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물을 디딤돌로 바꿔준 비상구 앞에서의 20분
작가들에게 나눠줄 프로필을 가지고 방송국까지 왔는데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절실히 원하다면 한 번의 거절에 좌절하지 말자. 안 들여보내준다고 포기하지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거절당했다고 바로 돌아가지 않고 로비에 앉아서 작전을 세웠다. 16층 예능국까지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봤다. 어떻게 하면 올라갈 수 있을까? 무엇이든 답을 구한다고 금방 떠오르지는 않는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로비를 둘러봤다. 직원들, 방문객들, 엘리베이터...그러다가 무모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비상 계단을 통해서 올라가자!'
처음에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방송국이 어떤 곳인데 쉽게 올라갈 수 있겠어?’
그러나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일단 시도해보기로 했다.
비상구를 찾아봤다. 비상구가 여러 개 있었지만 담당하는 보안요원이 있어서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로비 구석의 보안요원이 지키고 있지 않은 비상구를 발견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문고리를 돌려봤다.
'열려라!!!!!'
하지만 문고리는 돌아가지 않았다. 예상대로 문은 잠겨있었다. 비상구 밖에서는 열 수가 없었다. 하긴 그렇게 쉽게 열리면 아무나 방송국에 침입할 수 있었겠지...
방송국까지 왔고, 비상구를 통해서 올라가는 것까지 시도해봤으니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가슴 뛰는 WOW경험들은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시도해본 결과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WOW액션> 문이 닫혀있지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 기다린 후에 문이 열리면 비상계단으로 올라가자. 미국에서 인턴을 할 때 고층 빌딩의 저층부에서 근무하는 직원이 담배를 피우려고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대신 비상계단으로 내려오는 모습을 자주 봤기에 한번 기다려보기로 했다. 문이 열리길 기다리면서 준비한 콩트를 연습했다. 연습한지 20분도 안 되어 '찰칵' 소리가 났다. 열린 문을 자연스럽게 잡고서 들어갔다. 직원이 ‘얘네 뭐지?’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는데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네이트와 대화를 하면서 계단을 올라갔더니 아무 말 없었다.
16층을 목표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벽에는 CCTV촬영중이라고 써져 있다.
'아, TV에 나가기 전에 미리 CCTV로 데뷔할 수도 있겠구나.'
혹시나 보안요원이 잡으러 올까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올라갔다. 잡히기 전에 어서 16층까지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계속 계단을 올라갔다. 중간에 비상구가 열려있는 층에서 비상계단을 빠져 나왔다. 복도 끝에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엘리베이터에 탑승 후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16층 버튼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런? 8층까지 밖에 안가네. 아. 맞다. SBS에 오기 전에 네이버에서 검색하다가 알았는데 사실은 2개의 건물로 나뉘어져 있다고 했다. (네이버는 뭐든지 알고 있다!) 옆 건물로 건너가야 16층에 올라갈 수 있겠구나!’
우선은 8층 화장실에서 태권도복으로 갈아입기로 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SBS에 용무가 있어서 온 사람처럼 행동하며 지나가는 직원에게 예능국을 가려 한다고 이야기하자 친절하게 옆 건물로 이어지는 중간문을 카드키로 열어주었다. 더 이상 계단을 오를 필요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목표였던 16층에 도착했다.
16층에 도착하니 사무실 입구의 중간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문 앞에서 누군가가 밖으로 나오면서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목표를 이루기 바로 한 단계 앞까지 왔지만 기다리는 도중에 다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다들 일하고 있는데 들어갔다가 쫓겨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 관문이다. 여기까지 잘 왔지만 마지막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잠시 후 문이 열렸을 때를 틈타서 들어가니 칸막이로 된 사무실로 가득했었다. 다들 열심히 근무하는 분위기였다. 아무도 문이 열렸다고 이쪽을 쳐다봐주지 않았다. 우선은 네이트랑 같이 프로필을 돌리기로 했다.
처음 찾은 곳은 ‘야심만만’팀이었다. 회의 중이었는데 살며시 다가가서 인사를 했다. 순간 10명 정도의 제작진이 우리를 주시했다. 관심을 끄는데 성공한 우리는 홍보를 시작했는데 다행히도 반응이 좋았다. 맨 처음 받은 질문은 어떻게 올라왔냐는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 설명을 했다. 보안요원이 안 들여보내주길래 비상계단을 타고 올라왔다고 대답을 하자 웃음이 빵 터졌다. 이때까지 이런 사람이 없었다면서 좋게 봐주셨다. 일손을 잠시 멈추고 어떻게 외국인이랑 같이 하게 됐는지 묻고 나보고 만화주인공처럼 생겼다며 관심을 가져주었다. 야심만만보다는 일반인이 출연 가능한 스타킹팀에 꼭 가보라고 하며 스타킹 사무실을 가리켜주셨다. 지금 글을 쓰면서 생각해봐도 황당하고 무모한 도전이었는데 보안요원에 연락을 해서 쫓아내는 대신에 열정을 보고 다른 기회로 연결해주신 제작진께 다시 한번 감사 드린다.
복도 건너편의 스타킹 회의실에 찾아가서 인사를 하고 프로필을 돌렸다. 프로필 만들기를 너무 잘했다. 다들 짧은 시간에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프로필에 재미있게 표현한 홍보 문구를 작가들이 좋아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가 만든 코너를 보여줬다. 엉터리 태권도 사범인 내가 네이트에게 태권도를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어처구니 없는 물건을 강매하거나 가짜 태권도를 가르쳐 주는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발연기였다. 그때 스타킹 팀에서 촬영을 했는데 설마 아직까지 남아있진 않겠지?
왜 공채는 보지 않았는지, 개그를 하고 싶은 이유는? 영어, 일본어 실력은 어느 정도? 일본어 능력시험 점수? 통역도 재미있게 해줄 수 있나? 일당이 적을 수도 있는데 관심이 있는지를 물어봤다.
기쁜 마음으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어떻게든 점이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윤신혜 작가님이 원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하는 모습에 감동했다며 무엇을 하든 성공할 거라고 이야기 해줬다. 나에게 정말 큰 힘이 되었다. 처음 본 사람에게, 어찌 보면 무모한 도전을 하는 사람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준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방송에 나올만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서로 연락하자고 했다. 통역이 필요하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예능국 안에 있는 다른 프로그램에도 프로필을 돌리고 나왔다.
비록 들어갈 때는 비상계단으로 들어갔지만 나올 때는 당당하게 정식 출입구로 나왔다. 방송국에 오기 전에도, 도착해서도 많은 고민을 했지만 포기하기 전에 한 번 더 차별화된 시도를 한 덕분에 목표를 100퍼센트 달성했다. 그렇게 목표를 달성하고 SBS 정문을 나섰다. 올 때와는 다르게 가뿐한 마음으로 역으로 향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SBS에 찾아가 아는 사람이 '아직' 없다는 대답을 한 후 출입을 거절당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비상계단을 통해 예능국에 가서 홍보한 것이 내 인생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칠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