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시인 소식의 생애와 음식
우리나라 판소리 5마당 중 유일하게 중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삼국지연의를 바탕으로 한 ‘적벽가’다. 유비와 조조의 불꽃 튀는 전투와 화염에 휩싸인 장강, 그 속에서 치열하게 버티던 인간군상들의 모습이 중국을 넘어 한반도에까지 영향을 미친 셈이다. 적벽대전을 읊은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북송 시대 시인 소식, 소동파가 꼽힌다.
“나뭇잎 같은 배를 타고 조롱박 술잔을 서로에게 권하며,
천지에 기대어 사는 하루살이요, 망망한 푸른 바다의 좁쌀 한 톨입니다.
나의 삶이 잠깐임을 슬퍼하고, 장강의 무궁함을 부러워합니다.
신선과 더불어 즐겁게 노닐며, 밝은 달을 안고서 오래도록 하고 싶지만
불현듯 얻지 못할 삶임을 알기에, 여운을 슬픈 바람에 기대어 보냅니다.”
소동파라는 호로 더 유명한 소식은 오늘날의 쓰촨성인 미주 미산 출신이다. 소식과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은 이른바 ‘당송팔대가’로 불리는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유불도의 조화를 추구하는 ‘촉학’이라는 학문분야를 개척했고 호방파라는 문학 조류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다만 그는 관직에서 여러 차례 풍파에 시달려 유배와 복직을 반복해야 했다.
소식은 자신의 삶을 ‘입이 바쁘다’는 말로 요약했다고 한다. 조정에 직언을 하느라 바빴고, 시를 읊기에 바빴으며, 요리와 음식을 즐기는 데 바빴다는 것. 22세에 과거에 합격한 그는 직후에 모친상을 겪고 연이어 아내와 부친이 사망하는 등 복잡한 집안 사정 탓에 33세때 비로서 벼슬길에 올랐다. 이 시기는 왕안석의 신법 운동으로 조정이 시끄러웠고 소식은 왕안석 본인과 그 세력에 의구심을 품었다. 급격한 개혁이 백성에게 미치는 해로움도 우려되는 부분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상소를 통해 황제를 설득하려 했으나, 오히려 좌천을 당했고 지방관 발령을 받아 지금의 항저우인 임안으로 가게 됐다. 이곳에서 소식은 치수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서 관료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백성들을 이끌고 제방을 쌓아 홍수 피해를 최소화한 것이다. 이 지역 주민들에게 ‘진흙만큼 싸다’는 돼지고기를 알려주고 직접 조리법도 전수했다. 임안을 한층 더 발전시켜 다시 등용됐으나 고난은 그치지 않았다.
지방의 실태를 올린 상소가 신법당 일파의 눈에 거슬려 탄핵을 당한 것이다. 이후 구법당이 집권하면서 예부상서로 복귀하지만 권력에만 눈이 먼 조정 대신, 세력을 키우려는 성리학자들과 대립했다. 또 다시 소식은 해남으로 유배를 갔고 휘종이 즉위하면서 사면을 받았으나 상경하던 중 병으로 사망한다. 후일 송 고종은 소식을 태사로 추증했고 그 손자 소부는 예부상서를 제수받았다. 효종 때는 ‘문충’이란 시호를 받기도 했다.
전 시대인 당나라의 문학은 낭만적인 경향이 짙었는데, 이와 반대로 그의 시는 철학적인 면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남성적이고 서사적 정서를 지닌 소식의 문장들은 고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문인이자 학자인 이규보는 당시 “과거 공부할 때는 풍월에 눈돌릴 틈이 없다가, 급제 후에는 시를 배우며 소동파에게 빠진다”는 말을 남겼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아예 본인의 이름을 소식에게서 따올 정도로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 조선 중기까지도 과거에 급제한 33명을 두고 “33명의 소동파가 나왔다”고 말할 정도.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생전의 소식은 고려에 적대적이었다고 한다. 고려를 천한 나라라고 지칭하는가 하면 다른 연호를 쓰는 것에 대해 “황제를 칭한다”고 비난했다. 다만 이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송이 요와 패권을 다투고 있는 상황에서 고려는 양쪽에서 적절히 눈치를 살피며 이득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또 여요전쟁 이후 고려는 꾸준히 대군을 키워 왔는데, 요와 경쟁하는 송으로서는 후방에 대군을 지닌 고려에 위협을 느꼈다. 고려가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나라의 명운이 달라질 수 있는 상황에서, 송나라 조정은 그저 비위를 맞춰주는 입장이었던 셈이다.
일부 사신들이 조공을 제대로 바치지 않으면서 고가의 하사품을 받고 이를 팔아 치부하는 모습도 밉상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군사기밀 지도나 황실 희귀도서를 요구하는 등 ‘을질’을 일삼으니 더더욱 곱게 보이지 않았던 것. 조정은 고려를 마뜩찮게 생각하는 소식을 “나라의 이익을 생각할 줄 모른다”며 좌천시켰다. 요즘으로 치면 영업사원이 거래처 사람들에게 눈치없이 직언을 해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모양새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기록에 따르면 소식은 정작 고려인이나 고려 문화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던 것 같다. 제자 장뢰가 고려 부채를 선물하자 이를 칭찬해 시를 지었고, “고려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구경했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도 남겼다.
시 이외에 소식을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는 음식이다. 1077년 그가 서주의 지주를 지내던 시절 치수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자 백성들은 감사의 뜻을 담아 돼지고기를 올렸다. 그는 자신이 직접 양념에 조린 고기, 오늘날의 동파육을 만들어 나눠 먹었다고 한다. 백성들은 소식의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을 높이 사 ‘고마운 음식이 담긴 고기’라는 뜻의 회증육(回贈肉)이라고 불렀다.
그가 조정 관료라는 높은 신분을 가졌으면서도 손수 요리를 했던 이유는 유배지에서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중국에서 대중적인 ‘홍소육’을 기본으로 소식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푹 삶는 수육을 고안했다. 그의 호를 붙인 동파육은 현대에 와서도 항저우를 대표하는 인기 메뉴로 꼽힌다. 기존의 요리법을 응용했다는 설이 가장 잘 알려졌지만 친구와 바둑을 두다가 고기를 삶는 물이 확 졸아버렸다는 설, 백성들이 돼지고기를 먹을 줄 몰라 직접 개발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 요리에 소식이 관련됐다는 것만큼은 정설이다.
삼겹살이나 오겹살을 간장 베이스 소스에 푹 조린 이 요리는 의외로 만들기 꽤 까다로운 음식이다. 우선 껍질이 붙은 고기를 뜨거운 물에 5분 가량 데친 후 물기를 꼼꼼하게 닦아준다. 웍에 식용유를 달군 후 살짝 튀겨 육즙을 가둔다. 고기를 주사위 모양으로 썰고 노두유, 소흥주, 설탕, 생강, 쪽파 등을 넣어 조려낸다. 조린 고기를 꺼내 냄비에 담고 30분 가량 쪄낸 후 청경채를 곁들인다. 가정에서 만들 때는 반드시 정석대로 할 필요는 없지만 조리는 시간만큼은 3~4시간 정도로 넉넉히 잡아야 야들야들 입안에서 녹는 식감을 살릴 수 있다.
‘적벽대전’을 보면 “손님은 기뻐하며 빙그레 웃고서 술잔을 씻고서 다시 따르니 안주는 어느새 없어지고 잔과 쟁반이 어질러진 채 서로 베고 배 안에 누워 자니 어느새 동녘이 훤히 튼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음식과 풍류를 함께 즐기던 소식의 면모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심지어 그는 100여가지의 조리법을 엮어 ‘동파주경’이라는 책까지 냈다. 소식이 사랑한 또 다른 요리를 꼽자면 ‘서시유(西施乳, 중국 4대 미녀 중 하나인 서시의 젖이라는 의미)’라고 불리는 복어 이리가 있다.
소식은 황복 제철이 되면 이를 찾아 먹느라 정사를 게을리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시 혜승춘강만경에서는 “물 쑥은 땅에 가득하고 갈대 싹은 짤막하니, 지금이 바로 하돈(河豚:복어의 옛 명칭)이 올라올 때”라고 언급한다. 복어를 두고 "죽음과 바꿀만한 맛"이라고도 했다. 독성이 강한 복어는 조리할 때 피와 내장을 철저히 제거하는 게 관건이다. 하지만 수컷 복어의 뽀얀 이리는 진미로 꼽힌다.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에서도 “이리를 생선 배에 넣고 실로 동여 두어 시간 뭉근한 불로 끓여 먹어라.”고 적은 레시피가 나온다. 복어 이리는 복집에서 단골들만 준다는 부위로 입에 넣는 순간 크림처럼 녹아내린다. 생선의 응축된 풍미가 가득 퍼지는 느낌이다. 일본에서는 약간의 술과 함께 찐 ’시라코(白子)‘를 별미 안주로 여긴다.
당시 송나라는 오늘날까지도 명성을 갖고 있는 중국요리가 화려하게 개화된 시절로 불린다. 북송 시대를 배경으로 한 ’수호지‘만 보더라도 장강의 잉어탕이나 매운 두부요리 등 수많은 요리가 등장하며, 스핀오프격인 ’금병매‘ 역시 정력에 좋다는 다양한 메뉴가 곳곳에 소개된다. 무려 1000년 전 송나라 수도 개봉에는 70여곳의 식당이 있었고 24시간 영업하는 곳도 적지 않았다. 소빙하기가 끝나면서 식재료가 풍부해졌고, 운하를 통한 유통이 활발해 각지에서 온갖 식재료를 구할 수 있었다. 석탄을 땔감으로 이용하며 중국요리 특유의 ’불맛‘을 내는 강한 화력을 내는 것도 가능해졌다.
특히 소식이 오랜 시간을 보냈던 저장성 항저우는 예로부터 각종 수산물이 풍부한 지역이다. 장강과 서호에서는 맛있는 민물생선이 잡히고, 온난한 기후에서 자라는 죽순과 연근 같은 야채와 품질 좋은 용정차가 이들의 식문화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었다. 항저우 대표 요리로는 닭을 연잎에 싸고 진흙을 발라 구운 ’부귀닭‘이 있다. 닭의 잡내는 없애고 감칠맛을 살린 이 요리는 오래전 드라마 ’대장금‘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민물새우에 은은한 녹차향이 감도는 용정 새우볶음은 고급스러운 별미이며, 간장, 맛술, 설탕 등으로 새콤달콤한 맛을 낸 시후추위도 반드시 맛봐야 할 메뉴로 꼽힌다.
소식은 차에 대해서도 높은 식견을 가졌다. 어느날 그는 어린 서동에게 화계하 상류 금사사에서 물을 길어오게 했다. 그런데 심부름이 귀찮았던 서동은 중간쯤에서 물을 길어갔으며, 소식은 물맛의 차이를 금방 눈치챘다고 한다. 또 한번은 색이 다른 대나무 부적 두 개를 구해 하나는 사당의 승려에게, 또 하나는 서동에게 주었다. 서동은 승려가 가진 부적을 표식으로 가져가야 했으므로 꾀를 부릴 수 없었다. 차를 끓일 때 물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있는데 당시에는 “물고기 눈 같은 거품이 올라올 때”을 기준으로 삼았다고. 소식의 시 시원전다에는 “게의 눈을 이미 지나 물고기 눈이 나오니 쐐애쐐애 솔바람 소리와 흡사하다”고 묘사했다.
까다로운 미식가이면서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을 가졌고, 직언을 반복해 적을 만드는 한편에도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소식. 1000년 전 그의 삶은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이면서 발명가, 과학자 등 다양한 면모를 갖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도 비슷해 보인다. 소식에 대해 오늘날까지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