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천년이야. 난 뭐 천년이나 슬퍼? 난 지금 겸허히 운명을 받아들이고 씩씩하게 사는 당찬 도깨비야. 천년만년 가는 슬픔이 어디 있겠어. 천년만년 가는 사랑이 어디 있고.”
“난 있다에 한 표!”
“어느 쪽에 걸 건데? 슬픔이야, 사랑이야?”
“슬픈 사랑?”
- 드라마 <도깨비> 중에서
한때는 나도 슬픈 사랑을 꿈꿨다. 사랑을 드라마나 소설로만 경험하던 시절. 어른이 되면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애절한 사랑을 해보리라 다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슬픈 사랑을 꿈꾸던 열여덟의 내가 원망스럽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해서, 내가 나쁜 남자들을 만났던 거야.
슬프면서 동시에 사랑일 수 있을까? 잠깐 슬플 수는 있지만 천년만년 슬프기만 하면 그게 정말 사랑일까? 만약 슬픈 사랑이 있다 해도, 그것은 ‘바른’ 사랑은 아닐 것이다. 나를 계속 슬프게 만드는 사람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닐 테니까.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대를 계속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답은 두 가지다. 더 큰 사랑을 찾아 떠나거나, 내 사랑을 줄이거나. 결국 모두 이별이다. 당장 떠나거나, 천천히 멀어지거나. 혹여 이별하면 더 이상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없을까 두려워 슬픈 사랑을 붙잡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도 길은 있다. 내가 나를 사랑하면 된다. 그를 향하던 관심과 애정을 온전히 나에게 돌리자. 그에게 쏟았던 돈과 시간을 모두 나에게 투자하자. 그럼 언젠가 나는 ‘바른’ 사랑을 누릴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이별 노래를 싫어한다. ‘그때 내가 달랐더라면 너를 붙잡을 수 있었을까’ 같은 뒤늦은 후회나 ‘너만을 평생 그리워할 거야’ 같은 헛된 다짐이 담긴 문장들. 그런 노래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온다.
“진작에 잘하지 그랬어.”
“그 정도면 스토커야.”
더 몰입하면 이런 말도 덧붙인다.
“어차피 다시 만나도 똑같은 이유로 또 헤어질 거야.”
“우리 한때 자석 같았다는 건, 한쪽만 등을 돌리면 멀어진다는 거였네.”
- 에픽하이 <연애소설> 중에서
반대로 좋아하는 이별 노래도 있다. 자석이라니! 이별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 막대자석이 등을 돌리는 모습을 그려보다 문득 생각한다. 그리고 자석처럼 단호하지 못한 채 미련을 갖는 미련한 화자에게 말한다.
“있을 때 잘할 것이지.”
한때 나와 한 몸처럼 여겨지던 사람이 어느 순간 남보다 못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이별이다. 어째서 우리는 지나간 연인과 친구로 남을 수 없는 걸까? 한때는 가족보다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사이인데.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에, 서로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기 때문에. 영화에서도 비밀을 아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아군이 되거나, 가장 먼저 제거되지 않던가. 현실에선 영화처럼 제거할 수 없으니 멀리할 수밖에.
이처럼,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는 건 결국 그 사람과 자신의 비밀을 나누는 일이기도 하다. 연애나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믿음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를 사랑한다는 단단한 믿음. 잠깐 슬픔이 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기쁜 사랑으로 이어질 거라는 믿음. 그리고 그와 내가 기꺼이 비밀을 나눌 수 있다는 믿음. 서로의 비밀을 끝까지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 누군가와 함께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비밀을 나눈다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