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시절은 누구나 그렇듯, 작은 의견차이가 생겨도 눈치껏 남자들이 먼저 꼬리를 내린다. 여자친구가 화가 나 봤자 얼르고, 달래고, 결국 자기만 금전적, 육체적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니 나는 여자친구에서 아내로 바뀌고, 남자친구는 남편으로 바뀌어- 이제는 서로를 어르고 달래는 일 따위는 없어졌다.
결혼 후 남편하고 의견차이 중 자주 부딪혔던 것은 어떤 사건을 대하는 자세이다. 결혼을 하고 10년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시어머니의 불 같은 화를 당해내는 일과 세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고열에 시달리고 구급차를 탔던 일, 이사를 가야 하는데 살고 있던 집이 나가지 않아 큰 손해를 볼 뻔했던 일들.
결혼 후 3년쯤 되었을 때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가 백일쯤 되었을 무렵... 아이의 두상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동그란 모양이 아니라 길쭉한 두상으로 똑바로 천장을 보고 눕지 못하고 자꾸 고개가 옆으로 뉘어졌다. 그것이 기우가 아니라는 것은 대천문이 백일 때 다 닫혔다는 사실이었다. 너무 겁이 났다. 급하게 이리저리 다니며 대학 병원에 찾아가 봤지만, 엄마를 닮아서 머리가 짱구라는 대답뿐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엄마라는 직감적인 느낌이 계속 불안하고 께름칙하게 만들었다.
얼마 후 영유아검진을 받기 위해 다니던 소아과에 방문했는데 뜻밖에도 선생님이 아이의 두상을 살피더니 선천성질환을 의심하셨다. 역시... 나의 불안감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바로 소견서를 써주셨다. "두개골 조기 유합증-시상봉합" 우리 아이의 병명이었다. 나는 살던 동네를 벗어나 혜화동에 있는 서울대학교병원과 아주대학교병원에 진료를 예약했다. 진료를 기다리는 날까지 몇 주 동안 나는 온갖 상상과 경우의 수를 합친 만큼의 불안과 공포에 짓눌려야 했다.
소두증, 뇌압상승으로 인한 갖가지 증후군들, 두개골 조기 유합증의 수술후기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뭘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그런데 남편의 말이 나를 아주 어이없게 했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나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우리 아이는 이미 괜찮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봐야 할 만큼 위중한 상황이었다. "천하태평도 유분수지..." 나는 그런 남편이 닭 같아 보였다. 얼굴만 가리면 자기 몸뚱이도 안 보이는 줄 알고, 목청껏 꽥꽥 울어대는 닭.
괜찮다는 말 뒤에 숨어서 모든 현실을 도피하는 겁쟁이로 보였다. 그 이후로도 남편은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마다 "괜찮을 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 남편과 산지 10년이 되었다. 정말 괜찮았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다. 정말로 괜찮았다.
위급한 혹은 위험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걱정하는 것, 겁내는 것, 슬퍼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갖가지 상상으로 나의 감정을 축내며, 지치고, 불안한 마음을 아이들과 남편에게 보란 듯이 으스댔던 것이다. 나 또한 아무 대책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슬픈 일이 닥치기 전에 미리 슬퍼하면 좀 덜 슬플 줄 알았다. 아픈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다면 미리 아파해야 덜 아플 줄 알았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습득된 나의 방어기제였는지도 모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다가오는 슬픔은 너무 슬펐고, 너무 아팠다.
이제야 나는 안다. 슬픔을, 아픔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슬픔이 닥치면 그때부터 슬퍼해도 충분하다. 그런다 해도 슬픔의 크기가 더 작아지도 더 커지지도 않는다. 그냥 그대로의 슬픔이다. 타인들의 선택에 의해 좌우되던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 이제는 나도 주도적으로 해결하고, 용감하게 맞닥뜨릴 수 있는 어른이다. 그러니 이제는 괜찮다~ 괜찮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