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아하는(Favorite) 것을 쟁취하기 위한 그녀들의 전쟁
나는 시대극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 이질적인 풍경과 모습들을 보고 있자면 현실과 마냥 동떨어진 판타지 같다가도, 이제는 멀어진 시간이지만 어쨌든 실제로 존재했던 시대이기 때문에 지극히 현실적으로 다가오기도 해서 그 이중적인 매력에 어필당했다.
그래서 웬만한 시대극 영화는 국적을 불문하고 끌리는 편인데 이번에는 심지어 '요르고스 란티모스'란다. 주연 배우로는 '레이첼 와이즈'와 '엠마 스톤'이라는 이름이 기다리고 있었고, 아카데미 10개 부문 노미네이트라는 기록도 지나치게 매력적이다. 그래서 안 볼 수 없었다. 당연히 보았고 이 어려우면서도 깔끔하고, 지루하지 않지만 내가 뭘 본 걸까 싶은 영화는 여러모로 아주 인상적인 영화였다.
더 페이버릿(The Favorite) : 가장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여왕의 총애를 얻고자 갖은 노력을 불사르는 두 사촌지간인 여인들의 경쟁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 영화의 제목인 '더 페이버릿'을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여왕의 '페이버릿'한 신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조금 더 깊숙이 살펴보았을 때, 이 제목에 들어있는 복합적인 의미들이 하나둘씩 더해지게 된다.
우선, 왜 '사라(레이첼 와이즈)'와 아비게일(엠마 스톤)'이 여왕의 '페이버릿'이 되려고 발버둥 쳤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녀들 자신만의 'Favorite'과 연관되어있지 않을까? 여왕의 총애를 뒤에 업고 나라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위해 노력한 사라나, 다시 귀족으로서의 명예와 권력을 얻고싶어 했던 아비게일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 즉 권력이라는 달콤한 힘을 얻기 위해 투쟁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은 단순히 그런 그녀들의 권력 싸움에 이용된 도구에 불과할까? 아니, 그녀 역시 자신이 가진 힘인 권력을 이용해 자신이 가지지 못한, 그래서 가장 가지고 싶어 한 '애정'을 탐닉하였다. 휘그당이니 토리당이니 또한 다를 바 없다. 자기 정당의 이익을 위해, 혹은 궁극적으로 제 자신이 소유할 권력을 위해 아등바등한 것은 마찬가지니까.
결국 영화 속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무기로 자신이 가지지 못한, 그래서 끝없이 욕망하는 '무언가'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 중이었던 셈이다. 권력의 중심에 있지만 애정을 갈구했던 여왕은 힘을 무기로 진심인지 가식인지 모를 애정을 끝끝내 얻어냈으며, 그 애정을 가진 사라와 아비게일은 여왕에게 마음을 주거나, 혹은 주는 척을 하며 끊임없이 욕망하던 권력을 가졌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과 단순히 두 사람만의 투쟁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결핍에 대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발악하고 온갖 일을 무릅쓰는, 그래서 결국 'Favorite'한 무언가를 얻어내고야 마는 사람들의 모습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은밀하게, 하지만 더 치열하게 벌어지는 전쟁
영화의 배경인 당시의 영국은 프랑스와의 큰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으로 그려진다. 실제 전투 장면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영화 전반적으로 전쟁 특유의 긴장감이 감도는 이유는 아마도 궁전 내부에서 진행되던 은밀하고도 치열한 권력투쟁 때문일 것이다.
사라와 아비게일을 중심으로 그려진 토리당과 휘그당의 정치싸움은 실제 전쟁보다 더 은밀하고 교묘하게, 그러나 훨씬 치열하게 이뤄진다. 사라과 아비게일이 여왕의 마음을 두고 좌지우지하려 한다면, 정치인들은 그런 그녀들을 뒤에 업고 한나라의 의회를 제 입맛에 맞게 요리하려고 애쓴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한 궁전 안에서의 상황을 보다 보면, 오히려 프랑스와의 전쟁은 그들의 권력 싸움을 위한 명분에 불과하게만 느껴질 정도이다.
모든 전쟁에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듯이 이 조용하지만 처절한 전쟁 끝에 사라는 패자로, 아비게일은 승자로 기록되었지만, 의례 전쟁에서 그렇듯 승자라고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볼 수는 없다. 전쟁은 패자에게도 승자에게도 많은 것을 빼앗아가는 존재이니까. 패자인 사라가 권력을 잃은 것은 당연하며, 승자인 아비게일 또한 여왕의 총애를 유지하기 위해 하기 싫은 수발까지 들어야 하는 모습을 보자면 온전히 모든 것을 쟁취했다고 볼 수 없다. 조용하고 은밀한 전쟁이었지만 전쟁은 전쟁인 셈이다. 발을 들인 모두에게 적어도 하나는 앗아가는 전쟁의 최후처럼, 사라와 아비게일도 결국 그 치열한 전쟁 끝에 원하던 '모든 것'은 얻지는 못했으니까.
치정이 예술이 되는 순간
사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있지만, 근본적으로 총애를 얻기 위한 싸움이 핵심인 이 영화가 이렇게나 매력적인 첫 번째 이유는 누가 뭐래도 배우들의 미친 연기력 때문이다. 여왕의 눈에 들기 위해 발악하는 '레이첼 와이즈'와 '엠마 스톤'의 연기는 누구 한쪽의 편을 들어주기 어려울 만큼 쟁쟁하다. 내가 여왕이었다면 이런 선택만큼 행복하지만 괴로운 선택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이 절로 이해가 되던 '올리비아 콜맨'의 연기 역시 박수가 절로 나온다. 여왕이지만 많은 상처를 가진, 그래서 위태로운 앤 여왕의 모습은 자꾸 시선을 머물게 한다.
또한 이 영화가 단순한 치정극으로 그치지 않은 것에는 감독의 역량 역시 크게 한몫한다. 그들의 치정에 얽힌 정치를 해학적으로 그려내 실소를 자아내는데, 그래서 영화가 단순한 사랑, 혹은 정치 풍자라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면서 밸런스를 맞춘다. 특히 여러 개의 장으로 나누면서 각 장의 핵심 대사들을 보여주는 식의 연출이 이어지는 내용에 대해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기대를 배가시킨다. 물론 감독이 이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킨다는 점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내용만 봤을 때에는 감독의 전작들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역시 '요르고스 란티모스'이다. 뻔히 보이는 스토리 안에서 캐도 캐도 나오는 숨겨진 의미들이 역시 인상적이지만 아직은 어렵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가 막연히 어렵고 지루하다에서 끝나지 않는 이유는 군데군데의 유머가 좋고 전반적인 짜임새가 탄탄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영화의 퀄리티를 한층 높여준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는 굳이 말 안 해도 알 것이라 믿는다. 꽤나 웰메이드라 생각할 거리가 많은, 그럼에도 즐겁게 본 영화다.
나의 별점 : 4.0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