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한 양의 확신을 유지하는 도구 '겸손'
1.
2년 전 모 스타트업의 PO 최종 면접 이후에, 대표님과 커피 타임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은 희미 해졌지만, “린스타트업은 우리한테 교과서죠"라는 이야기를 하며 신나게 이야기한 기억이 남아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잘 알지도 못하고 떠드는 애송이였고, 대표님은 웃음 속에 감추셨지만 내 얕은 내공을 간파하셨는지 나를 채용하지 않으셨다. (물론 지금도 애송이다..)
탈락에도 난 겸손해지지 못했고, '인재를 놓치셨네' 하며 웃고 다녔다. (꽤 긍정적인 편..)
2.
창업을 하고, 예비창업패키지라는 정부 사업에 지원했다. 그리고 오늘 결과가 나왔다.
서류 탈락 (A.K.A 서탈)이었다.
제품도 출시했고, 트랙션도 괜찮아서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결과를 보고 화가 먼저 났다. 정신머리를 가다듬으며, 왜 떨어졌을 까 고민했는데 모로 가도 결론은 내 탓이었다. 팀원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다 보니, 마음에 겸손이라는 싹이 틔웠다.
3.
린스타트업은 신기하게도 읽을 때마다 새로운 곳에 형광펜이 칠해진다. 새로운 경험이 축적되면서, 글 안에 정제된 표현으로 함축되어 있는 내용이 새롭게 읽힌다. 그래서 무엇인가 막히는 느낌이 들 때면 린스타트업을 다시 찾게 된다.
이번에 다시 한번 린스타트업을 읽으며, 꽂힌 부분은 1장의 비전-전략-제품 피라미드였다. 비전이라는 축을 유지하며, 전략의 방향 전환(Pivot)에 대한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새삼 다시 뇌리에 박혔다.
(린스타트업에서 피벗은 비전에 굳게 발을 디디고, 전략의 방향 전환을 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스타트업은 세상을 바꿀 만한 사업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이를 토대로 제품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창업가들은 이 비전을 통해 조직을 원하는 목적지까지 끌고 가며, 수많은 전략의 방향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방향 전환의 시그널을 찾아내는 예술적인 의사결정 방법에 대한 설명이 후반부에 나온다.)
4.
겸손은 누구나 그 뉘앙스를 머리에 가지고 있는 단어다. 나는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고, 친구가 이야기해준 멋진 정의를 마음속 문장 서랍에 고이 모셔놓고 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을 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적게 생각하는 것이다 (by C.S. Lewis)"
이번 지원사업 탈락에 팀원들에게 미안함 보다 화가 먼저 난 것을 보면, 난 아직 겸손의 길에 다다르는데 많은 디투어(Detour)를 하는 것 같다.
5.
생각을 정리할 겸, 책을 보는데 겸손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눈에 들어왔다. 겸손함(Humility)의 라틴어 어원 가운데 하나는 "땅에서부터"인데, 여기로부터
"겸손함은 얼마든지 오류를 저지르고 잘못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땅에 뿌리를 튼튼하게 내리는 것이다"라고 적혀있었다. (Think Again, Adam Grant)
이걸 읽는데, 뜬금없이 린스타트업이 생각났다.
창업가들이 맞이하는 도전은 운전(사업)을 해 나가면서 언제 어떻게 방향 전환해야 하는지 판단을 균형 있게 잘해나가느냐 이다. 즉, 얼마든지 전략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방향 전환 시점을 잘 캐치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잘하려면 나의 전략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즉, 사업을 잘하려면 겸손해야 한다.
(6.)
사실 반대급부도 있다.
확신이 지나치게 적으면 자신감 있게 끌고 가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적절한 확신의 양을 겸손을 통해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통계학의 1종 오류, 2종 오류가 왜 나왔는지 이해가 간다. 맞는 것도 틀릴 거라 생각하는 바보가 되어서도 안되고, 틀린 것도 맞다고 밀고 나가는 막무가내가 되어서도 안 되겠다. 오늘 겸손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