지 못하고 음식을 못 먹은지는 2년하고도 반이다. 그 긴 시간동안 우리는 이별을 준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예상했던 이별임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가족을 떠나보내는 일이 이렇게 아플거라고 생각 못했다.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감정이었다. 엄마가 더이상 아프지 않을거라는, 더이상 슬픈 것, 그러니까 굳어버리는 엄마의 손발이나 엄마의 욕창이나 이런 아픈 엄마를 마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안도 외에는 너무나 사랑하는 존재가 완전하게 세상에서 소멸했고 남아있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함에서 오는 낯선 감정이 매일의 나를 들쑤시고 있다.
엄마가 나을 수 없는 병이라는 걸 알고, 퇴화하는 그러니까 서서히 죽어가는 뇌질환임을 알았을 때는 차라리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나 수술이라도 해볼 수 있는 그런 병을 가진 환자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그래도 어느 스님 말씀처럼, 가족이 오래 아프다 돌아가시면 아픈 가족은 고생하고 남겨진 사람들은 이별 준비를 오래할 수 있어서 회복을 더 잘 할 수 있다고 했었다. 반대로 너무 갑자기 돌아가셔버리면, 아픈 가족은 오래 고생 하지 않아 편할지 몰라도 남겨진 가족들은 오래도록 그리워하고 힘들어할거라고. 그렇다면 또 착한 우리 엄마는 우리에게 너무 오랜 슬픔을 주지 않으려고 그 오랜 고생을 하고 버텨내셨나보다.
[마음을 추스리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엄마의 죽음을 통해 처음으로 온전하게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무너져버린 마음을, 슬픔에 잔뜩 녹아내린 마음을 다시 내 원래의 모양대로 만들어가는 과정. 이별하는 시간이 길었으니, 이별을 극복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오랜 시간 슬퍼하고 힘들어했기에 이젠 엄마가 준 삶의 기회를 너무 슬퍼하면서 보내지 않았으면 한다.
장례식장에서 향을 태우는 건 망자를 불러오는 행위라고 했다. 그래서 난 이제부터 여행을 다니면서 절에 가서 향을 피우기로 했다. 여행을 좋아했던 엄마이니만큼, 모든 불을 피우면서 엄마를 생각해야지. 그렇다면 엄마는 늘 나와 함께 여행다니는 것일테니까.
엄마 사랑해요.
많이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