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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Feb 08. 2022

운민의 서라벌 별곡 (1)

최부자 집을 찾아가다.

     

신라 천년의 고도로 알려진 경주, 가는길마다 도사려 있는 왕릉과 탑들은 역사의 향기를 진하게 머금고 있다. 한때는 역사여행지로만 알려졌던 경주도 황리단길 주변으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박물관 너머 반월성을 지나 계림숲을 걷다보면 그 끝자락에 남천이 흐르는 한옥마을이 자리한다. 교촌 또는 교동마을이라 불리는 이 마을은 예로부터 경주향교가 자리했고, 그 담장너머에는 99칸 규모의 거대한 기와집이 바로 눈에 띈다. 최부자집이라 불리는 이곳은 단순히 그곳이 품고 있는 부(富)뿐만 아니라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현재 경주최부자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는 최창호 이사님을 만나 함께 최부자집의 역사를 알아가보도록 하자.     


1. 안녕하세요. 제 고향이 울산이고,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좋아해서 경주를 종종 찾았는데요. 여기 교촌마을의 변화가 조금 낯설게 느껴집니다. 경주향교와 최부자 집이 있는 이 마을을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 우선 경주는 단순히 신라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대도시의 지위를 줄곧 유지했습니다. 한 도를 관장하는 관직을 관찰사라 하는데 대구에 관찰사를 두었지만 조선 후기 경주부윤은 그 동급의 지위라 할 수 있죠. 여기 교촌마을은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왔던 곳입니다. 바로 원효대사의 요석궁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향교가 들어섰습니다. 원래 향교 주위에는 마을이 들어서지 않는데 최부자 7대이신 최언경께서 이곳으로 터를 잡은 후 이곳이 점차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2. 보통 종갓집 하면 명칭이 안동김씨종택, 문헌공파 세거지 등 이렇게 본관 또는 조상의 명칭을 따서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 이름은 최 부자댁이라 칭하는게 독특하더라고요. 그런 이유가 있습니까?     


- 보통 중시조 명칭을 따서 무슨 고택이라 이름을 붙이기는 합니다만 하도 예전부터 주위에서 최부자라고 칭해서 그 이름이 굳어진게 아닌가 싶습니다. 원래 저희 가문은 지금의 경주 내남면에 있는 이조라는 동네에서 정무공 최진립부터 7대까지 부가 형성되었습니다. 세가 계속해서 커지다가 지금 이 자리에 들어온 거지요. 집을 욺기기 전 많은 준비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가 앞에는 물이 있어도 뒤에 산이 없어 풍수지리를 보완하기 위해 집 뒤편을 숲을 조성해서 건물 자체를 이 자리로 욺겼습니다. 후손들이 계속 분가해서 세대를 거듭할수록 마을 전체가 최씨일가의 집성촌이 되었죠. 기와를 보시면 오래되 보이는 것이 아직도 남아있는 최씨일가의 저택이고, 옆으로 경주시에서 새롭게 조성한 건물들이 들어섰습니다. 보통 비가 오면 하천이 범람한다고 하지만 월성을 따라 굽이쳐 있어 이곳은 홍수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3. 최씨 가문을 이야기하면서 경주 최씨 정무공파의 시조 격인 최진립 선생에 대해 이야기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진왜란에 참전했고, 병자호란 당시 종들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지요. 지금까지 전사한 두 노비의 공을 기려 제사까지 지낸다는 이야기가 저한테는 흥미로웠습니다.     


- 충노불망비라 해서 종가 옆에 충성스러운 노비를 기리는 비석이 있습니다. 바로 옥동과 기별이라 불리는 노비였죠. 현재도 우리 후손들이 제사를 지냈습니다. 며칠 전에 정무공의 제사를 지내고 그 상을 들고 그대로 노비들에게 제사를 지냈죠. 생각을 해보면 집안 내력 자체가 인본 사상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정무공의 기록에 보면 임지에서 사사로운 것이라도 선물을 절대로 받지 않았다고 하죠. 추운 경흥에서 임기를 마치고 올 때 추워 보여서 목도리 담지를 선물로 받았지만 바로 거절하기 미안해서 방에서 들어가고 나올 때 걸어두고 나왔다고 합니다. 최진립 장군의 후손 중에 동학을 만든 최제우 선생이 있습니다. 그분의 저작인 용담유사에서 정무공 이야기가 여러번 나옵니다. 동학의 인내천 사상도 아마도 거기서 유래된 것이지 않을까요?     


4.지금의 최부자 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 하면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이가 없도록 하라” “집안의 재산은 1만석 이상을 넘지 않도록 하라” 이런 이야기가 있죠. 실제로 최부자 집에 내려오는 가훈인지 알고 싶습니다.     


- 2대조이신 송정공 최동량선생이 자손들을 훈계해서 만드신 가거십훈의 일부분입니다. 유교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주로 참고했고요. 그밖에도 6훈이 있는데,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구전으로만 내려오고 있습니다. 저희 가문이 부를 축적하게 된 과정은 이렇습니다. 2대 송정공 최동량시절 당시 전쟁으로 인해 땅이 황폐화 되었기에 개간산업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개간을 하면 국가에서 땅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일찍부터 수로를 만들었고, 시설을 적극 정비했습니다. 3대 최국선이라는 분이 이양법을 도입해서 수확량을 배 이상 확보합니다. 사실 국가에서 이양법을 금지했는데, 예외적으로 수로가 갖춰지면 허가 했다고 하니 어쩌면 선견지명이었는지도 모르죠. 땅이 커지다 보니 소작을 주게 되고, 소작인들이 많아집니다. 당시 수확량은 지주가 대부분을 가져가는 형태가 대부분입니다.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힘들어서 자연스럽게 쟁의가 일어나게 되죠. 나중에는 도적질을 일삼을 수 밖에 없었죠. 어느날 도적들이 최부자집에도 오게 되는데 그중 최부자집의 소작인도 있었던 겁니다. 최부자는 이 광경을 보고 관청에 고발을 하지 않고 고리를 비롯한 소작인의 문서를 불살라 지르죠. 이후 5대 5 소작료를 절반으로 낮춥니다. 그러자 소작인들의 노동의욕이 올라가 생산량이 두배로 늘고, 오히려 최부자의 부는 증가하게 되었죠.      

5. 최부자 집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12대 최준 선생 대에 이르러 가문의 전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치시고, 광복 후 교육활동을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 11대 이신 최현식 선생님부터 봐야합니다. 대한제국 시절 진사를 지내셨는데 나라가 기울던 시절 국채보상운동등 적극적인 계몽운동을 펼치셨습니다. 사실 국채보상운동 하면 대구가 유명한데 경주지역이 다는 어느지역보다 활발한 운동을 펼쳤습니다. 현재 최부자집에 전개과정의 서류가 그대로 남아 있고, 5천명 이상의 명단이 있습니다. 그밖에도 면암 최익현, 신돌석 장군 등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 최부자집을 방문 하셨습니다. 그밖에도 안동쪽의 의병 이준립등의 편지들이 많이 남아 여러지역들과 활발한 교류를 펼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그러다가 일찍이 아들이신 최준선생에게 20대 초반부터 재산관리를 맡기고, 사실상 집안의 경영을 맡기죠. 나라를 뺏긴 경술국치 당시 최현식 선생은 문을 닫고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최준선생은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거지요. 임시정부를 만들 당시 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에도 참여 했고요. 최준 선생의 동생이신 최완선생은 대한광복회 재무부장을 지냈습니다. 독립운동가인 박상진 선생도 사촌입니다. 박상진 선생이 한창 활동할 당시 자금을 여러방면에서 융통했었고, 당시 최부자가 대구은행의 대주주 였기에 대출 한도를 높일 때 보증도 서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만들 당시 많은 자금을 들고 최완선생이 상해에 갔습니다. 당시 임시정부의 1년 예산의 3분의 1되는 규모 였습니다. 나중에는 조선 최고 자본회사인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회 독립운동의 자금들을 다방면에서 지원했습니다.      


6. 최준 선생 이후 최부자 집의 근황은 어떻게 되는 거죠?     


- 최준선생이 독립운동의 자금을 지원하다보니 재산이 점점 줄기 시작합니다. 재산 대출을 일본은행에서 했는데 다행히 해방이 되어 재산의 30프로가 돌아옵니다. 최준선생은 지금 우리민족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이라고 생각해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심합니다. 경북대학기성회를 만들어 유지들이 참여했고, 많은 유지들이 모여 지금의 영남대를 설립했죠. 회장은 최부자였고, 학장, 이사장을 겸해 18년동안 학교를 경영합니다. 그밖에도 계림대학을 설립해서 운영했으니 경주에있는 집과 더불어 전 재산을 학교를 설립하는데 바쳤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삼성 이병철의 회장의 제안으로 운영권을 넘겼는데 갑자기 삼성에서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집니다. 그 당시 영남대가 권력자 박정희로 넘어가게 되는거죠. 그런데 최부자댁의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 이사회를 개최해서 넘기고 이병철 회장은 일본으로 도망가게 되었죠. 지금 현재 최부자집은 영남대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부자집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집안의 관리와 사용 등이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에 있습니다.   


7. 최근 교촌마을이 관광지화가 되어 찾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이에 관한 생각은 어떻습니까?     


- 현재 교촌마을을 보시면 기와가 오래된 건물들, 경주향교 주위를 보시면 예전부터 있던 최부자댁과 후손들의 집입니다. 새로지은 반듯한 건물들은 예전엔 슬레이트 지붕으로 되어있던 소작인들의 집이었다가 이 일대를 개발하면서 경주시에서 매입해 지금의 마을이 갖춰지게 된 셈이지요. 저는 지금 추세에 맞춰가는건 맞으나 주위와 조화롭게 만들어가야하는게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8. 이제 곧 설이 다가오는데 최씨 가문만의 전통이나 제사 방식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알고 싶습니다.     


- 다른 종갓집과 전체적으로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저희는 불천위로서 정무공 최진립 장군을 모시고 있는데, 그분과 함께 전사하신 옥동, 기별도 함께 불천위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집안의 가양주가 유명하죠. 그 중 교동법주가 현재까지 명성이 높습니다. 예전 닉슨대통령이 중국에서 모택동 주석과 건배를 했는데 그 당시 건배주가 그 유명한 마오타이주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광경을 보고 우리도 우리만의 전통주가 필요하다고 느껴 종갓집 마다 찾으러 다녔는데 그 중 하나가 저희 종가집의 집안 할머니가 담그신 교동법주입니다. 소주회사인 금복주를 통해 불국사역 앞에서 생산된게 지금의 경주법부지요. 그밖에도 연엽주라는 것이 기록에 있습니다. 그 당시 좌의정을 지낸 김도희의 편지를 보면 ‘당신집에 담그는 술이 대신들 사이에 유명하니, 술 담그는 방문(방법) 한글로 적어 보내라’라는 내용이 적혀 있지요.     


9. 요즘 자체적으로 유튜브 채널도 개설하시고 대외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외부에서도 관심이 워낙 크고, 경주시에도 적극 홍보하고 있지만 이제는 후손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봅니다. 집안이 가진 자료나 철학들이 현대사회에도 큰 교훈이 되고 있죠. 견학온 아이들에게 물어보며 부자에 대한 인식이 나쁘더라고요. 그런 부자의 인식을 바꿔야 하고, 흔히 최부자를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대표격이라 하지만 사실 서양의 귀족들은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고, 부를 얻는 과정이 깨끗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와 반대로 최부자집은 스스로 개간했고, 이양법을 통해서 기술혁신을 했기 때문에 부를 쌓았습니다. 게다가 덕이 있었기에 부자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지혜들을 현대 사회에서도 적극 알렸으면 해서 아카데미를 통해 교육도 하고, 유튜브를 통해서 저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헌 자료들과 유물을 알리고 싶습니다.     


10. 최부자 집을 앞으로 찾을 독자님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교촌마을에 위치한 최부자댁 건물만 보실게 아니라 저희 가문이 갖고 있는 역사와 이야기 등을 함께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관심을 가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통해 부자, 독립운동 등의 단편적인 이미지로 알고 있던 최부자집의 이야기가 한편의 대하드라마처럼 손에 잡힐 듯 하다. 조선시대부터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최부자집의 역사인 만큼 좀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 싶다.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1권 (경기별곡 1편)이 전국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 절찬리 판매 중 입니다. 경기도 각 도시의 여행, 문화, 역사 이야기를 알차게 담았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권,3권은 2022년 3월 출판 예정입니다. 경기도는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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