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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Apr 13. 2022

[고도를 찾아가다] 1부, 운민의 강화별곡

한반도 오천년 역사가 응집되어 있는 섬







▲ 경주고분의 저녁 풍경 경주는 사방 어디를 가든지 고분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3경 중 하나인 동경으로 조선시대에는 부윤의 지위를 계속 유지했던 대도시이기도 하다.



겨울 너머 봄


- 정연복   



겨울 추위 제아무리 매서워도


기어코 봄은 온다.     


쓸쓸한 나목의 빈 가지에도


이윽고 푸른 잎 돋고 꽃 핀다.     


나 태어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이 눈물겨운 일     


나의 생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이 신비한 일은 계속되겠지.     


- - - -중략 - - - - - - -      




여행 암흑기였던 2년 동안의 겨울을 지나 드디어 봄이 찾아오는 듯하다. 길가엔 꽃망울이 어느새 가득하고, 쌀쌀하고 차갑기만 하던 바람결도 따스하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방구석에서 움츠려 있던 우리들이 집 밖으로 나와 꿈틀대는 생명의 기운을 마음껏 누려볼 시간이 머지않았다. 1년여간의 경기 별곡 시리즈를 마치고 출판 준비를 하느라 두문불출하며 전국 별곡 시리즈의 다음 지역을 구상했었다.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갈 곳도 많고 앞으로 다뤄야 할 장소도 산더미지만 우선 한반도 수천 년 역사 동안 나라를 이끌어갔던 고장들을 먼저 소개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현재는 북쪽에 있어 가지 못하는 평양, 개성은 다음으로 미뤄두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강화를 시작으로 경주, 공주, 부여, 김해, 서울에 이르기까지 옛 고도(故都)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며 경기 별곡에 이은 기나긴 여정의 막을 다시 올리려고 한다.  시중에 옛 고도를 다룬 책이나 매체는 무척 많다. 저마다 성실하게 다녔던 답사와 각종 연구자료 등을 바탕으로 내놓은 것들은 한결같이 훌륭하다. 하지만 대부분 그 도시가 도읍지로 번성했던 특정 시대에 머물러 있어 현재는 빛을 잃어가는 쇠퇴한 고장으로만 설명될 수밖에 없다.   







▲ 경주 황리단길의 풍경 대릉원 돌담길을 중심으로 한 황남동 주변의 한옥에 젊은이들이 모여 가게를 열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황리단길이 만들어졌다. 유적으로만 알고 있던 경주의 인식이 바뀌는 계기 중 하나다.


아마도 경주가 이런 서술로 인해 신라시대의 이미지로만 생각되는 듯하다. 경주는 1000년 동안 화려했던 서라벌 시절을 끝내고 도읍을 다른 도시에게 내어주었지만 고려, 조선시대 내내 주요 도시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었다. 신라의 화려한 고분군과 유적들을 뒤로하고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조선시대의 유구나 일제강점기 시절 지어진 건축물도 심상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현재는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 문화역사 도시 중 하나지만 대릉원 담벼락 사이 오래된 한옥을 젊은 상인들이 들어와 레트로 열풍을 타고 황리단길이 조성되었다. 이로서 경주는 다시 활기를 띠고 생명력을 더해가고 있는 것이다.



백제의 옛 퇴락한 도읍으로만 알려진 공주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전체를 관할하는 충청감영과 관찰사가 주재하던 곳으로 명실상부한 충청도의 중심도시였다. 한때는 충청도라는 명칭 대신 '공충도', '공홍도', '공청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을 정도다. 부여 역시 눈을 돌려 시야를 넓혀보면 김시습이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무량사와 관아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홍산면도 그 자체로 손색없는 여행지라 할 수 있겠다.

금관가야의 설화가 도심 곳곳에 서려있는 김해와 창녕, 고령, 함안 등 경상도 동부 일대의 도시들은 한데 묶어 가야는 물론이요, 도시마다 간직하고 있는 향토문화들을 함께 살펴보는 시간도 가져보려고 한다.   







▲ 서울에 위치한 창덕궁 인정전 서울은 조선시대 수도로 정해진 이후 현재까지 줄곧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를 놓치지 않고 있다.


마지막은 원점으로 돌아와 60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이 땅의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를 줄곧 유지하고 있는 서울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한 한강이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만큼 한양이 조선의 도읍지가 되기 이전부터 줄곧 주요 요충지로 중하게 여겨졌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첫 도읍지인 위례성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고려 3경 중 하나인 남경으로서 천도가 추진되기도 했었다. 조선시대를 거쳐오고 그 몸집을 점점 불러나가는 서울은 동네마다 이야기가 풍성한 만큼 빨리 그 차례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 강화에 남아있는 고려왕릉 고려는 몽골의 침입동안 강화로 수도를 욺기면서 항쟁의 의지를 적극 드러냈다. 현재도 강화도에는 고려왕릉 4곳이 전해지고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강화를 시작으로 기나긴 여정을 떠나보기로 하자.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속해있지만 실제로는 경기도 김포시를 거쳐야 들어갈 수 있는 섬, 청동기 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5000년 역사가 압축되어 있는 강화도는 보물섬 그 자체라 해도 모자라다. 발길을 따라 걷다 보면 신비한 설화가 깃들어 있는 마니산이 있고, 교과서에 나오는 고인돌이 있으며, 고려의 왕궁터와 능묘 섬 전체를 감싸고 있는 관방유적인 진(鎭)과 보(堡)까지 다양한 형태의 유적을 한자리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화도는 수도권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가는 길은 편치 않다. 육지와 두 개의 다리를 통해 들어가는 길은 어느 루트로 가든지 김포의 산단을 지나가야 하고, 평일에는 수많은 화물차의 행렬로, 주말에는 나들이객들로 수많은 시간을 길에서 보내기가 일쑤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주도로인 48번 국도가 자동차 전용도로가 아니다 보니 신호에 잡히는 경우가 많아서 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통과 인내도 잊을 만큼 강화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여행의 콘셉트에 따라 강화는 사람마다 다른 매력을 가져다줄 것이다.     







▲ 팔만대장경을 간행한 선원사의 터 강화도에 자리한 선원사에서는 지금까지 민족의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한 팔만대장경을 간행했다. 선원사는 현재 터만 남아있다.



필자에게 강화도가 남다른 이유는 역사의 아픔이 유달리 잦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조정을 주무르던 최이(최우)의 결심으로 인해 이 섬으로 조정이 피난 오면서 여기를 기점으로 몽골과 수십 년 항쟁이 시작되었다. 육지에 있던 백성들은 몽골의 끊임없는 학살과 수탈로 인해 고통을 받았지만 최 씨 정권을 위시한 귀족들은 섬 한 편에 웅크리고 앉아 끊임없는 향락에 몰두했다. 하지만 강화의 선원사에서 팔만대장경을 간행하면서 현재까지 고금의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다.



이후 강화도는 왕실의 유배지 혹은 대피처로 적극 활용되었다. 또한 한강을 따라 한양으로 들어오는 주요 요충지가 되면서 유수부로 다시금 거듭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구한말 다른 동네보다 외세의 거센 침입을 받은 곳이 바로 강화도다.  미국, 프랑스의 거센 침입을 받았던 신미양요, 병인양요의 현장이 바로 강화도였으며 특히 프랑스는 강화읍내까지 쳐들어와 유수부의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온갖 고문서 등을 약탈해 갔다. 이후 1873년 일본과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을 맺은 현장이기도 하다. 어느덧 강화와 김포 사이에 놓인 1km가량의 작은 염하를 건너면서 강화도로 입도하게 되었다. 수천 년 동안 강화에 쌓여있는 역사의 얼개를 차근차근 풀어보면서 이 고장의 이야기를 함께 알아가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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