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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베리 Feb 24. 2024

도착

 이 여객기는 뉴욕 공항에 도착하였으나  
폭설로 인해 활주로가 미끄러워
견인 차량의 도움을 받을 예정이니
잠시 기내에서 안전하게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승객 여러분의 양해 바랍니다.


 대략 이런 내용의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던 것 같다.


 비행기 작은 창을 통해 어둠 속에서 눈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비행기 착륙 후 30여 분이 지나서야 뉴욕, 그러니까 시부모님께서 기다리시는 땅에 발을 내디뎠다.


 짐을 찾고 나니 밤 열 시가 훌쩍 넘었다. 로밍의 문제인지, 애플리케이션의 문제인지 택시 호출 앱 접속이 되지 않았다. 공항 와이파이로 접속을 시도하는 가운데 눈발은 더욱 거세졌다. 눈은 발목 높이까지 쌓이고 있었다.


 "우리, 오늘 공항 근처에서 자고 내일 출발하면 어때요?"

 "내일도 눈이 많이 내린대. 게다가 길까지 얼어붙으면 가기 더 힘들어지니 차라리 지금 출발하는 게 나아요."

내 제안에 남편이 답했다.


 밤 열한 시 무렵. 공항의 느린 와이파이로 택시 호출 애플리케이션에 접속하여 다행히 택시 한 대를 잡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미리 알아본 가격보다 70불이 더 비쌌지만 폭설에 대한 값이라 충분히 수긍다.


 어두운 택시 안에 올라타자 장시간 비행으로 인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택시가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차창을 거칠게 때리는 거센 눈보라 소리에 피로감을 느낄 여유가 사라졌다.


 '집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해 주세요. 어머님을 꼭 뵙게 해 주세요.'


 새벽 한 시. 눈을 덮고 잠든 듯한 고요한 타운하우스에 들어섰다. 택시 기사님과 함께 목을 쭉 빼고 나란히 줄지어 서있는 꼭 닮은 건물 사이에서 목적지를 찾다가 현관에 환히 불이 켜진 집을 발견했다. 차가 멈춰 서자 시아버님께서 외투도 제대로 걸치지 않으신 채 황급히 달려 나오셨다.


 "아버님! 길이 미끄러워요. 저희가 그쪽으로 갈 테니 나오시지 마세요!"


  아버님과 간단히 인사 나눈 뒤 황급히 택시 기사님이 꺼내준 가방을 챙겨서 집으로 들어서는데 집으로 들어가셨던 아버님께서 지폐를 손에 쥐고 나오셨다. 이미 팁을 지불했다고 말씀드렸음에도 눈이 이토록 휘몰아치는데 자식들을 안전히 데려다준 게 너무나도 고맙다며 기사님 손에 팁을 쥐여주셨다. 내게서 가방을 뺏어 끌고 가시는 아버님의 뒷모습에서 아버님의 안도감을, 그간의 불안을 느꼈다.


 집으로 들어서자, 어머님과 마주했다. 어머님은 눈빛만으로도 사람은 물론이고 귀신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던, 어떠한 불의나 시련에도 절대 굽어지거나 부러지지 않을 것 같던 강하고 꼿꼿한 분이셨다. 그런 어머니께서 지팡이를 의지한 채 작고 가냘픈 몸을 지탱하며 간신히 서 계셨다. 황망한 마음에 어머님께 가까이 다가가자, 내 품에 안기다시피 기대시며 나를 껴안으셨다. 어머님 심장이 하늘을 처음 나는 작은 새의 날갯짓처럼 힘겹게 팔딱였다. 내 결혼을 앞두고 잠시 한국에 방문하셨다가 미국으로 돌아가시는 길에 나를 안으셨던 그 힘은 다 어디로 빠져나갔을까. 이후 10년이라는 결혼 생활 동안 어머니와 내 사이에 철조망이 겹겹이 설치되어 우리는 서로를 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밤, 우리는 다시 십여 년 전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여겨지던 어머님께서 이제는 아홉 살짜리 아들보다도 여리게 다가왔다. 어머님께서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마치 가느다란 실오라기가 빠져나오듯 어머님 입을 통해 얇은 목소리가 새 나왔다.


 "너희들 못 보고 죽는 줄 알았다. 이렇게 너희를 보다니 꿈을 꾸는 것만 같구나. 정말이지 너희도 못 보고 죽는 줄 알았단 말이다."

 "어머님, 감사해요. 이렇게 다시 뵐 수 있어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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