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지 않아도 될 일을 또 다시 겪는것은 참으로 서글프다.
2018년 8월 초, 큰 수술을 하고 충분히 회복하지 못한채 9월 중순 새롭게 이사한 곳에서 오픈을 강행했다.
그 수술이후로 건강 건강 그렇게 외쳤지만 현실은 통장 잔고를 매일 확인해야 하는 대출 인생이 수입없는 삶을 몇개월 이상 유지하기란 불가능한 것이었으므로.
그렇게 확 줄인 메뉴로 조용히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세상에 나란 사람, 어쩜 이렇게 운이 나쁠수 있을까.
2018년 10월초 큰 태풍이 제주에 지나갔고 그 태풍 속에서도 문을 열어야 한다며 무리해서 출근을 하다가 후름라이드가 되어버린 계단에서 미끄러져 심각하게 구르고 말았다.
그 잠깐의 시간동안 나는 죽음을 보았다.
8월에 전신 마취를 하고 수술한지 겨우 두달째인데 수술한 복부가 다 터져버린것은 아닐까.
혹시 척추를 다쳤다면? 어딘가 크게 손상되어 일상 생활이 불가능하다면? 하는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고 이런 생각을 하는것을 보니 죽지는 않은것 같아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또 다시 내게 발생한 이 불행이 당황스러워 그 자리에서 아이처럼 엉엉 울고 말았다.
임시휴무를 내걸고 잠시 안정을 취하다가 태풍속을 뚫고 동네 의원에 가니 대수롭지 않게 반깁스만 해주었다. 뼈에 이상이 없으니 괜찮다고.
그러나 몇달이 지난후 다친 부위의 통증으로 잠을 잘수가 없었고 그제서야 큰 대학병원에 가서 제대로 진단 받은 나는 정말 미련했다. 어깨의 슬랩이 찢어져 손상되었고 염증으로 이미 굳을데로 굳어져버려 석회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전신마취 수술의 괴로움을 또 겪고 싶지 않아 오랜시간 주사와 약으로 버텼는데 그것이 되려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온몸이 망가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류마티스 관절염, 황반변성, 고관절 염증, 위장장애, 체중증가, 탈모, 밑도 끝도 없는 하혈.
나는 그동안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형벌을 받고 있는건지 정말로 이게 다 가능한 일인가 싶을 정도의 모든 불행이 나에게 올인 된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2년만에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2020년 2월초, 코로나가 이제 막 전국적으로 퍼지던 시점이었다.
전신마취는 역시 힘들었고 두시간 넘은 수술이 이 고통의 끝이 아닌것은 또 다른 불행이었다.
나에게는 몇개월간의 지난한 재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매일 제주시에 있는 병원에 재활을 가야만 했다.
그와중에도 남편이 매일 차로 나를 병원에 운반해주어야 하면 정상적인 영업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담당 교수님이 뼈를 많이 깎아냈고 석회화된 부위도 많이 절개를 해서 꽤 큰 수술이라고 하셨고 수술한 팔은 절대 움직이면 안된다 하시니 나홀로 버스도 무리였고, 택시는 왕복 6만원. (일단 우리 형편에 택시는 말도 안되고) 이래저래 영업은 어려웠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사람은 바로 나일까.
어딘가에 그 문장을 이해하기 쉽게 딱 하나의 단어를 써야 한다면 내이름 석자를 빌려주고 싶다. 어쩜 나는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생각하다가 심각한 우울증까지 겪고 말았다.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생각을 했고 그로부터 매일 죽고 싶어 정상적인 삶을 살수가 없었다.
눈을 뜨면 자꾸만 죽고 싶었고, 눈을 감아도 죽는 생각만 떠올랐다.
나로 인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몹시 괴로울 나의 옆사람에게 너무 미안했다.
잦은 입원과 치료, 수술비로 빚이 더 늘었으니 죄책감은 배가 되었다.
나만 없으면 되는데. 나만 사라지면 내 옆의 이 남자가 이렇게 고생 안해도 될텐데 하는 생각에 괴로웠다.
고통속에 괴로워하는 나를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그가,
나의 괴로움을 모를리 없는 그가,
몸과 마음이 괴로워 매일 죽고 싶다고 울부짖는 내게 말했다.
그 말에 내 가슴에 얹어진 커다란 돌덩이가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 이후로 큰 돌덩이는 조금씩 작아졌다가 다시 커지기도 하고 부숴졌다가도 다시 커다랗게 엉겨붙기도 했지만 나는 죄책감에서 조금씩 벗어났고 죽음에서도 아주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그래. 나는 그저 운이 나빴을뿐이야. 내 탓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